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백설공주는 점심시간마다 맨날 독사과만 드시나, 오늘도 잘도 자네.”
독사과가 아니라 빵인데요. 가끔 사과 잼 든 것도 먹긴 하는데-.
그냥 눈만 감고 있었을 뿐인데, 귓가를 파고드는 잔소리. 어쩔 수 없어 눈을 슬며시 뜨자, 바로 앞에 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들고 선 양 손이 보인다. 내 자리 바로 앞에 서있다 내가 눈을 뜨자 자리를 옮기는 영어선생님. 교과서 148페이지 펴란다. 책상서랍을 뒤적거려봐도 책이 있을 턱이 있나. 케케 묵혀둔 사물함 안에 있을 텐데, 쉬는 시간에도 책상위에 엎어져 있느라 책을 미처 가져오지 못했다. 언제부터 수업을 듣기나 했다고- 나는 그냥 공책을 하나 펼쳐놓고 마치 책인냥 행동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을의 하늘은 참 색이 곱다. 구름도 한 점 없이 마냥 높아 보이기만 한다. 내 인생도 저렇게 한 치의 티도 없이 맑기만 했으면. 앞길이 창창하진 않더라도 괜한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10대를 보낼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손가락에 폼처럼 쥐고 있던 볼펜의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질리지도 않을 생각을 한다.
나의 아버지는 그래도 한 때는 웬만큼은 하던 중소기업의 이사였다. 그 덕에 나는 어린 시절을 꽤나 풍족하게 보낼 수 있었다. 부족함이란 건, 잘 몰랐지. 아, 하나 있었다. 나한테 없던 부족함. 그건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였다. 우리 집에는 어느 집에나 다 있는 엄마가 없었다. 원체 몸이 약했던 우리 엄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출혈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셔서, 그게 원인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 잡아먹고 태어난 나란 존재를 우리 아버진 참 많이 예뻐하셨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였나. 아빠가 새엄마라며 어떤 여자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나는 행복했던 것 같은데……. 애초에 엄마라는 존재를 느껴본 적이 없으니 그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소풍갈 때 운동회 날, 아빠가 바쁘실 때면 일하던 아주머니가 살뜰히 도시락을 챙겨주었으니까. 잔잔한 호수처럼 이어지던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었던 일상에 새엄마라는 여자가 들어오면서부터 우리가족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나, 심지어 동화에서조차 자주 있는 레퍼토리 아닌가? 새엄마는 그 전처의 자식들을 예뻐하지 않는다는 거. 우리 집도 똑같았다. 어쩜 그렇게 질리지도 않는 레퍼토리인지. 새엄마는 나를 예뻐하지 않았다. 뭐,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으니까 그런 이유였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그냥 무관심하게 나를 대했기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 나도 별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처음엔 애정을 기대했지. 어리니까. 어렸으니까,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곧 그건 바보 같은 기대였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그 후로도 그 여자와는 3년을 더 살았다.
아버지의 회사는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집안에 모아두었던 돈을 회사 자금으로 끌어 써도 구멍이 메워지지 않았나보다, 아버지의 회사는 곧 부도가 났고 우리 집엔 빨간딱지가 붙게 되었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내 옷장이며 침대에까지 빨간딱지를 붙이던 그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아버지는 그 일로 회복할 수 없는 충격을 받으셨는지, 한강에서 투신하셨다. 나는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 뒤로 한 9개월이었나, 그 때부터 시작된 그 여자의 학대로 나는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그야말로 ‘가출 청소년’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나도 다 안다.
애들이 뒤에서 나보고 부르는 별명이 있다며?
뭐? 백설공주?
사내새끼보고 백설공주라니. 웃기지도 않는다고 속으로는 혀를 찼지만, 엄마가 죽고나서 계모가 들어와 괴롭힘을 당하다 숲속 난쟁이의 작은 집으로 쫓겨나는 내용까지만 보자면 나는 백설공주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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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야- 여기 머리카락 좀 쓸어줄래?”
“네- 가요-”
손님의 머리카락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는 재효형의 손놀림은 언제보아도 신기하다. 나는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다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러 간다. 힐끔 나를 쳐다보곤 재효형이 물었다. ‘오늘 또 밥 안 먹었구나?’ 다시 손님의 머리칼로 시선은 고정. 그렇지만 표정이 좋지 못한걸 보니, 이 사람 좋은 형은 또 나를 걱정하는구나.
“그냥 밥 안 먹는다고 해버렸어요. 빵이랑 우유 사먹는 편이 좀 더 편하고.”
“맨날 빵하고 우유만 먹다간 영양실조 걸린다?”
“괜찮아요. 집에서 그래도 가끔 이것저것 해먹어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재효형의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니가 요리도 해?’ 나는 바닥을 쓸다말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라면.’ 그 소리에 혀를 쯧쯧 찬 형은 손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말했다. ‘손님, 샴푸해드릴게요.’
“그러니까 형 집에 놀러와. 배고프면 전화도 좀 하구.”
“집에 비 들어차면 피난 갈게요. 아마 내년 여름쯤?”
손님들이 없어 한산해진 가게 안은 이제 마감준비 중. 재효형은, 내가 집을 나온 지 5일째였나. 말끔했던 옷이 거지꼴로 변해갈 때 쯤 나를 구제해준 사람이다. 춥고 배고프고, 근데 가진 돈은 없고. 친구 집에서 하루 이틀 신세지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보도블럭에 앉아있다 잠깐 잠이 든 순간 차에 치일 뻔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를 구해준 사람이 재효형이다. 지금은 차근차근 헤어디자이너로써의 길을 밟아가며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중이고, 고맙게도 나를 알바생으로 써주고 있다. 형은 혼자 살고 있는 내가 걱정이 되는지 종종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한다. 근데 난 생각보다 잡초 같아서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되는데. 때론 형의 걱정에 미안한 맘이 들기도 해.
“그럼 알바비를 올려주면 되잖아요-”
“우지호! 하여간.”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재효형. 나는 혀를 쏙 내밀고선 그저 웃었다. 형의 하얀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염색이나 파마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머리카락이 마치 비단결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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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계세요-”
집에 가는 길, 목이 탄 나는 편의점에 들러서 콜라를 하나 샀다. 계산을 하고 편의점 문 앞을 지나려는데 뭔가가 발에 걸리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싸 보이는 지갑이 하나 떨어져있다. 어, 누가 흘리고 그냥 간 모양인데. 지갑을 주워들어 안을 열어보니 이미 지갑의 내용물은 다 털렸는지 지폐로 보이는 종이쪼가리라곤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고, 주민등록증 하나 그리고 웬 카드들이. 뭐야, 민증 보니까 나이도 나랑 동갑이구만 무슨 카드가 이렇게나. 그런 생각을 하다 괜히 불쌍해져 혀를 쯧쯧 찼다. 그러게, 뒷주머니 간수를 잘 했어야지. 원래 내가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지갑 주인이 불쌍해져서 찾아주기로 했다. 요즘은 지갑만 다시 찾아줘도 감지덕지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보니까 좀 비싸 보이는 지갑 같은데. 싸구려 쓰는 나랑은 비교되네. 쳇.
집과는 반대방향이라 좀 걸어야하는 거리였지만 경찰서까지 일부러 돌아가 지갑을 주웠다며 맡기고 왔다. 내 신원도 확인을 해야 한다고 신상정보를 적어두고 오긴 했는데, 어쩐지 귀찮아지지 않을까 괜히 걱정이 된다. 경찰아저씨는 사례를 할 수도 있는 거고 본인이 훔친 것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내가 원래 남의 일에 이렇게 간섭 안하는 성격인데.
“학생, 좋은 일 한 거야. 주인이 지갑 찾으러 오면 잘 말해놓을게.”
“아, 네. 안녕히 계세요-”
요즘 세상에 잃어버린 지갑 찾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며 아주 착한 학생이라고, 인상이 선하던 경찰아저씨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치만, 지갑 안에 돈이 하나도 없었는걸. 안에 현금이 빽빽하게 꽂혀있었으면 내안의 악마가 속삭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근데 지갑 주인 민증을 힐끔 봤는데, 이름이 좀 특이하더라? 표씨가 세상에 흔한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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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씨의 지갑엔 얼마가 들어있을까요?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