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택운.왔어요?" 피아노 치던 손을 멈추곤,뒤 돌아 나를 본다. 깊게 패인 보조개. 휘어지는 눈. "네.안녕하세요." "어서,이리 와 앉아요." 길다란 의자 가운데에서 몸을 의자 끝으로 이동시킨다. 퍽 귀여운 모습에 슬핏 웃어보이며 다가가 앉는다. "오늘은 기분 좋아보여요." "..제가요?" "네." 다시 휘어지는 눈. 그 모습에 따라 웃어주니,이젠 대놓고 하하 웃는다.
"예뻐요.기분 좋아보여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 한국말이 아직은 서툰 그다. 그래도 예쁘단 말에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수가 없다. 나른한 오후. 한쪽 면이 모두 통유리로 된 그의 집은,한낮의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났다. 어제 밤새 내린 눈이 그의 집 마당에도 수북히 쌓였다. 새하얀 눈에 반사되어 집안을 비추는 빛에 눈이 시렸다. 그가 조용히 연주를 시작했다. 창 밖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그에게 향하게 돌렸다. 살짝 내리깐 눈. 그 사이 까만 눈동자. 그 위 길게뻗은 속눈썹. 푸스스 웃어보이곤 스르르 눈을 감았다. 옆에서 그가 미소지으며 건네는 시선이 느껴졌다. 잠시 후 들리는 노랫말처럼 낮게 읖조리는 목소리.
"좋은 일,있었나요?" 마치 피아노 선율과 화음을 이루듯,부드럽게 귀를타고 들어오는 목소리. "엄마가 허락하셨어요.선생님한테 피아노 배우는거." 슬쩍 눈을 떠 옆을 바라보니,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 "잘됐네요.너무 기뻐요." 예쁘게 웃어보이며 다시 피아노로 고갤 돌려 집중한다. 살짝 미소를 걸친 채 그의 어깨에 기대며 눈을 감는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연주.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항상 그랬듯이 그의 연주에 맞춰서, 하지만 연주에 방해되지는 않도록, 작게 콧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잠시 후 나의 허밍에 맞춰서 나른해지는 그의 연주. 입가에 걸쳐지는 미소. 어우러지는 우리의 화음.
"여기서는 이렇게,손가락에 힘을 빼고-" "이렇,게-" "응,그렇게.잘했어요." 햇살과도 같은 싱그러운 미소로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길이 기분좋다. 봄바람이 스치듯 가볍지만,따뜻한 손길. 나른해지는 분위기에 자꾸만 눈이 감긴다. "택운,졸려요?" "응.조금.." 푸스스 웃는다. 아이같은 미소. 하지만 푸근한 햇살같은 미소. 내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며 어깨에 기대게 한다. 그의 손길에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의 온기, 그의 체향. 모든것이 따뜻하다. 봄바람이 살랑이듯,귓가를 타고 흐르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싫지 않다. 그가 조금 더 다가와 싱그럽게 미소짓고 있을 얼굴로 말한다.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인다. "조금만,조금만 자고 다시 일어나는거에요." "응,조금만." "다시 일어나면 또 노래해줘요." "응." "다시 일어나면 또 함께 연주해요." "..응...." "다시 일어나면.." 그 다음은 결국 잠이들어,듣지 못했던것 같다.
"택운,자요?" 미동이 없다. 어느샌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숨소리. 연주하던 손을 멈췄다. 일순간에 집안에 모든 것들이 멈춰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정적. 스르르,눈을 감았다. 아직은 따뜻한 그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천천히 그의 손을 놓았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 그래. 이거면 된거다. 스르르,눈을 떴다. 다시연주를 시작했다. 고요함 속에서 연주는 멈춰지지 않았다. 어깨에 기댄 그의 허밍이,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면 꼭,다시 노래해줘요." 작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그랬던 것 처럼. 고요했던 집안이 다시 피아노 선율과 허밍의 화음으로 차올랐다.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뺨 위로 왈칵, 차가운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사랑해요." 창 밖엔 어느새 눈이 내렸다. 흐르는 피아노 선율 위로, 언뜻 그의 허밍이 들린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