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를 읽고 오시는걸 추천합니다! 전정국 찾기 06 http://inti.kr/writing/2026073
전정국 찾기 07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표현하는게 더 맞겠다. 남자의 말에 나는 그저 멍하니, 차마 두 눈을 깜빡이지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남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 내 반응에도 남자는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지던 침묵은 내가 어렵게 말을 꺼냄으로써 끝이 났다. " ...좋아했다고요? " " 네. " " 내가 당신을요? " " 난 그랬다고 생각해요. 내 앞에서 넌, " " ... " " 항상 웃었으니까. "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나는 전정국을 좋아했다. 들어서 알게된 단순한 사실뿐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마음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전정국을 좋아했다고.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숨이 턱하고 막히고 머리가 아팠다. 느껴지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니 남자가 걱정스러운 손길을 내게 내민다. 그리고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손을 밀어낸다. 내 행동에 남자는 머쓱한듯 뻗은 손을 다시 넣으며 말한다. " 무서워서 못 왔어요. 네가 정말 날 기억하지 못 하면 어쩌지, 날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면 어떡하지 무서워서. " " ... " "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되게 슬프고 속상하고 그런데, 뭐 어떡해. 내가 숙이고 들어가야지. " " ... " " 그니까 너도 조금만 노력해줘요. 나는 네가 기억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 " ... " " 작년에는 실패했지만. " 아, 복잡하던 머릿 속이 더 복잡해졌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차라리 작년에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면 했다. 전정국과 1년을 만나고 그 후에 기억을 잃어 다시 전정국과 만나기 전에 잠깐 사귀었던 사람이었으면. 근데 방금 전 남자의 말로 인해 그 가능성은 한순간에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불길하고도 슬픈 생각이 자꾸만 좁은 틈을 비집고 머릿 속으로 들어왔다. " 오늘은 이만 갈게요. 내일 다시 올게. " " ... " " 아, "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억지로 웃었다. 작은 목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남자가 멍한 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아까부터 줄곧 정신을 챙기지 못해 멍해진 나를 보며 남자가 살짝 토라진 얼굴을 했다. 멍한 내가 두 눈을 꿈뻑이니 남자가 볼멘소리를 냈다. " 그래도 나는 네가 한 말 믿었는데. " " ...네? " " 민윤기. " " ... " " 다른건 잊어도 이 세 글자는 기억할 줄 알았어. " 짤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나에게서 뒤돌아선 남자가 문을 열고 걸어나갔다. 내게 등을 보이는 밝은 머리의 뒷모습이 어딘가 조금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야속하게도 많이 본 것만 같은 그런 뒷모습.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결국 붙잡았다. 쿵. 머리가 울렸다. ' 민윤기. 내 이름이요. ' ' 와, 나 민씨 성은 처음봐요. 이름 되게 예쁘다. ' ' 좀 특이하긴하죠. ' ' 민윤기. ' ' ... ' ' 나 이 이름은 절대 안 잊어버릴거 같아요. ' " 아아... " 집으로 오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몸을 대자로 뻗고 멍하니 천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꾸만 내 머릿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들은 결코 나를 유쾌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자꾸 입술을 짓이기게 만드는 그런 생각들 때문에 내 머릿 속은 더 복잡해져갔다.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터져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뭐가, 대체 얼마나 잘못되고 있을까. 바르게 고칠 순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다는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해결책이 없으니 마음은 불안해져갔고 그런 나 자신에게 괜찮다며 쉽게 달랠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으니까. 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냥 모르는 척, 아무 것도 못 본 척하고 싶었다. 오늘 들은건 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면 전정국과 나는 아무 일도 없을거라고. 그냥 어제처럼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같이 웃을 수 있을거라고 믿고싶었다. 비겁하지만 그래도 된다고, 그렇게 합리화하려고 했다. ' 그니까 너도 조금만 노력해줘요. 나는 네가 기억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 하지만 아까 들은 민윤기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자꾸 내 귓가에 울려퍼진다. 조금만 노력해달라고. 기억할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믿는다는 표정과 말투로 말하던 민윤기의 그 모습을 나는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나는 내 마음만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 안 구석에 자리잡은 상자를 꺼냈다. 몇 번을 봐도 아직 낯선 것들이 가득한 그 상자를 다시 열었다. 무엇인가를 찾고싶다는 의지가 강해져서인지, 아니면 찾아야만한다는 그런 의무감이 생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자를 뒤지는 내 손놀림이 조금 다급해졌다. 닥치는대로 뒤졌다. 어떠한 것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찾고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상자를 뒤적거리던 내 손은 결국 작은 종이가 모아져있는 카드지갑을 찾아냈다. 아. 손에 잡힌 그것을 보자마자 멍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카드지갑 속에는 명함 크기만한 작은 쿠폰들이 차곡차곡 모아져있다. 모두 내가 일했던 카페의 쿠폰들이었다. 얼핏 봐도 제법 많아 보이는 그 쿠폰에는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 이라고 적혀있는 마지막 도장의 자리가 볼펜으로 찍찍 그어져있고 그 대신에 ' 데이트 한번 ' 이라고 고쳐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쿠폰들의 가장 윗 부분에 모조리 똑같이 적혀있는 ' 민윤기 ' 라는 글자에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는 멍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과연 내가 울 자격이나 있을까. 믿고싶지 않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그게 사실이라니까? 너 바람 핀거야. 전정국이랑 민윤기 사이에서. 자꾸만 내 머리로 비집고 들어오던 생각들이 이젠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야속하게도 그 전화의 주인공은 전정국이었다. 받고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나는 그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이 전화를 받아버리면 왠지 모든게 끝이 날 것 같았다. 전정국의 목소리를 들으면 엉엉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뻔뻔스럽게도 그에게 달려가 안겨 울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전정국에게 다 말해버리면 모든게 다 드러날거 같아서, 그러면 난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서 난 전정국의 전화를 받지 못 했다. 하지만 숨는게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나의 기억이 무서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알고싶은게 너무 많았다. 내가 알아야만 하는게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이 비극의 시작이 나라고 해도 그리고 이 비극의 끝도 여전한 비극이라고 해도 아직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민윤기로부터, 전정국으로부터 또 내 사라진 기억으로부터, 그 어느 하나로부터도 난 도망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나는 카페에 갔다. 오늘은 알바가 없는 날이었지만 나는 일찍부터 카페에 도착했다. 내일 다시 온다는 민윤기의 말을 기억하며. 그리고 정말 그 말을 지키며 그 사람이 카페에 나타났다. " 어서오세요. " " ...어? 나 기다렸어요? 알바 하는 중? " " 아니요. 저 오늘은 일 안해요. " " 아, 그렇구나. 그럼 진짜 나 기다린거네? " " 네. 묻고싶은 것도, 듣고싶은 것도 많아서요. " " ... " " 저한테 잠시만 시간 좀 내주실래요? " 민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카페의 구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 테이블 위에는 같은 커피가 두 잔 놓여져있었다. 아무래도 커피 취향이 같은 모양이었다.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우리 사이에 단 하나만이 존재했다. 침묵. 그것도 아주 무거운 침묵. 그리고 아주 어렵게 내가 먼저 그 침묵을 깨뜨렸다. " 죄송하지만 전 아시는대로 기억이 없어요. " " 응. " " 그래서 얘기를 해주셨으면 해요. " " 무슨 얘기? " " 무슨 얘기든 좋아요. 민윤기씨에 관한 얘기도 좋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듣고싶어요. " 민윤기가 ' 아- ' 하고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들어 마신 그가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름은 민윤기. 나이는 너보다 2살 많아요. 대학에서 음악 공부를 하다가 잠시 휴학중이고. " " ... " " 나는 노래를 만들어요. 작곡도 하고 작사도 하고. 수입은 나름 짭짤해요. 작업은 저 반대쪽 구석 테이블에서 자주 했어요. 아직 개인 작업실이 없어서. " " ... " " 그러다 언젠가 카페에 노래 소리를 줄여달라고 너랑 말싸움을 좀 했었어요. 사실 내가 이어폰 끼면 그만이었는데 심술 부린거지. 그냥 괜히 말 한번 걸어보고 싶었나봐. " " ... " " 서로의 첫인상은 우리 둘다 되게 별로였다고 했어요. 나는 널 당돌하다고 생각했고, 너는 날 개싸가지라고 생각했다고 했었고. " ' 개싸가지라고 생각했죠. ' ' 뭐? ' ' 왜. 맞잖아! 다같이 쓰는 카페에서 그게 무슨 진상이에요. ' ' ...나 참. ' ' 그래도 지금은 아니에요. 개싸가지. ' ' 그거 참 고-맙네요. ' " 취미가 사진찍기라서 가끔은 사진도 찍었어요, 요 앞 공원에서. " " ... " " 그러다가 거기서 너를 만났고 눈이 마주쳤고 서로 머쓱해다가 인사를 했고 같이 걸었고 얘기했어. " " ... " " 우연처럼 아니면 인연처럼 여러번. " ' ...어? ' ' ...그 카페? ' ' 이런데서 다 만나네요. 여기서 사진 찍으시나봐요. ' ' 아, 네. 사진 찍는게 취미라서. ' " 그렇게 처음 만났고 어쩌다보니 친해졌어요. " " ... " " 뭐... 더 궁금한거 있어요? " 그 물음에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냈다. 어젯밤 상자에서 찾았던 쿠폰들. 10장은 족히 되어보이는 쿠폰들. 그 쿠폰에는 도장이 빼곡히 찍혀있었다. 마지막칸을 제외한 모든 칸에. 그리고 그 쿠폰들 위에 적힌 민윤기라는 이름과 데이트 한번이라는 마지막 도장 칸에 적힌 글자. 내가 슬쩍 내민 쿠폰들을 보자 민윤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이거... 가지고 있었어? " " 네. 저도 몰랐는데, 정말 있더라고요. " " ... " " 죄송하지만 이게 뭐에요? " " ... " " 이 카페 쿠폰 같은데... 왜 여기에 민윤기라는 이름이 쓰여있고 마지막 칸은 왜 데이트 한번이라고 되어있고 또 왜, " " ... " " 이 쿠폰들이 나한테 있어요? " " ...진짜 너한테 있었구나. " 민윤기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윤기의 떨리는 음성에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민윤기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윤기가 옅게 웃었다. 슬픈 웃음. 그 어떠한 말보다도 모순적인 단어였다. 민윤기가 손을 뻗어 쿠폰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쿠폰들을 만지며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우리는 어이없는 해프닝이 몇 개 있었어. 그 중에 하나가 네가 오해했던 일이었는데, 내가 널 좋아한다고. " " 네? " " 세번째쯤 만난 날이었나, 내가 카페에서 커피를 시켰는데 너가 이걸 같이 줬어요. 위에는 내 이름을 쓰고 마지막 도장 자리에는 데이트 한번이라고 고쳐쓰고. " " ... " " 내가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까 당당하게 말하더라고. 근데 그 말이 가관이었지. " " ... " " 여기 와서 커피 10번 마셔요. 그러면서 내 얼굴 10번 더 보고. 그래서 10번이 다 되면 데이트 한번 해줄게요. 그 다음부터는 나 깨끗하게 잊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 " ' 이게 뭐에요? ' ' 보면 몰라요? 쿠폰이잖아요. ' ' 근데 왜 내 이름을 쓰고 아니 마지막에 이건 또 뭐... ' ' 여기 와서 커피 10번 마셔요. 그러면서 내 얼굴 10번 보고. 그래서 10번이 다 되면 데이트 한번 해줄게요. ' ' 어? ' '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나 깨끗하게 잊어요. ' " 처음에는 너무 어이가 없고 이게 뭔가 싶었는데 결국 나는 그 도장 10개를 다 채우겠다고 매일같이 여기에 왔었어요. 매일 커피 마시고 네 얼굴 보고 그러다가 도장이 9개가 됐는데, 그 다음 날에 찾아온 내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 안나겠죠. " " ... " " 쿠폰 잃어버렸으니까 하나만 더 줘요. 처음부터 다시 채우게. " " ... " " 그 짓을 여러번 했어요. 도장이 9개가 되면 잃어버렸다고 새로 받고 받고 또 받고. " " ... " " 10개를 다 채우면 여기 올 명분이 없어질까봐. 너를 보러와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 " ... " " 생각해보니 네 말이 옳았어요. 언젠가 정신차려보니까 정말 내가 널 좋아하고 있더라고. " ' 참 달콤하고 낭만적인 이야기네. ' 남의 얘기였다면 난 그렇게 감탄했을 것 같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그 이야기의 끝이 이렇게나 참혹한 비극이라는걸 알기에 나는 떨리는 두 손을 붙잡았다. 민윤기의 말을 들을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게 왜 기억이 나? 어떻게 떠올릴 수 있지? 전정국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게 아니었다. 나는 수도 없이 묻고 전정국은 그 질문에 수도 없이 답해주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기억하지 못 했고 떠올리지 못 했고 나와 전정국은 괜찮다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많이 아파했다. 그런데 왜, 사랑했던 전정국도 기억하지 못 하는 내가, 지금 이 남자가 하는 말들을 떠올릴 수 있는 걸까. " ...괜찮아? " " ... " " 그만할까? "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정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전정국이 아니라 민윤기였으면 어떡하지, 하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것 투성이었다. 내가 모르는 시간, 내가 모르는 기억, 내가 모르는 내 마음. 그 모든게 다 무섭게 느껴졌다. " 날 좋아했다고 했죠. " " ...응. " " 얘기를 들으니까... 조금씩 기억이 나요. 우리가 함께 있던 시간들이. " " 어? " " 내 기억대로라면, 이 기억이 사실이라면 난, 나도 민윤기씨를 좋아했던거 같아요. " 내 말에 민윤기가 웃었다. 아까의 그 슬픈 웃음보다는 조금 더 밝아진 미소였다. 그 웃는 얼굴에 차마 더 말을 잇지 못 했다. 그런데 왜 난 민윤기씨를 볼 때보다 전정국을 보고있을 때 가슴이 더 아픈걸까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마지막 말이 입 안에서 애처롭게 맴돌았다. 민윤기가 떠나고 카페에서 나왔다. 복잡한 마음과 복잡한 머리에 힘없는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다가 길을 돌렸다. 내가 새롭게 정한 목적지는 전정국이 일하는 태권도장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정말 처음이었고, 이번에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 계기인 바로 그 태권도장. 저녁시간 무렵이었기에 태권도장에는 몇몇의 아이들만이 남아있었다. 유리창 안으로 빼꼼 넘어본 도장 안에서는 아이들을 앞에 앉혀두고 전정국이 발차기 시범을 보이는 중이었다. 그 긴 다리를 쭉 뻗으며 멋지게 송판을 격파하니 아이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나도 5살 아이마냥 전정국에게 박수를 보냈다. " 집에 가서 꼭 깨끗하게 씻고! 내일 다시 만나자. " " 네! " " 우리 꼬마들, 오늘도 멋있었어. " 전정국 앞에 나란히 서서 씩씩하게 대답하는 아이들을 보며 전정국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 앞에 한명한명 하이파이브를 하고 아이들을 보낸 전정국이 뒤를 돌려할 때 내가 그 앞에 불쑥 나타났다. " 우리 정국이도 오늘 멋있었어. " 갑작스레 들려온 내 목소리에 전정국이 깜짝 놀라 홱하고 뒤돌았다. 안그래도 동그랗게 큰 눈이 내 얼굴을 마주하자 더 커졌다. ' 뭘 그렇게 놀라. ' 내가 웃으며 물으니 전정국의 놀란 얼굴이 그제야 풀어지며 나를 따라웃었다. " 언제부터 와있었어? 여기서 계속 서있었던거야? 밥은? " " 천천히. 하나씩만 물어봐. " " 말도 없이 와서 깜짝 놀랐네. " " 이런게 바로 서프라이즈지. " " 근데 나 아직 수업 다 안 끝났는데. 오늘 같이 일하는 친구 하나가 안 와서 내가 수업 들어가야해. " " 괜찮아. 내가 연락도 없이 온건데 뭐. 그냥 너 얼굴 잠깐 보고 가려고 온거야. " ' 그래도... ' 괜찮다는 내 말에도 전정국이 못내 아쉬웠는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정말 괜찮다며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할 때였다. 전정국이 불쑥 잠시만 기다리라며 도장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그를 기다리며 멀뚱히 서있으니 언제 갈아입은건지 어느새 체육복 차림이 된 전정국이 헐레벌떡 내게 뛰어왔다. " 뭐야? 아직 안 끝났다며. " " 생각해보니까 다음 수업까지 시간 좀 남았길래. 너 집에 데려다줄 시간 정도는 될 거 같아서. " " 됐어. 버스타면 금방이고 걸어서도 갈 수 있는데 뭘. 그냥 천천히 걸어가려했어. " " 안돼. 절대 안돼. 너 혼자 가는건 내가 싫어. " 내 말은 단호하게 거절한 전정국이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저 고집을 누가 말려. 결국 나도 살풋 웃으며 전정국 옆에서 발을 맞추며 걸었다. " 갑자기 궁금해진건데 태권도장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된거야? " " 어? 음, 진짜 뜬금없네. " " ... " " 우리 형이랑 관장형이랑 잘 아는 사이야. 나도 그래서 형, 동생하면서 지내고. " " 그렇구나. " " 멍청한 동생이 잘 하는거라고는 태권도밖에 없으니까 형이 소개시켜줬어. 처음에는 알바처럼 몇 일만 나오고 했었는데 그러다가, " " 응. " " ...그냥 나랑 잘 맞는거 같아서 쭉 일하고 있는거지. " " 아- " " 그러다가 너도 만나고. " 전정국이 내게 고개를 돌리며 웃어보였다. 장난스러운 웃음에 나도 따라웃었다. 서로 꽉 마주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만 있어도,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따뜻했고 설렜고 행복했다. 전정국과 같이 있는 순간이 이제 난 이렇게나 소중하고 고마운데 아무 것도 모르는 것 마냥 행복해할 수만은 없다는게 내 마음을 자꾸 불편하게 만들었다. 너와 나 사이에 앞으로 어떤 날들이 남아있을까. 설마 내가 널 또 다시 아프게 하지는 않을까. 그동안 난 이미 충분히 널 아프게, 외롭게 했고 이제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 사람인데. 많은건 바라지 않았다. 그건 내 넘치는 욕심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단지 난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함께였으면 했다. 내가 빌었던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지금 잡고있는 이 손을 놓지 않기를. 내 주위를 둘러싸고있는 뿌연 안개를 헤쳐나가며 내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이 안개가 걷히고 내 시야가 틔여 앞을 바라봤을 때 그 곳에 전정국, 네가 서있었으면. " 전정국. " " 응. " " 정국아. " " 왜- " " ...사랑한다고 해봐. " " 어? " " 사랑한다고 해봐, 나한테. " " 뭐야, 뜬금없이. " " 해봐, 빨리. " " 사랑해. " 해달라고 했다고 또 냉큼 해주냐. 이거 참 쉬운 남자라고 타박을 하니 ' 너한테만 쉬운거야. ' 라며 능청스럽게 대꾸한다. 그래. 나한테만 쉬워줘서 고맙다. 그래서 이렇게 나쁘고 이기적인 나한테 착- 하고 달라붙어 있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말로는 하지 못 하고 전정국의 손을 더 꽉 잡으며 웃었다. 갑자기 자리에 멈춰선 전정국이 내 손을 잡아당겨 허리를 감싸안았다. " 왜, 왜. 뭐하는거야. " " 너도 해. " " 어? 뭘? " " 나한테 사랑한다고, 너도 해줘. " 그게 뭐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나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건지, 내 앞에서 한껏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있는 전정국 때문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원래 같았다면 괜한 심술과 부끄러움에 쉽게 해주지 않을 말이었지만 전정국의 표정이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거 같은 얼굴이라서 나는 전정국의 바람대로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로. " 정국아. " " 응. " " 정국아 ㅅ, " ' 정국아, 제발. ' ' ... ' ' 그만해, 정국아. '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지친 나의 목소리가. 이윽고 눈 앞에 두 사람이 그려졌다. 한 사람은 잔뜩 지쳐보이는 얼굴을 한 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는 전정국이었다. 전정국에게 가장 달콤한 말을 해주려던 그 순간, 잔인한 기억이 떠올랐다. 정말 빌어먹을 타이밍이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아 내가 먼저 전정국을 껴안았다. 전정국이 나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나는 전정국을 꽉 안고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러냐는 전정국의 물음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떠오르는 기억을 외면하려고 애썼다. 입술도 짓이겨 물고 고개도 세차게 저어보았다. ' 아니야. 아니라고! ' ' ... ' ' 아니야, 정국아. 이제 아니야. ' ' ... ' '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만 좀 하자. ' 지금 내 유일한 도피처는 전정국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나는 지금 내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런 전정국에게 가장 모질고 잔인한 말을 내뱉고있었다. 천천히 떠오르는 진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전정국을 안은 팔에 더 힘을 주었다. " 왜 그래. " " ... " " 무슨 일이야. 머리 아파? " 그 짧은 순간에도 이 순간조차 후회를 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어차피 이렇든저렇든 후회로 남을 순간이라면 말해야했다. ' 사랑한다고 하지마. 나한테 그런말 하지마. ' ' ... ' ' 나는 널 사랑하지 않아. ' " 사랑해. " " ... " " 사랑해, 정국아. " 지금의 나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정국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바로 그것만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태꿍의 말 |
안녕하세요. 태꿍입니다. 자주 오겠다고 했는데 또 이렇게나 오래 걸렸네요ㅠㅠㅠㅠ 다들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나요? 저는 올해도 메리솔로크리스마스^ㅁT였죠ㅎㅎ 이제 정말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독자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셔서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죄송한 말씀이지만 9년째 연애중 텍스트파일 메일링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텍스트파일을 만들다보니 내용적으로나 맞춤법도 수정해야하는 부분이 보여서 수정하는 중인지라 시간이 필요하네요. 빠른 시일 내로 마쳐서 메일링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운데 우리 독자님들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
건강맨날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