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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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말 없이 정원의 한 가운데 놓인 그녀만의 공간에서 복희가 타준 차를 마시는 것을 즐기곤 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아가씨의 뒤에서 그 무엇이 아가씨의 눈을 사로잡는지 생각에 잠긴다. 하늘 높이 푸르게 솟아오른 저 나무들일까. 아니면 정원의 잡초를 뽑고 있는 남자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가씨가 좋아하는 동백꽃이 가득 피어난 화단일까.
“ 오늘은 비가 오려나... ”
“ 글쎄요.. 아마 아가씨에게 들켜 비구름들이 곧 도망가지 않을까 싶어요 ”
나의 대답에 아가씨는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 너는 참 재미있는 아이야 ’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운 아가씨는 모자를 살짝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옆으로 비켜나 아가씨의 뒤에서 천천히, 그녀의 발걸음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하얀색 스카프로 덮인 아가씨의 여린 실루엣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렇게 몇 걸음 지나지않아 아가씨는 왼 편의 이름모를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곤 자리에 멈춰섰다. 자주빛의 친구없이 외로이 잎을 피고있는 꽃의 줄기를 톡- 꺾은 아가씨는 나에게 가까이 와보라며 손짓했다. 아가씨의 옆에 무릎을 굽혀 앉자 내게 꽃을 보여주며 얘기했다.
“ 이쁘다, 그치 ”
“ 햇빛에 말려서 책갈피로 만드는건 어떠세요? ”
“ 그거야! 나도 그 생각을 했어. ”
아가씨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꽃을 건넸다. 꽃보다 아가씨가 예쁘다는 말을 깊숙이 삼키며 나는 손수건을 펼쳐 꽃을 담아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꽃을 좋아하는 아가씨는 돌아가기가 아쉬운지 앉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있던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다. 수업에 늦을 것이라는 나의 재촉에 아가씨는 못내 아쉬운듯 천천히 일어났다.
“ 오늘은 수업 받기가 싫은걸. ”
“ 수업을 빠지면 부인께서 화내실거에요. ”
“ 부인은 내일 오잖아. ”
오늘따라 아가씨는 수업을 빠지고 싶어했다. 나는 난감했다. 나야물론 아가씨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도와주고 싶지만 부인께 들켰을 때 나 혼자서만 책임을 지는게 아니라 아가씨 또한 어떤 벌을 받지 모르기 때문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고민에 빠진체 아가씨에게 일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기다리고 있을 방의 창을 바라보다 나를 바라보는 아가씨의 두 눈을 마주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홀린듯 그만 큰 화를 불러 일으킬지도 모르는 답을 하고 말았다.
“ 그럼 아가씨, 오늘 수업은 제가 빼보도록 할게요 ”
“ 진짜지? 정말 고마워! ”
아가씨는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비록 장갑속에 감추어진 손이였지만 마주잡은 손을 통해 아가씨에게 나의 떨림이 전해질까 두려웠다. 아가씨는 치맛자락을 쥐고 돌 길을 골라 걸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릴적에도 잘 웃지 않던 아가씨인데. 아가씨의 밝은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아가씨를 방으로 모시고 수업이 이루어지는 3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아가씨가 갑작스레 열이 나 수업에 참석할 수가 없다는 거짓말을 했다. 선생은 알겠다며 별 다른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을 문 앞 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마당을 쓸던 동영이 황급히 나를 쫓아왔다.
“ 뭐야? 지금 갈 시간이 아닌데 ”
“ 아가씨가 오늘 수업을 듣기 싫다고 하셔서.. ”
“ 야아- 너 자꾸 그러다 아가씨 버릇 나빠지면 어쩌려고 ”
“ 아니야. 오늘은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
“ 퍽도 아니겠다. 너가 여기서 쫓겨나면 나도 집 없는 신세되니까 조심해 제발. ”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영을 돌려보냈다. 아직 남아있는 껄끄러운 감정을 안고 집 안을 들어서자 크게 걸린 아가씨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그림 속에서도 아가씨는 웃지 않고 있구나. 한 평생을 아가씨의 옆에서 지낸 복희조차 오늘처럼 아가씨가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한다. 그렇게 깜깜한 밤이 찾아오고, 아침에 도망간줄로만 알던 비구름이 돌아왔는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나는 2층 중앙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가씨가 평소에 즐겨보던 책이다. 모두들 잠이 들었을 이 시간을 이용해 나는 아가씨의 책들을 몰래나마 읽어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한창 책을 읽는 도중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였다.
“ 너 거기서 뭐하니? ”
“ 아.. 아가씨. ”
나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들고있던 책을 뒤로 숨기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아가씨는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고 내가 들고있던 책을 뺏었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답이 없는 아가씨가 더욱 무섭다.
“ 내 책에 함부로 손을 댄 이유가 뭐야? ”
“ 죄송해요. 아가씨가 평상시에 읽으시는 책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어요.. ”
“ 흠.. 어디까지 읽었어? ”
아가씨의 물음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책의 페이지를 가리켰다. 아가씨는 한동안 책을 들여다보았다. 1초가 1분 같은 시간 속에서 침묵을 깨고 아가씨가 말했다.
“ 잠이 안 와서 그러는데 이 책을 좀 읽어줄래? ”
“ 지금요..? ”
“ 아니. 위로 올라가서 말이야.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책을 읽어줘. ”
“ ..... ”
“ 왜, 못 하겠어? ”
“ 아뇨! 할 수 있어요. ”
“ 좋아. ”
아가씨는 책을 나에게 쥐어주곤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계단을 올라갔고 아가씨가 방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망부석처럼 그 앞에서 멈춰섰다. 인기척이 없음을 느낀 아가씨가 뒤를 돌아보았다. 책을 꼭 쥔체 멍하니 서있는 내가 우스워 보였는지 아가씨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 부끄러워서 그러는거야? ”
“ 그.. 그게 ”
“ 어서 들어와. ”
아가씨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아가씨에게 이끌려 방에 들어오니 더욱 아가씨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아가씨는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체 침대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 자리엔 항상 복희만 앉을 수가 있었는데. 머릿속은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 했고 그와중에 손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달달 떨리는 손을 멈추고 싶은데 왜 마음대로 되질 않는지.
“ 읽어줘. ”
아가씨의 말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고 등불에 의지한체 또박또박 한 글자씩 아가씨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너무 떨려서 내가 무엇을 읽는지 모르다가 점점 긴장이 풀리면서 아가씨가 잠에 들기 쉽도록 천천히, 부드럽게 책을 읽어갔다. 도중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반복되어 용기를 내서 옆을 보았다. 아가씨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든 듯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을 덮고 방을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가슴 위로 손을 얹어보았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사그러들때까지 한참을 아가씨 문 앞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