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15
내가 아는 권순영
"…으 추워."
도무지 녹을 생각이 없는 차가운 두 손에 안되겠다 싶어 근처 카페 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갔다. 발을 내밀자 마자 몸을 감싸고 도는 따뜻한 기운에 그저 카운터 앞에서 멍청하게 서 있었을까, 그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알바생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 카페모"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황해 그저 알바생만 쳐다보고 있었을까, 덩달아 당황한 알바생이 내 뒤에 있는 남자를 보는건지 시선이 내게서 머물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토록 무례하나 싶어 한마디라도 하려 뒤를 돌은 순간, 덩달아 핸드폰에서 눈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22살의 권순영이 서 있었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도 맞은편에서 보이는 권순영은 무덤덤하게 제가 시킨 커피잔을 만지작거릴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잘 지냈어? 그 한마디가 그렇게 무거워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말 부터 꺼내야 할까, 정말 1분이 한시간 같다는게 이런 기분이구나, 복잡한 머리속이 통 정리되지가 않았다. 근데 정말, 주책맞은 입은 복잡한 머리를 견디지 못하고 뱉지 말아야 할 말을 그만 내뱉고 말았다.
"…졸업식날 왜 안왔어?"
뭐? 되물은 녀석은 눈이 날카로웠다. 처음보는 모습이였다. 제가 뱉어놓고 당황해하는 나를 한동안 그런눈으로 응시하던 권순영이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가. 모든 사로가 정지되는 기분이였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던 권순영이 습관인양 주머니에서 하얀 담배곽과 라이터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담배 다시 피는구나."
"……"
"……"
"끊을 이유가 없어져서."
권순영의 말 끝으로 참을 수 없는 감정에 녀석과 헤어질때까지 고개를 들질 못했다. 눈을 마주하는것 조차 미안했다. 김여주, 고개 들어봐. 충혈된 눈으로 녀석을 마주 할 수가 없었다. 어느정도 진정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하였다.
"여기까진 거야."
"……"
"오랜만에 만나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
"근데 나 거짓말 한번만 할게."
"……"
"길가다가 마주하게 되도."
"……"
"3년이란 시간 속에서 나를 잊고 살았던 것처럼."
"……"
"그렇게 지나가."
너는 나를 아주 잘 아는 것 처럼 말했다. 3년이란 시간, 아니 앞으로의 시간도 난 너로 채워질 것이다.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는. 그 말이 너에게 독이 될까 22살의 난 아직도 겁을 먹고 있었다. 달라진게 없었다. 난 여전히 19살에 불과했다. 아무말도 못한체 컵만 내려다보는 나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한걸음 두걸음 걸어가기 시작했다.
"19살이나, 22살이나. 넌 달라진게 하나도 없네."
"……"
"잘 지내."
19살이나, 22살이나. 넌 달라진게 하나도 없네.
여전히 이쁘네.
여주야.
누군가 그랬다.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뒤늦게 알아버린 사랑의 소중함에 대한 설명을 해준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약이겠지.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법이랬어. 모순적인 말이였다. 3년이란 시간속에서 권순영과 난 아팠다. 난 앞으로도 아플 예정이며, 사랑할 예정이다. 시간은 약이 아니였다. 사랑은 잊을 수 없는 것이였다.
녀석이 떠나간 카페안에선 이 영화가 현실일음 알리듯 차갑게 식어버린 컵만 내 앞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권순영은 끝났다.
"머리수라도 채워줘. 제발 어?"
"싫다니까."
결국 날이 선 체 뱉어진 내 말에 언제 생글생글 웃었냐는 듯 금세 표정을 굳힌 김선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네. 이어 작게 들려오는 녀석의 말에 작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권순영을 만난 이후로 예민해진 신경에 조용조용하게 사나 싶었는데, 기어코 성질을 건드려버린 선아였다.
"야 나가기 싫다는 애 왜 자꾸 데려가려 해."
"아니 내가 뭐 지가 싫어하는 진짜 소개팅을 해달래? 가서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해줘? 야, 나 같으면 해."
"그럼 너나 실컷 해." 낮게 울려퍼진 내 말에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던 김선아가 벙찐 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떠한 감정도 없이 그 자리 앉아있는거, 상대방한테 실례야. 아무말도 못한체 나를 노려보기만 하는 그 얼굴에 옆에 있던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에게 어디가냐며 나를 황급히 말리려 드는 친구들을 애써 괜찮다며 떼어내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세 발걸음 정도 옮겼을까, 쉽게 가라 앉지 않는 감정에 눈 딱 한번 감고 뒤를 돌았다.
"…넌 쉬워서 좋겠다."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김여주. 그리고 생각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생각 할 겨를도 없이 내 머리 속은 또 다시 권순영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현관 앞에서 주저앉아 있기를 30분째. 점점 차가워지는 몸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찬 공기만 도는 집 안이 쓸쓸해 아무렇게나 켜 둔 티비도 무료함을 달래줄 순 없었다. 쇼파에 앉아 멍하니 티비옆에 자리 잡은 작은 꽃병을 바라보았다. 시 들어버린 노란수선화, 졸업식 날 녀석에게 주고 싶어 샀던 꽃이였다. …청춘을 망친 사람치고 바라는게 너무 많았다. 또 다시 밀려 들어오는 자괴감에 두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3년전 기회는 떠났다.
약하게 울리는 진동에 힘없이 고개를 들어 환하게 빛을 밝히고 있는 휴대폰을 들었다. 김수민.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았다.
- 나와, 집 앞이야.
"……"
- …할 말 있어.
기적같던 그 날도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시 한번 너가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면, 그때처럼 싸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해도 나는 너를 다시 잡을 수 있을까.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말 없이 앉아있는 나를 따라 소리를 죽이고 있는 수민이에게 입을 열었다.
"몇일 전에 여기서 순영이를 만났어."
"……"
"검정색으로 염색도 하고, 담배도 다시 피더라."
"……"
"근데 신기한게."
"……"
"…나는 그냥, 내가 아는 권순영 같았어."
"……"
"…순딩이 권순영."
"걔 달라진거 하나도 없어."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수민이가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의 말에 아무말 없이 그저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걔 너 앞에서만 그랬어."
사랑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 성격, 외모. 심지어 인생까지 바뀌는 건, 오로지 사랑만이 존재하기 할 수 있는 기적이다. 권순영은 내게 기적이였다. 권순영은, 어른이였다.
"…이번주에 애들 소개팅 하는거."
"……"
"용인대랑 하는거야."
"……"
"…너랑 뭐, 그런 일 있고 나서. 권순영 재수 했었나봐."
"……"
"너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걔 어렸을때 부터 태권도 했데."
"……"
"용인대라면"
"……"
"…이를 갈은거지."
마지막 말에 결국 고개를 떨구고야 말았다. 피 같은 사랑을 이겨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어른이 아니면 누가 하는 일 일까. 녀석의 목적은 내게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쯤 잘난 모습을 하고 진작 내 앞에 나타났겠지. 후회하지? 이런 나를 두고. 하고 나타났겠지. 하지만 녀석은 어른이였다.
"……"
너에게서 계속해서 머무는 날, 너의 앞에 서면 한 없이 작아지고 어려지는 내가 널 다시 잡을 수 있을까. 기회를 스스로 만들 수 있을까.
"…순영이가 다신 보지 말자 그랬어."
"너네가 다신 안 보고 살 것 같아?"
"……"
"니 기억 속에 있는 권순영이, 그렇게 차가운 사람이였어?"
"……"
"적어도 너 앞에선 달랐다니까."
"……"
"아직도 알려 줘야 돼, 여주야?"
…만들어야겠지, 기회.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너는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렸으니까, 이 정도는 세발의 피도 아니였다. 자신의 앞에 선 나를 아니꼽게 쳐다보던 김선아가 무슨 일이냐는듯 물었다. 왜?
"…나도 이번주에 하는 소개팅 나가도 될까."
"뭐?"
"부탁할게."
"야, 너 진짜 웃긴다."
"……"
"감정 없는거 아니였냐? 아, 실례잖아. 그 사람들한테."
"……"
"왜? 내 말이 틀렸ㄴ,"
"내 인생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이거 아니면 내가 진짜…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부탁할게."
잠이 오질 않았다. 아니 올 수가 없었다. 내일이면 너를 만난다니. 꿈 같은 기적같은 너를 만난다니. 100번 밀면 100번 밀려나면 되는 거다. 100번 두들겨도 답 없을 담장도 100번 두들기면 금이 가기 마련일 것이다. …그때 너도 이런 마음이였을까. 더 이상의 기회는 오지 않을거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너도 이 만큼이나 아팠던 걸까.
아닐꺼다. 기회를 바라는 나와는 달리 너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고,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보고 남몰래 아파하는 나와는 달리 너는 그 행복을 찾아 빠졌을 것이다. 너는, 3년 동안 행복했을 것이다. 너는 나와 달리 강했기에.
"…저기 여주씨?"
꽤나 척척 맞춰져 가는 분위기에도 자기소개 이외, 입 하나 뻥끗하지 않고, 그 시간 속에서 카페 입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소식을 들은 것 일까. 너는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너의 동기들 사이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만 한다. 기다림도 온전히 내 몫이니까.
"…근데 나머지 한 분은 도대체 언제 오시는 거에요?"
"…아, 그 친구가 어제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나올 것 같다고 연락을 해서요."
그제서야 내내 입구에 머물러있던 시선을 옮겨 입을 연 장본인을 바라보았다. 실망 하지 않았다. 허탈도 하지 않았다. 덤덤했다. 내가 아는 넌 차갑지 않은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 있겠지. 머리속은 이해를 하는데, 자꾸만. 입구가 눈에 밟혔다. 3대 4. 딱봐도 말이 안되는 게임이라 한참 대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 틈에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내 목적은 여기 있지 않으니까.
"…뭐야, 쟤 권순영 아니야? 야 권순영!"
"쟤 뭐야, 새끼야. 못 온다메."
"너 뛰어왔냐? 땀을 왜 이렇게 흘려."
"…어, 어쩌다 보니까. 일이 …일찍 끝나서."
내 목적은 권순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