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해를 품은 달 01
학교에서 그렇게 정신을 잃고 난 뒤 허겁지겁 실려 온 병원에서 몇 일을 더 보내고 퇴원을 하기 하루 전 날 밤.
웃기기도 하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 뿐인데 벌과 나비가 인 날개바람에 사르르 공중에 흩어지는 봄날의 꽃가루처럼 기분이 살포시 들떠 버렸다.
덕분에 도로롱 도로롱 잠든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울리는 작은 병실에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 것은 나 하나 뿐이였다.
모두가 잠들어 불을 꺼 둔 병실 안은 숨막힐 듯 어두웠고 나는 태생적으로 깜깜한 어두움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집에서도 문득 잠에서 깨거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지금처럼 혼자 눈을 뜨고 있을 때면, 가만히 무릎을 세워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그 위에 얼굴을 묻고 벌벌 떨곤 했었다.
어둠을 인식하고 발끝부터 시작되는 떨림은 누군가 곁에 있어도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형이 바로 옆에서 자고있었지만 어둠에 가려 전혀 보이질 않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어두움을 병적으로 무서워 한다는 이 사실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어둠 속에서 벌벌 떨며 부르던 노래 때문이였다.
딱히 누군가 가르쳐 준 적도 없었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는, 도무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왜 내 기억속에 있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는 그 노래를 나는 한참이고, 또 한참이고 불렀었다.
나도 모르게 혹은 본능적으로 가사는 없고 음만 있는 그 노래를 새액 새액 입 안에서 굴리듯 부르다 슬쩍 묻었던 얼굴을 들어보면, 언제 찾아 온 건지 눈물 콧물바람인 나와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든 형이 있는 방 안 가득 뽀얀 달빛이 들어 차 있곤 했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음, 음 하는 내 노랫소리를 서서히 죽였다.
노랫소리가 완전히 멎어 들 때 즈음, 눈물과 떨림은 맑은 물에 씻어 낸 듯 말끔히 사라져있었다.
햇빛처럼 예쁜 노란빛도 아니고 따뜻하지도 않은 하얗고 찬 그 달빛이 나는 참 좋았다.
어쩌면 하얗고 차갑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일지도 몰랐다.
가난한 부모와 늙은 할머니 그리고 장애인 형과 함께 살며 남들보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나는 우는 얼굴로 동정과 연민의 손을 내미는 사람보다 웃는 얼굴로 공감과 이해의 손을 내미는 사람을 더 잘 따랐다.
그리고 달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꼭 두번째 사람이 내민 손의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 날 밤도 내 노래를 듣고 찾아 온 달빛을 이불삼아 잠이 들었다.
´이상하게 지호 너는 햇빛이 아닌 달빛을 좋아하더라.´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나를 보아 오신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라면 한번씩은 통과의례적으로 내게 하셨던 말이 있었다.
또 뒤에 꼭 따라오던 말이 하나 더 있었는데, 뭐였더라.
´달빛이랑 참 닮았어. 가엾고 예쁜 것이.´
였던가….
▒▒▒
「다들 주목! 우리반에 좋은 소식이 두 가지나 있어요. 하나는 아팠던 지호가 건강해져서 다시 학교에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호보다 한 살 더 많은 지호 형 태운이가 오늘부터 여러분이랑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떠들썩하던 아이들이 앞문을 통해 손을 잡고 조심조심 들어오는 나와 형을 보더니 일순 조용해졌다. 그 정적은 아주 짧게 이어졌고 그에 더욱 힘있게 형의 손을 잡는 내 행동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병원에 있는 내내 할머니와 머리를 싸매고 상의하던 문제였다. 내 입장에선 편찮으신 할머니 혼자 장애인 형을 오전 내내 돌보신 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였고, 할머니 입장에선 애가 애를 챙긴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는 형을 나와 함께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할머니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팽팽히 의견이 갈렸었다.
결국 내가 어떻게든 할머니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할머니와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 살 많은 우리 형은 나와 같은 학년 같은 반이 될 수 있었다.
「지호는 오랫동안 이 학교에 있었으니 소개가 필요 없을테고, 우리 태운이가 자기 소개를 해볼까?」
「…저…으어어…지호야아…무, 무서워…나, 나는 집에 갈래…」
「…우리 형 '우태운'이야! 보다시피 나이만 한 살 위지, 생각하는거나 말하는거나 행동하는건 우리보다 어려. 그래도…잘 부탁할게 애들아.」
부족한 형을 대신해 저 짧은 말 한 마디를 하는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형의 버벅이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인다는 것이 이렇게도 마음 아플 줄 몰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런 형을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음 아픈게 아니라 형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아이들의 그 표정을 보는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힘들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형에게 거리낌없이 다가와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까지는 아니여도 이해해 주는 정도는 사실 조금 바랐던 것이였는데.
숨 막힐 것 같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 나는 형의 손을 잡고 선생님이 미리 준비해두신 뒷문 쪽 빈 두 자리로 가 앉았다.
처음 보는 환경에 잔뜩 겁을 먹은 듯 형은 자리에 앉고 나서도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금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고, 나는 그런 형의 어지러진 앞머리를 가만히 정리해주었다.
「형, 자…?」
「…」
「…응, 앞으로 학교오면 그렇게 계속 자. 절대 애들이랑 눈 마주치지마…알겠지?」
'싫어, 이상해, 무서워, 장애인….' 뒷자리에 앉은 형을 돌아보는 눈속에 하나같이 둥둥 떠다니던 그것들.
덜컥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느라 앙 다문 입술과 울컥거리는 목울대가 너무나도 아프던 그 때.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가사는 없고 음만 있는 그 노래를.
▒▒▒
아이들과 이야기를 섞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따돌림만 당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왕따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하필이면 반에서 소위 문제아로 불리는 녀석들이 나의 형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바람에 내게 다가오려는 아이들까지 점점 멀어지는 아주 최악의 상황이였다.
'우지호의 형 우태운은 자폐증을 가진 이상한 장애인이다'
악의적으로 뭍에 떠오른 형에 대한 이야기는 동급생들 사이에서 흉흉하고 빠르게 퍼져나갔고, 그에 하나 둘 사라져가는 친구들에 씁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크게 절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이럴거면, 내가 단지 장애인 형이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멀어질거면, 애초에 나와 왜 친구를 하였는지.
할머니께는 늘 거짓말을 했다. 엊그제는 친구들과 물장난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바로 어제는 나랑 형이랑 친구들이랑 한데 어우러져 종이접기를 하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행여 거짓말이 탄로 날 새라 집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색종이 두 장을 꺼내 아무렇게나 접어 낸 여우와 개구리를 할머니 손에 얹어드리며 씩 웃었고, 그것을 받아 든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었다.
내 거짓말로 할머니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안심의 꽃을 볼 수 있다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나쁜 기자가 되어도 마냥 좋았다.
일이 터진 것은 형이 학교에 다닌지 몇 주가 채 안되던 날이였다.
형이 잠든 사이에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 화근이였다.
「…형!!!!! 야, 이 자식들아, 뭐 하는 짓이야!!!!!」
반 아이들이 곱게 잠든 형을 억지로 깨워 형의 옷자락을 이리저리 잡고 흔들며 사물함에 부딪히게끔 만들고 있었다.
형의 엉엉 우는 소리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였다. 앞 뒤 가리지않고 반 문을 쾅 차고 형을 괴롭히는 녀석들에게 달려들어 아무렇게나 주먹을 내질렀다.
그에 한 명이 나가떨어졌지만 천성이 조용하고 약했던 나는 금새 녀석들에게 진압당하고 복날의 개 패이듯 먼지나게 얻어맞았다.
맞는 그 순간에는 머릿속에 가득 찬 어떤 걱정으로 아픔을 느낄 틈이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목이 터져라 울고있는 형 위로 거품을 물고 쓰러져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처럼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 걱정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에이, 뭐 이런것들이 다있어. 우지호 진짜 왕따되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네 형 바보라서 아픈 거 금방 까먹어버려! 근데 그깟 장난 좀 친게 뭐 어때서?」
「아 씨…여리여리한게 주먹은 꽤 맵네…아 짜증나! 네 까짓게 날 쳐? 이걸 그냥…!」
「야, 그만해. 그러다 쟤 진짜 죽겠다. 축구나 하러 가자.」
아, 걱정했던 것의 답이 나왔다.
오늘은 할머니께 친구들과 축구를 했다고 해야겠다. 형이 나를 졸졸 따라오며 공을 뺏으려는 바람에 형과 나의 발이 얽혀버려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나뒹굴었다고 해야겠다.
내 눈앞에 녀석들이 퉤, 하고 뱉어 낸 침이 보기싫게 떨어졌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제서야 잊었던 아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갈되는 소재와 표현력에 눙물을 흘리는 자까입니다…. |
미치겠어요...이거 일을 너무 크게 벌렸엌ㅋㅋㅋㅋ 이 똥손으로 내가 무슨 짓을...!!! 지호 과거는 02화에서 끝날 것 같아용...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
* 암호닉 :)
쵸코/이불/달/솜사탕/낙서/루팡/오이/쌀알/나의 왕자님/현기증/달토끼/쨔응/새주 님 감사합니다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