왜. 사람이 잘못을 하면 원하든, 원치 않든 모험 정신이 강해진다.
어떻게든 수습해보려는 노력을 하기 위해 평소에 안 하던 짓도 과감히 하게 된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으니 믿지는 말고.
근데 아마 맞을 거다. 왜냐면.
"와, 이거 어떡하냐, 진짜."
내가 그러고 있거든.
내가 마지막으로 시간을 확인했을 때가 8시쯤이었으니 아마 9시가 다 되어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사실 난 내가 화장을 안 지웠다는 걸 일어나서야 깨달았다.
오전 7시에 울린 알람 소리를 듣고 바닥에 깔린 푹신한 이불의 감촉과 내 호흡 기관을 막아오는 베개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뜨니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와, 무슨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잤냐. 왠지... 숨이 막히더라니.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내 눈앞에 보이는 새빨간 빛에 잠시, 아주 잠시 당황했으나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며 이 빨간색을 설명시켜주었다.
진짜 더럽게도 빨갛네.
빨간 걸 보니 갑자기 딸기가 먹고 싶어져 딸기나 사러 나갈까, 하며 몸을 일으켰는데
"뭐야?"
베개에 떡하니 찍힌 내 얼굴 자국에 당황해 상체는 일어난 채 하체는 드러누운 좀 이상한 자세로 멈춰버렸다.
지금 저 베개에 있는 하얀색과 검은색과 빨간색의 조화가... 내 얼굴이야, 설마?
나는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보고 눈도 비벼보고 원래 베개가 그런 디자인 일 거라며 이리저리 뒤집어보기도 했으나
"망했다."
그건 정말, 빼박, 내 얼굴이 맞았다.
설마 하며 베개 위로 얼굴을 살짝 뗀 체 저 이상한 흔적과 내 얼굴을 대조해보니
"어, 어떡해. 이거 어떡해..."
흔히 말하는, 빼박캔트. 내 얼굴이었다.
근데 나 왜 눈썹 짝짝이로 그렸지. 거울 봤을 땐 괜찮았는데.
그러다 새삼 뭉친 파운데이션도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고, 짝짝이로 그려진 눈썹도 살펴보고 빵을 먹어서인지 반쯤 사라져 겉 형체만 남아있는 입술도 한번 봤다.
나 이렇게 생겼나.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가 뜬금없이 뭔가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베개... 누구 거지?
그다음은 뭐. 뻔하지.
급하게 커버를 벗겨 하얀 솜에는 다행히 내 흔적이 묻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쉰 다음 베개 커버를 손에 꼭 쥔 채 창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아직 자겠지? 지금 시간이... 8시 좀 안 됐으니까 아직 자고 있을 거야.
떨리는 마음으로 창문을 조심히 여니 새소리 하나 안 들리는 적막한 옆집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창틀에 기대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전국씨한테는... 뭐라고 하지.
어제 그렇게 침 흘리지 말라고, 물어뜯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던데.
이렇게 처참한 꼴을 보여주는 것보단 차라리 내가 베개를 물어뜯었다고 하는 게 나으려나.
나는 정말 물어 뜯어볼 생각으로 베개 커버를 입에 가까이 가져갔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빨간 천 쪼가리를 던져버렸다.
새로 사줄까? 근데 지금 열었을 이불집이... 없겠지.
"아!"
이래도 저래도 딱히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 소리에 내가 놀라 입을 틀어막으며 옆집을 향해 귀를 기울였으나 다행히 아직 깨지 않은 듯해 숨을 천천히 내쉬며 저 멀리 내던져진 베개 커버를 들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빨면... 빨리겠지...
일말의 희망을 갖고 힘차게 물을 틀어 베개 커버를 적신 후 비누를 손에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건 메이크업이니까... 폼클렌징으로 하면 더 잘 씻길지도 몰라.
평소라면 비싸다고 콩알만큼 짜서 시장에서 산 오천 원짜리 클렌징 폼이랑 섞어 썼을 내 소중한 이만 오천 원짜리 딥 클렌징 퍼펙트 어쩌고를 들어 손바닥 위에 가득 짰다.
내 이만 오천 원! 내! 이만! 오천! 원!
가격을 생각하면 차마 쉽게 이걸 저 빨간 나부랭이에 묻힐 수가 없어 하얀 폼을 손바닥에 한가득 올린 채 허공에서 손만 이리저리 헤맸다.
이렇게 시간을 끌어봤자 지금 당장은 이거 말고는 어떤 방법이 없기에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물에 젖어 좀 무서운 검붉은 색으로 변한 베개 커버를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물고 눈까지 감은 후에 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며 베개 커버 위에 손바닥을 뭉갰다.
내 손바닥이 망할 천 쪼가리에 닿는 걸 느끼며 눈을 천천히 뜨고 손바닥을 뗐다.
대놓고 하얗게 묻어버린 폼을 보며 잠시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 미련 가득한 몸짓으로 커버를 빨기 시작했다.
오, 된다. 된다. 아싸 된다. 진짜 된다. 오... 오.....
사실 이 정도는 전혀 기대를 안 했는데 생각보다 잘 지워져서 당황했다.
물 위에 둥둥 뜨는 내 어제 화장의 흔적들에 헛웃음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나올 필요는 없는데.
역시 비싼 건 뭔가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열심히 빡빡 문댔다.
그 결과, 아무리 가까이서 봐도 보이지 않는 화장 자국에 뿌듯함의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을 나섰고
"근데... 어디서 말리지."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건.
우리 집엔 아직 세탁기가 없어 탈수도 안 되고, 건조대도 없다. 물론 집 밖에 있긴 하지만...
잊지 말기를. 지금은 겨울이라는 거.
분명 지금 저 밖에서 덜렁거리는 건조대에 이 커버를 널었다간... 한 동영상에서 본 것처럼 꽁꽁 얼어서 아예 커버가 깨질지도 모른다.
그럼... 방법은...
온 집안에 위잉 거리는 기계 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정말.
내가 택한 방법은 선풍기와 헤어 드라이기였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붙박이장 구석에 쓸쓸히 남겨져있던 선풍기를 발견한 나는 커버 한 쪽에는 선풍기를, 다른 쪽에는 드라이기를 틀어 어떻게든 말리는 중이다.
선풍기가 오래된 건지 탈탈거리고 자꾸 툭툭 소리가 나는 게 좀 미심쩍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뭔가 모르게 무섭기도 하지만... 괜찮겠지.
팔이 빠질 것 같다. 한 2시간 째 이러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좀 마르긴 했다. 한... 2시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
인생이라는 게... 다 이런 거지 뭐...
"와 대박."
원래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을 때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다. 누가 베개 커버 말리기 상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한 3시간 정도 저리다 못해 아파지는 팔을 부여잡고 열심히 말린 결과, 망할 천 쪼가리는 어제의 선명한 빨간색으로 돌아왔다.
선명하니까 생각나네. 내가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필적 확인 문구가 햇빛이 선명하게 나뭇잎을 핥고 있었다, 였는데.
뭐야, 나 뭔데 지금 성인이지. 나 뭔데 20살이야?
갑자기 느껴지는 20살의 충격에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걸 느끼며 다 말라 뽀송뽀송해진 배게커버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 방 한구석에 애처롭게 나뒹구는 배게 솜을 집어 들었다.
커버까지 다 입히고 보니 정말 어제와 별다를 게 없어 보여 슬슬 입꼬리가 올라왔다.
아까 빠졌던 기분이 다시 흡수된 기분이다. 와, 진짜 뿌듯. 대학교 입학한 것보다 더 뿌듯.
그렇게 미친 것처럼 실실 웃으며 베개를 쓰다듬고 있는데 옆집에서 이상한 노래가 울려 퍼진다.
어, 일어났나 보네.
베개를 돌려주려고 뒤를 돌았다가 이불도 정전국씨 거라는 걸 깨닫고 이불까지 깔끔하게 갰다.
이불 위에 베개를 턱 올려놓고 자랑스럽게 창문을 활짝 열어 옆집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정전국씨."
"예."
"잘 썼어요."
누가 봐도 금방 일어난 듯 머리에 커다란 까치집을 지은 채 창문을 여는 정전국씨의 품에 이불을 안겨주었다.
두 팔 가득 들어오는 두둑한 솜뭉치를 잠시 내려다보던 정전국씨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고
"혹시..."
혹시? 설마... 내가 베개 커버에 화장 묻혀서 내 눈물과 맞바꾼 이만 오천 원짜리 클렌징 폼으로 빨고 3시간 동안 선풍기랑 드라이기로 말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돌려준 걸 눈치챈 건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정전국씨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진짜 어디 뜯어먹은 건 아니죠?"
이불을 펼쳐 이리저리 흔들어보며 말하는 그의 말에 숨을 크게 내쉬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모르는구나.
"안 뜯어먹었어요."
"침은요?"
"안 흘렸어요."
"진짜죠?"
"네."
"정말로?"
"네."
"진심으로?"
"아 진짜!"
이 인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이불에는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그럼 베개에는요?"
"예?"
헐. 망했다. 대놓고 당황한 티를 팍팍 내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니야. 당당하게. 아닌 척. 아닌 척.
"아, 안 했어요."
아, 망했어요.
"진짜로요?"
"ㅇ, 예."
"말은 왜 더듬어요?"
"오, 오늘의 커, 컨셉이에요."
아, 진짜 망했어요.
내 말에 정전국씨는 큰 소리로 한참을 웃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곤
"그, 그냥 가져요. 어, 어차피 저는 베, 베개 아, 안 쓰니까."
내 말투를 얄밉게도 따라 하며 우리 집으로 빨간색의 베개를 홱 던져버렸다.
"예?"
"가지라고요. 나름의 집들이 선물."
정전국씨는 손으로 딱 소리를 내며 내게 윙크를 하곤 창문을 닫았고
"..... 말도 안 돼."
나는 내 발 밑에 떨어진 빨간 베개를 보며 다시금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아니, 이럴 거면... 내 딥 클렌... 뭔... 퍼펙트 나부랭이 폼클렌징은 왜 그렇게 많이 쓴 거야? 어?
"말도 안 돼!"
나는 머리를 쥐어싸매고 주저앉아 현실을 부정했으나 바로 앞에서 풍겨오는 폼클렌징향에 베개 위에 손을 얹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김석진 아버지, 저에게 이만 오천 원을 내려주시옵고 하루라도 빨리 제가 살 새로운 집을 구해주시옵고 제게 윙크한 정전국씨의 눈에 다래끼를 내려주시옵고 제 근육통과 함께 저 인간의 주둥이를 없애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진-멘.
정국에 뷔온대 사담
요즘 제 브금 선정 기준은 신나느냐, 입니다. 겁나 신나요
오랜만입니다. 반가워요.
저 방학했어요. 이틀...ㅋ
월요일부터 학교 갑니다.
그건 그렇고 저 필적 확인 문구 기억하는 분 계시려나.
저 문구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되게 재밌었거든요.
그럼 다음 편에서 봅시다.
p.s. - 아직 암호닉 안 받아요.
p.s.2 - 정전국 아닙니다. 전정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