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늦은 밤, 전화
W. 코주부
-자...?
"........아니. 아직……."
우리가 헤어진지도 벌써 일 년.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는 이름 없는 익숙한 번호가 핸드폰 액정위에 비치고, 그 벨소리는 고요한 방안에 어둠처럼 가라앉던 내 호흡을 멈추게 했다. 늦은 새벽,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있었다. 마치 늘 부르터 메말라있던 녀석의 입술처럼. 방안의 공기가 차다. 아무래도 창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나보다. 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손끝 발끝이 싸늘하다. 핸드폰을 잡은 손이 떨려왔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제 와서 나를 찾는 건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전혀 모르는 번호인 것처럼 이젠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닌 남남인 것처럼 무시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인연이기를 바랐다. 어두운 방 안에서 몽롱한 잠에 빠져들 무렵 걸려온 전화 한 통. 1년이 지난 지금에도 네 번호 하나 잊지 못하고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핸드폰을 집어 드는 그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떨려오는 내 손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나를 재촉하듯 벨소리가 울려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너의 기억들이, 찬란했던 우리의 순간들이 내 머릿속을 스쳤고,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은 순간 들리는 너의 목소리에 내가 도달한곳은.
아. 너와 내가 함께하던 그날…….
-미안해……. 내가 또 자는 거 깨웠지...?
".....술, 마셨어?"
조금……. 짧게 대답하는 녀석의 목소리는 마치 겨울비 같았다. 너 왜 그렇게 추워 보여.... 왜 그렇게 외로워 보여.... 나도 모르게 걱정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행여 네가 떨리는 내 목소리를 눈치 챌까봐. 난 또 다시 이렇게 너에게 바보처럼 휩쓸려 버릴까봐. 대답 않는 수화기 너머의 나에게 녀석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그 목소리를 듣다가는 떨려오는 내 자신을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찍 자. 할 말 없으면...-' 이만 끊을게, 하고 마치 책을 읽듯 로봇처럼 뱉어내는 내 말을 급하게 가로막는 목소리.
-취한건 아냐. 끊지 말아줘…….
"……."
-....미안해. 다신 안 그런다 했는데…….
내가 잘못한 거지...? 귀찮게 해서 미안해…….
"……."
-요즘도 많이 바쁘니....? 아프진 않니. 나쁜 일은 없니…….
난 여전히 이렇게 살아……. 대답 없는 전화기에 대고 혼잣말을 하듯 내 안부를 묻던 지훈은 짧은 자신의 안부를 전하며 바람이 새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취하지 않았다던 녀석의 발음은 이미 혀가 꼬여버린 것 같았다. 내 안부를 묻는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컴컴한 방 안에서 마치 끝없는 나락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
무던히도 연습했다. 거리를 걷다 너를 마주쳐도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더라도 이제 나는 괜찮기로. 사실은 괜찮지 않았지만, 나는 괜찮아야만 했다.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있도록, 매일매일 거울을 보고 상상을 하며 연습했다. 수십 번. 그리고 수백 번. 그러나 수백 번이 수천 번이 되고 수천 번이 수만 번째가 되는 오늘 밤. 나의 셀 수 없던 다짐도 무던히도 노력했던 연습도, 너의 한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왜 듣기만 하고 한숨만 쉬어…….
"……."
대답이 없는 핸드폰 너머의 내 반응에 지훈은 불안한 듯 말을 걸어왔다. 미안해. 난 아무래도 아직 괜찮지 않은가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너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대하듯, 도저히 자연스레 말을 꺼낼 수가 없어. 쿵쿵 뛰어대는 가슴만 부여잡고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 옛날의 우리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바보 같은 내 가슴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쉴 새 없이 뛰어댔다. 입을 열면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이 모두 새어나갈 것 같아서 아랫입술만 꾸욱 깨문 채로 정지해 있었다.
-나올 수 있니...? 십 분만. 아니, 오 분도 괜찮아……. 얼굴만 보고 갈게.
"……."
-.....다신 이런 일 없을게. 이번 한번이면 돼.
다시 한 번만……. 한번만... 널 안고 싶어.
나를 안고 싶다는 다정한 목소리는 물기가 어린 듯 촉촉했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훈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동상처럼 얼어붙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침착하려 애쓰던 내 동공은 확장되고 가쁘게 뛰는 심장박동을 따라 호흡은 거칠어졌다. 온 몸의 혈액이 역류하는 듯, 온 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녀석은 여전히 나의 숨을 멈추게 했다. 나를 향해 건네는 그 애달픈 목소리에 응답하지 못하고서 눈물만 흘렸다. 입을 열면 행여 듣기 싫은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끅끅대며 손등으로 입을 막고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미안해-. 아직까지도 다 잊지 못한 나라서 미안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두 볼의 눈물이 뜨거웠다. 아직까지도 덜덜 떨려오는 손과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핸드폰 너머의 너는 말이 없다. 내 눈물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듯이, 바보 같은 나를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늦은 새벽, 긴 시간동안 너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아직까지 이런 내가 나도 싫은데…….
너도 그럴 텐데, 나보다 더 지겨울 텐데…….
.......아직, 널 사랑해.............-
***
오늘은 기분이 너무 우울하고 속이 상해서 이런 어줍잖은 조각 글을 쓰게 되었네요 휴- 원래 쓰기로 했던거나 마저 열심히 써야하는데, 행복한 짘경과 심각한 짘경표를 쓰기가 힘들었어요 이해해주세요...ㅠㅠㅠ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