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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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예랑
"어으, 춥다!!"
난방도 제대로 안 되서 방 안에 있는데도 입김이 보인다. 공허함을 없애려 크게 소리질러 보지만 생기는 건 시끄럽다고 뭐라하는 옆방사람의 잔소리. 아, 내 인생 이러진 않앗는데.
내 나이 23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면 지금쯤 대학교를 다니고 있겠지만 그렇진 않다. 나는 전업작가다. 어렸을 때 부터 글 쓰는 게 좋았고,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다. 그 땐 작가가 되면, 내 앞엔 꽃길만 있을 줄 알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 없었다. 곧 그 환상, 망상이 깨졌고. 출발은 꽤 괜찮았다. 신인 작가가 낸 책 치고 인기도 꽤 있었고 비평가들의 반응도 꽤나 좋았다. 뿌듯했고, 처음으로 엄마에게 칭찬을 들었다. 앞길이 풀리지 않기 시작한 것은 세번째 책을 내고 난 후다. 간지러운 연애소설같은 것은 연애경험이 없어 쓰기 힘들었다. …그래, 나 모태솔로다!!! 그렇다고 또 과학소설을 쓰기엔 과학지식이 부족했고 수필을 쓰기엔 경험이 적었다. 결국 세번째 책을 쓴 후 나는 아무런 글도 적지 못 하고 있다. 남은 것은 날 바라보는 가족들의 기대, 책임감, 부담감.
노트북을 두드려 보아도 머릿속은 온통 백지였다.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고, 또 소재가 떠올랐다 하더라고 이끌어 나갈 뒷심이 부족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참 느리게도.
글을 끝까지 적을 수 있게 만드는 소재는 일상에서 찾은 소재라고 했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기억나 무작정 집을 나섰다. 모두 바삐 지나가는 와중에 나만 혼자 멈춰있는 것 같아 우울함이 밀려들어왔다. 가만히 서있는 나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사과받을 틈도 없이 사라졌다. 결국 이 곳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곳에서 조차 나는 혼자였다.
길도 모르는 곳을 무작정 직진만 했을까. 허리를 쭈구린 채 물건을 파시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괜스래 지방에 계셔서 자주 못 보는 할머니가 떠올라 다가갔다. 할머니가 파시는 물건은 마늘,떡같은 음식도 아니고 잡화도 아니었다. 쌩둥맞게도, 할머니가 늘여놓으신 것은 씨디였다.
"할머니, 이게 뭐에요?"
"응? 내가 지금 내 놓은 거? 이건 안 파는 거여."
"그럼 안 팔면서 왜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으세요? 날도 추운데."
"글쎄, 내가 여기 왜 있을까…."
혹시 치매가 있으신 분인가 싶어 팔이나 목에 전화번호를 써놓은 팔찌가 있을까 싶어 곁눈질로 찾아보아도 아무 것도 없었다. 이 할머니, 무언가 이상하다.
"할머니, 안 파시는 거면 저 가볼께요.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세요."
"응? 가지말고 나랑 조금 더 있어. 나 심심햐."
"음…, 뭐하고 놀까요?"
어차피 집에 돌아가도 할 일도 없는 터라 할머니랑 얘기나 좀 나눌까 싶어 자세를 바꿔 할머니 앞에 쭈구려 앉았다. 그런 나를 보던 할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인자하던 눈빛에서 모든 것을 통찰하는 듯 한 눈빛으로.
"이름, 이름이 무에야."
"네? 아, 000이요."
"집에 컴퓨터 있지?"
"느리긴 하지만 작동은 되요."
"느린 것은 상관없어. 이 씨디 나한텐 소중한 건데 꼭 필요해 보여서 주는 겨. 집에 들어가면 컴퓨터에 넣어서 작동시켜. 알았남?"
당황한 내 낌새를 알아차린 것인지 할머니가 씨디를 손에 챙겨주더니 내게 당부한다.
"꼭, 꼭 해야혀. 지금 집에 들어가면 하겠다고 나랑 약속혀."
"네, 알았어요 할머니."
"그럼 됬어."
-
당황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할머니말대로 워낙 느려서 잘 쓰지도 않던 고물 컴퓨터를 키곤 씨디를 넣었다. 번쩍, 했던 거 같기도 하고. …그 뒤론 잘 기억이 안 난다.
"…봐, 눈을 떠!"
"으음…."
"야! 눈을 뜨란 말이야!"
눈을 부비적 거리며 뜬 나에게 처음 보인 건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너무 가까워서 순간적으로 놀라 얼굴을 밀었더니 씩씩대는 남자다.
"야! 그렇게 밀면 어떡해!"
"…누구시죠?"
"아, 할망구가 내 소개도 안 해주고 이 씨디를 줬어?"
"…?"
"큼,크흠! 내 이름은 홉. 이 게임의 도우미같은 존재야. 나 무지무지 중요한 존재니까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걸?"
멍했다.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아님 내 환상이 만들어 낸 공간?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야."
"…그럼 이 곳은 뭐에요?"
"할망구가 정말 하나도 설명해주지 않고 줬구나."
"전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씨디를 컴퓨터에 넣었는데 막 빛이 번쩍했고, 그 뒤론 기억이 없어요."
"넌 게임에 접속한거야!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이 게임은 엔딩을 볼 때까진 나갈 수 없어."
"예?"
"그러니까 나한테 잘 보이라구!"
"ㄴ,네!"
음, 정신을 차리는 나를 보던 홉(이름이 어색하다. 진짜 게임 캐릭터 이름 같잖아)이 웃더니 게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게임 안에는 6명의 주인공이 등장해. 너는 그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할 수 있어. 한 명만 집중공략하는 것도 방법이지! 근데 그렇게는 안 될거야."
"왜요?"
"내가 엄청 꼬아놓을 거거든. 오랜만의 접속자란 말이야! 나 그동안 심심했어."
이 남자때문에 게임이 힘들어 질 거 같단 생각이 곧바로 들었다. 나올 수는 있으려나…, 하하.
"캐릭터들을 설명해줄게! 잘 들어 놓는 게 좋을거야"
"첫번째, 난이도 1. 이름은 전정국이야. 게임 속에서 너랑 어렸을 때 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지. 얜 이미 니가 첫사랑이라서 뭐 안해도 알아서 꼬셔질 거야. 그니까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얘가 너한테 루비를 주는 순간 넌 얘를 공략 성공하게 된거야."
근데, 나오는 캐릭터들이 다…
"두번째, 난이도 1. 이름은 박지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황자님이라 니가 조금만 꼬셔도 잘 넘어올걸. 꼬시는 건 너 알아서 하고. 얘는 꽃모양 보석이 달린 반지를 주게 되면 공략 성공. 그게 얘 어머니가 부인 되는 사람한테 주라고 준 거거든."
하나같이…
"세번째, 난이도 2. 이름은 민윤기. 좀 까칠하긴 한데 너한텐 안 그러니까 상관없고. 참 얘는 황제야. 너랑 어렸을 때부터 친오빠처럼 살았던 사이. 얘는 목걸이를 주면 공략 완료."
내 취향이잖아!!! 잘 생겼어!!!!!
"네번째, 난이도 2. 이름은 민남준. 민윤기랑 배다른 형제야. 어렸을 때부터 후궁의 아들이라 자기 형한테 뺏긴 게 많아. 니가 그런 걸 잘 노려보면 공략 쉽겠지. 얘는 증표가 없어. 니 알아서 해."
왠지 이 홉이란 사람 별로 하는 게 없을 거 같단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너 지금 나한테 짜증난다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는 거야?"
"아니요."
별 수 있나, 을이 굽신거려야지 뭐.
"다섯번째, 난이도 3. 이름은 김태형. 이런 말 하면 안되는데, 얘 좀 또라이같애."
"저보고 또라이를 꼬시라는 거에요?"
"응."
어이없어 하는 나를 보며 진짜 얄밉게 웃는 홉이다. 한참을 끅끅대며 웃더니 설명을 잇기 시작한다.
"괜찮아, 상관없어. 게임안에 들어가면 넌 완전 여신이 될 거고 얜 너한테 반할 거거든. 문제는 반한 후지. 집착이 쩔어서 떨쳐내고 딴 애 만나려먼 고생할거야. 아, 증표는 단도."
"……"
"그런 표정 짓지마. 다가오던 남자들도 다시 다 달아나겠다."
"예"
"여섯번째, 난이도 4. 김석진. 니 호위무사야. 실은 얘가 젤 공략하기 힘들어. 너 어렸을 때부터 봐온 사람이라 널 좋아하기도 하고, 또 너도 게임이 시작되면 얘한테 먼저 빠져들텐데 얘한텐 좀 복잡한 사정이 있거든."
"그게 뭔데요?"
"알려주면 재미없어. 너 알아서 해."
"……."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얘기 안 해줬다."
"뭔데요?"
"너 거기서 황녀야. 그것도 외동딸!"
"…좋은거에요?"
"음, 할 게 많을 거야! 그만큼 게임이 재밌단 소리지! 되게 잘 만들어진거라서 진짜같을 걸. 아픔도 느끼고 모두 다 느낄 수 있어."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안 좋을 거 같은데….
"니가 아픈 일이 없게 만들면 되잖아."
"…제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는 거에요?"
"응. 당연하지. 난 불가능한 게 없거든."
이젠 생각도 맘대로 못 하겠다. 이 생각도 또 읽을 수 있겠지? 말같지도 않은 상황에 적응되는 내가 신기했다.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깨어나곤 아무 것도 변해 있지 않은, 그 세상이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있던 나를 홉이 왠일로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더니 불현듯 뭐가 생각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재촉했다.
"야, 시간없어. 이제 슬슬 게임에 들어가야해. 물을 거 있으면 입으로 말고 마음속으로 홉을 세번 말해. 입으로 하면 너 미친년 될 수도 있어 알겠지? 근데 왠만하면 부르지 말고. 이제 나 간다. 자 심호흡하고, 후으 이렇게."
후으, 눈을 감곤 홉의 말대로 길게 심호흡했다. 눈을 뜨니까 날 둘러싸고 있는 배경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홉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아, 미안 가장 중요한 걸 안 알려줬네! 모든 캐릭터들이 공략하기는 쉬울 거야. 근데 니가 누굴 택하느냐에 따라서 엔딩이 달라져. 그러니까 공략하는 것보단 누굴 선택하느냐에 집중해야해, 알았지?"
"잠시만요, 이제 우리 다시 못 보는 거에요? 왜 희미해져요?"
당황해하는 내 말을 듣고 홉은 푸흐흐, 옅게 웃더니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언제든 날 불러. 그럼 네 눈앞에 나타나 있을 거야.'
-
주위의 인영이 모두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는 가구들이 하나씩 자리하기 시작했으며, 내 옷도 일상복이 아니라 한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잠깐만, 한복? 홉이 시대가 옛날이라고는 말 안해줬는데? 그래서 황녀라고 했던 건가? 망할, 다음 번에 홉을 보게 된다면 게임 도우미고 뭐고 일단 한 대 갈겨야 겠다.
어지러워져 눈을 감았다. 바람이 스치는 것 같은 기분에 추워 몸을 떨었다. 공기의 흐름이 멈추기 시작했고, 눈을 떴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시녀들이었다.
"황녀님, 황녀님이 깨어나셨다!!"
나, 여기서 잘 할 수 있을까.
사담 |
허허허.. 면목없습니다 독자님들 죄송해요ㅠㅠ 어 암호닉은 새로 받으려고 합니다. 암호닉분들껜 텍파가 갈 ㅇ..예정 내용이 전체적으로 조금씩 수정될 거 같네요 개강했는데 너무 힘들어요 끄악 내 방학 돌리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