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보니 조금 늦은 낮. 밥도 있었지만 반찬 차리기도 귀찮고- 그냥 빵이나 먹어야겠다.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어 타이머를 맞추고 그 사이에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기분.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상쾌한 기분으로 식빵을 입에 물고 방에 들어왔는데 방에 울리는 벨소리.
“여브세여?”
“어, 이거 김형태 번호 맞아요?”
“..븜즌슨배?”
“형태 맞구나! 근데 발음이 왜 그래..크흐흫”
“아..즘시만여..”
서둘러 입에 문 식빵을 접시에 내려놓고 손에 약간씩 묻어나는 기름기를 휴지에 북북 비벼댄 뒤에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 별건 아닌데..어제 궁금하다고 한 거 오늘 알려주려고. 만날래?”
궁금하다고 한 거..? 설마 누굴 좋아하냐는 그거 말하는건가..
알고싶다. 범준선배가 매일 그 시선으로 쫓는 사람이 누군지. 매일 그 귀에 목소리를 담는 사람이 누군지.
“네. 만나요.”
간략하게 범준선배가 있는 곳을 들은 뒤 허겁지겁 식빵을 해치우고 혹시 입냄새가 날까 가글도 했다.
왜인지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범준선배가 있는 곳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의외로 보자고 한 곳은 아기자기한 카페. 뭐,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하기에는 딱인가.
“범준 선배..?”
“아. 왔어?”
꽤 오래있었는지 벌써 옆에 컵이 두 잔이나 쌓여있다. 그것도 죄다 핫초코로.
달콤한 거 좋아하나..흐음. 혼자 이리저리 추리를 해가며 범준 선배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핫초코. 먹을래?”
아직 반 쯤 남아있는 핫초코를 내게 내미는 범준선배. 아 딱 봐도 되게 달아보인다. 여기까지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
“에..아뇨. 전 초코 별로 안 좋아해서..”
“아, 그래? 내 주변 사람들은 거의 좋아하길래..그럼 뭐 다른 거 시켜줄까?”
“그럼 전 그냥 아메리카노..”
“에엑. 그 밍숭맹숭한게 맛있어?”
“뭐..그럭저럭 먹을만은 하던데요.”
“그런가..그럼 주문하고 올게!”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쫄래쫄래 카운터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뭔가 귀엽다고 해야될까...
아..?귀여워? 귀엽다고? 아니 뭐야. 내가 왜 여자도 아닌 장범준같은 게이한테 이런..!
“형태야?”
“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아, 아니에요!”
“뭐..그럼 이거 받아.”
범준선배가 들고 온 두개의 컵 중에 하나를 나에게 건넨다. 하나는 뭐지? 설마 또 핫초코인가..
“그거, 또 핫초코에요?”
“아-니. 너랑 같은 아메리카노.”
“맛없어서 안 먹는다면서요..”
“한 번 도전해보려고. 니가 먹는다는 거 들어보니 별거 아닌 것 같아서..”
“음..뭐 그러시던가요.”
자리에 앉아 커피잔을 입에대고 홀짝거리는 범준선배. 곧 인상을 찌푸리더니 으으 맛없어! 하고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어..에비-”
“뭐..괜찮은데..”
하긴, 별로 맛이 없긴 해. 범준선배는 내 앞에 놓여있는 핫초코 잔을 다시 가져가 홀짝인다.
입 안으로 단 게 들어와서 그제서야 살겠다는 듯 다시 인상을 핀다. 와, 진짜 애 입맛이구나.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살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도 돈 주고 시킨건데..너 먹어랑 두 번 먹어랑.”
“에, 저도 두 잔씩은 좀..”
“버리기는 아깝잖아. 처치곤란이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 말해주신다고 했던 거 해주셔야죠.”
“아아- 좋아하는 사람? 뭐가 그렇게 급해. 난 겸사겸사 데이트도 하려고 했는데-”
데이트라니.. 설마 그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거나..
아, 하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고 내 이미지가 분명 범준선배에게 좋게 박히지도 않았을텐데..그럴리가 없지.
범준선배를 보고있으면 오해가 될 수 있는 말을 아무렇게나 툭툭 내뱉는 것 같다.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여자애들도 꽤 되던데. 하필이면 나도 착각할 뻔했네.
“전 딱히 데이트하러 나온 게 아닌데요.”
“그러니까 겸사겸사지! 그리고 카페에서 서로 마주보면서 대화나누는 게 데이트지 뭐야.”
테이블에 턱을 괴고 씨익, 웃음 짓는 모습이 나를 설레게 만들어.
아닐거란 생각은 들지만, 반면 범준선배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였으면..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아무래도 내가 범준선배를 좋아하기 때문이겠지.. 아 22년 인생 딱히 큰 장애물도 없이 순탄히만 살아왔었는데.
지금까지 와서 난데없이 장범준이라는 난관이라니.
“선배..설마 좋아하는 사람이 저는 아니죠?”
“..흠, 글쎄- 왜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무슨 말을 저렇게 아리송하게 하는거야. 그냥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해주면 되지. 괜히 초조하게.
범준선배는 이런 반응을 즐기는걸까. 저 능글능글한 웃음. 꼬집어주고 싶다.
“저도 글쎄에요.”
“흐흫..너는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아..”
아니구나, 아니었구나. 허탈한 마음도 들고, 확답을 들으니 뭔가 속시원한 마음도 들고. 완벽한 짝사랑이었네.
그래도 질질 끌지 않아서 다행이야. 빨리 지워버리면 될거야, 이런 호감 정도야..
애써 외면받은 내 마음을 토닥이며 안심시켰지만 한 구석으로 씁쓸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그럼 누구에요?”
“에이, 그렇게 급하면 재미없다니까. 근데 넌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알고싶어?”
“..어, 그냥요..”
“뭐야 그냥인게 어디있어- 혹시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다거나? 흐흫..”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은근히 정곡을 찌를때가 있다. 이 사람은.
“그런 거 아닌데요.”
“아, 알았어. 아닌 거 아니까 그렇게 표정 굳히지마. 그럴 때면 은근히 무서운 거 알아?크흫..”
“선배도요.”
“응?나?”
“식당에서 광선선배 얘기할 때 그러셨잖아요. 조금 놀랐어요.”
선배는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곧 아아 그 때? 하고 활짝 웃음짓는다.
“뭐..그때야 딱히 니가 좋은 애라는 생각도 안 들었고- 니 첫인상이 좀 안 좋았거든. 나한테는”
“..첫인상이야 다들 멋대로 생각하는 거잖아요.”
“흐음, 그런가? 그래도 첫인상이 꽤 많은 걸 좌우하잖아. 면접같은 것도 그렇고..”
“그래도 전 첫인상같은걸로 이 사람이 이럴거다, 저럴거다 멋대로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흐흫..그럼 내 첫인상은 어땠었어?”
선배의 첫인상? 선배를 처음봤을때는.. 우연히 담배피고 있는 걸 봤었지.
혼자 계단 난간에 기대서 담배연기를 후- 뿜는데. 좀, 멋있었어..그 후로는 계속 그 계단에서 선배의 모습을 찾았었는데.
시간이 안 맞았는지 아예 거기서 피질 않은건지 결국 다시 보지는 못 했었지..
“안 좋았어요. 학교 안에서 담배나 빽빽 피워대고.”
“어?들켰다, 흐흫 하필이면 담배피는 걸 보냐- 아 나 그래도 학교안에서 담배핀 거 딱 한번뿐이야!”
“네, 그러시겠죠.”
“아, 진짠데!”
“알아요. 담배피는 거 그 후로 못 봤으니까.”
“오..안 그런척 하면서 은근히 나 찾았구나?”
아, 또 정곡. 미간을 찌푸리고 범준선배를 노려봤다. 그러자 아아, 장난이야. 또 정색하고 그래! 하며 웃음으로 때운다.
뭐, 아니라는 말은 안 했으니까 거짓말은 아닌거지?
“이제 슬슬 알려주세요.”
“에이, 재미없게.”
“..계속 이렇게 질질 끌다가 안 알려주실거면 저 그냥 갑니다.”
내가 가방을 들고 진짜 일어날 자세를 취하자 범준선배가 아, 알려줄게! 하면서 못 일어나게 내 어깨를 꾹 누른다.
다시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빨리 말해달라는 듯 범준선배를 빤히 바라보자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말하려는 듯 입술이 벌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
“인호야. 백인호.”
...지금 뭐라고?
-
왕 질질 끌다가 결국 2화를 완성해냈네요ㅠㅠㅠㅠㅠㅠㅠ범준찡 뉴짤이 없어서 힘듭니다...찡찡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