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성이름 씨."
어느새 주문을 마친 정전국 씨는 전화를 끊자마자 나를 불렀고
"왜요?"
"근데 그쪽은 영업 부장 씩이나 되는 사람을 만나러 가놓고 밥도 안 얻어먹고 왔습니까?"
나는 마치 그럴 리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하는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버렸다.
분명 나는 불과 몇 시간 전 배가 터질 만큼 많이 먹은 게 분명했지만 방금 시킨 저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을 만큼의 배는 남아있었다.
이걸 먹었다고 해... 말았다고 해?
"아, 설마... 되지도 않는 내숭 떨고 막 그랬던 건 아니죠?"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치 날 징그러운 벌레 보듯하는 그의 모습에 내 눈앞에 보이는 쿠션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건 비밀.
그래도 그럴싸한 변명 거리를 만들어준 덕에 내 잔머리는 풀가동하기 시작했고
"다, 당연하죠! 내가 거기까지 가서도 그쪽한테 하는 것처럼 할 줄 알아요?"
내 말에 정전국 씨는 얼굴에 주름을 잔뜩 만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영업 부장님은 하필이면 그쪽을 만나서... 그분 눈은 괜찮으시대요?"
정전국 씨는 앞으로 안 괜찮을 예정이에요.
"이봐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천생 여자에요."
"영원히 먹지 말아요."
"저기요. 정전국 씨."
"왜요. 성이름 씨."
와,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네.
"좀 져 줄 생각은 없어요?"
"제가 승부욕이 좀 강해서."
"예... 그쪽이 이긴 거로 합시다."
난 못 이기겠다. 나는 안 되겠어. 수련이 부족해.
진짜 기쁜 건지 활짝 웃으며 이겼다고 좋아하는 정전국 씨를 보자니 불과 한 달 전 봤던 5살짜리 사촌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형아... 잘 크고 있니?
그렇게 주먹을 쥔 손을 연신 허우적대며 기뻐하던 정전국 씨는 구석에 엎어져 있던 토끼 인형을 집어 들었다.
"제가 살면서 하늘에 기도해본 게 딱 두 가지 있거든요."
아니, 갑자기 웬 기도.
뜬금없는 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갑자기 무슨 얘기냐고 묻자 정전국 씨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토끼 인형의 귀를 쓰다듬었다.
"한 번은 중학교 졸업하던 날 밤에 여기 옥상에서 달님한테 커서 꼭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한 거고. 한 번은..."
정전국 씨는 토끼 인형을 쓰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한 번은요?"
"한 번은..."
아니 이게 뭐라고 궁금하냐.
뭔가 옛날 옛적 작은 마을에 온 이야기꾼이 결말 얘기해주기 직전에 일부러 돈 벌려고 질질 끄는 것 같은 느낌인데.
"..... 궁금해요?"
아.
이 사람이 진짜. 맥 풀리게 하네?
긴장이 풀리듯 몸이 툭 풀어지며 손에 집히는 쿠션을 그에게 냅다 내던졌다.
"뭐예요, 그게!"
정전국 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가 던진 쿠션을 손쉽게 잡아 내려놓고는 낄낄대며 웃어댔다.
뭐야... 나 좀 무서우려고 해...
그렇게 한참을 웃던 정전국 씨는 갑자기 정색을 하며 몸을 내 쪽으로 기댔고 나는 적응 안 되는 그 모습에 덩달아 집중하며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
"궁금하면..."
"궁금하면?"
"..... 오백 원."
아.
제발.
"그게 언제 적 개그에요!"
진짜 참다못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손에 있는 토끼 인형을 빼앗아 되는 대로 그의 등짝에 내리꽂았고 정전국 씨는 그게 그리도 재밌었는지 박수까지 쳐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여기서 저 말에 웃으신 분? 있긴 있어?
"아까 성이름씨 표정 진짜 웃겼던 거 알아요? 막 혼자 진지해가지고."
겨우 웃음을 멈춘 정전국 씨가 너무 웃어서 당긴다는 배를 부여잡으며 남은 웃음의 여운을 즐겼고 나는 그에게 속았다는 기분에 씩씩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허탈해서 화낼 힘도 없다.
"그래서 그 하나가 대체 뭔데요?"
내 말에 정전국 씨는 토끼 인형을 다시 구석에 대충 밀어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고
"그렇게 궁금하면 나중에 말해줄게요."
그의 말 덕에 내 궁금증은 하늘로 치솟았지만
"어? 이건 뭐예요?"
멍하니 정면을 보다 텔레비전 옆에 놓인 정체불명의 하얀 노트를 발견함과 동시에 내 궁금증은 그대로 사라졌다.
내가 겨우 몸을 일으켜 그 노트를 잡자 정전국 씨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느낌이 되게... 옛날에 문방구에서 팔던 오백 원짜리 미니 노트 느낌인데.
노트를 앞뒤로 살펴보며 다시 소파 위에 앉아 노트를 펼치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정전국 씨... 이런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
"왜요? 뭔데요?"
"보면 후회할 텐데. 제가 알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자기도 진짜 모르는지 내 옆으로 걸어온 정전국씨는 내 말이 끝나자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아, 알면 안 된다고요?"
"네. 진짜 엄청난 건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전국 씨는 내 말에 아까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봤고 나는 그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왕년에 인소 좀 보셨나 봐요?"
"... 에?"
내 손짓에 비련의 여주인공이 쓰러지듯 주저앉은 정전국 씨는 맹한 표정으로 하얀 노트를 쳐다봤고 나는 당당히 안에 써진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반휘혈은 완전 쎈 반투명 드래곤 이어따. 아무도 반투명 드래곤을 이길 수는 없어따. 왜냐면 반투명 드래곤은 세계 서열 0위였기 때무니다. 근데 반휘혈의 여자친구..."
노트의 내용을 실실 웃으며 읽던 내가 한 단락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에서 빠져나간 노트에 위를 올려다보자 부끄러움으로 귀까지 빨개진 정전국 씨가 보였고
"아 씨..."
혼자 입술을 꾹 깨물고 노트를 넘겨보던 정전국 씨는 머리를 싸매며 비명 소리를 내더니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나를 보다가 창문 쪽으로 걸어가 여전히 물로 가득 찬 내 방 안에 노트를 던져 넣었다.
"아니 그걸 왜 거기다 넣어요!"
더 읽고 싶었던 나는 아쉬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뭐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걸!"
정전국 씨는 민망함에 온몸을 배배 꼬며 몸서리치다 배를 싸매며 웃고 있는 내게 걸어왔다.
"웃겨요? 저게?"
나는 아까의 복수를 한 기분에 더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전국 씨는 안절부절못하다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며 말했다.
"잊어버려요, 저거! 성이름 씨는 못 본 거예요. 아무것도!"
"그걸 어떻게 잊..."
아직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앞을 보자 다시 하얗게 돌아온 얼굴의 정전국 씨가 보였고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가 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그의 얼굴에 놀라 웃음이 싹 가셨다.
"저... 저기... 손 좀..."
"아무것도 못 본 거예요! 알겠죠!"
참 열정적으로 내게 잊으라고 강요하는 정전국 씨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결국 내가 뒷걸음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전국 씨는 그제야 내 얼굴을 놓아주며 숨을 내쉬었다.
아까의 그 민망한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새삼 궁금한 게 생겨 틈을 엿보다 정전국 씨를 힐끔 보며 물었다.
"근데... 언제 쓴 거예요, 그거?"
글씨로 봐선 삐뚤빼뚤 제멋대로에 맞춤법도 안 맞던데. 최소 초등학생.
"몰라요. 아마 초등학교 때나 되겠죠, 뭐. 아 짜장면은 왜 이렇게 안 와!"
목을 벅벅 긁으며 괜히 짜장면한테 화를 내는 정전국 씨를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늦게 오는 짜장면 덕에 좋은 꼴 봤다고.
안 그랬으면 영원히 정전국 씨한테 놀림만 당하며 살았겠지. 이거로 그동안의 복수는 통쾌하게 끝났다. 아, 기분 좋아.
그리고 아마 이 정도 되면 중국집에서 날 도와주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막힌 타이밍에
"배달 왔습니다-"
정전국 씨가 그렇게 화내던 짜장면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