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홍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영재는 그것을 꽤나 늦게 깨달았었다. 힘찬이 전혀 말해주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영재는 한편으로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또한 자신도 원망스러웠고. 영재는 잠든 준홍을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온 힘찬에게 주저하다가 물었다.
"…아저씨."
"응?"
"……준홍이 낫기 힘들죠."
힘찬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영재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맞아요? 재차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힘찬은 대답 대신 영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 좀 그만 쓰다듬었으면 좋겠다. 영재는 괜히 그렇게 느꼈다.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어.
"……아저씨."
"…응."
"……준홍이 어떻게 해야 나아요?"
"아마……치유사가 있어야겠지."
문득 영재는 어렸을 적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힘찬이 그렇게 읽으라고 해도 저는 그게 싫었다. 하지만 결국 읽을수 밖에 없게 되었고, 그 첫번째 책이 인간과 병에 대한 책이었다. 그리 어렸을 때도 아니다. 열 세살이었을 때니까. 힘찬은 자신에게 지식을 쌓아야 함을 강조하며 책을 읽게 했다. 책은 열댓권 정도 읽고 그만뒀다. 도무지 그 작고 복잡한 언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더라. 그래도 첫 도전이라고 읽은 그 책의 내용만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사람을 위해 치유를 해 주는 치유사, 라는 문구로 그 책은 시작됐었다. 책을 읽고 한동안은 자신도 치유사가 되고 싶더랬지. 지금은 별 생각 없지만. 사실 알고봤더니 치유사는 90%이상이 타고나는 거라는 것 때문이었다.
"……아저씨, 치유사가 오면 돼요?"
"……뭐라고?"
"제가 데리고 올게요, 치유사."
"안돼."
영재가 눈을 크게 뜨고 힘찬을 바라보았다. 힘찬은 눈을 엄하게 뜨고는 영재에게 다시 말했다. 위험해. 영재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힘찬이 안된다고 한 게 처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은 아니지. 하지만 안된다는 것도 말하는이의 속마음에 따라 달랐다. 이번에 힘찬이 안된다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영재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영재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뜻을 굽힌 적도 없고 힘찬의 뜻을 거스른 적도 없다. 영재로선 지금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지경이었다. 힘찬은 매서운 눈빛을 거두고는 다시 영재를 바라보고 말했다. 위험한거야, 안 돼.
"……왜 위험해요?"
힘찬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린 것일지도 모른다. 영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힘찬이 가장 미웠다. 저 나갈거예요, 다시 폭탄선언을 하면서. 힘찬은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재는 확인하는 것인지 다시 말했다. 저 나갈거라구요.
"……위험해."
"안 위험해요. 준홍이도 밖에서 살다 온거잖아요. 준홍이는 안 위험해요."
그저 철부지 아이의 말과 같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힘찬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준홍이 눈을 떴다. 준홍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눈을 뜨는 것만 같았다. 영재는 준홍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준홍아,"
"……네."
비몽사몽한 준홍이 눈을 반쯤 뜨고 대답했다. 그저께보다 어제가, 어제보다 오늘이 더 말라 보였다. 영재의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혹시 치유사에 대해 알아? 조심스럽게 묻자 준홍은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누구?"
"나이는 어리신데…… 굉장히 뛰어나신 분을 알아요."
"어디 살아?"
"이 숲 바로 아랫마을이요……."
영재는 힘찬을 돌아봤다. 힘찬이 허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영재는 그런 힘찬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힘찬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영재는 그제서야 힘찬에 대한 미움이 싹 가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재가 활짝 웃으면서 힘찬을 안았다. 아저씨 짱! 힘찬은 이럴 때만 짱이라면서 진담이 조금 섞인 말을 했다. 영재는 준홍에게 말했다. 준홍아, 너 이제 안 아플수 있어.
"……네?"
"이제 안 아플거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치료해줄게."
준홍은 잠에서 다 깼지만 믿기지가 않는 듯 눈을 꾹 감고 다시 떴다. 사실이다. 준홍은 영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예요?"
힘찬은 준홍이 스스로 많이 아프다는 걸 자각하고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그제서야 영재에게 미안했고, 또 준홍에게도 미안했다. 준홍은 정말로 기쁜 듯 영재를 따라 웃었다.
"준홍아, 그 사람 이름은 알아?"
"……아니요. 그냥… 그 사람이 저보다 한 살 많다는 거랑, 열 살 때 부터 치유사로 일했다는 것만 알아요."
"…괜찮아. 그 정도면 알 수 있어. ……그동안 기다릴 수 있겠지?"
"네."
영재는 준홍의 손을 꼭 잡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순수하게 걸어오는 말에 준홍도 오랜만에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영재는 또 힘찬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빨리 다녀올게요. 힘찬은 그렇게 큰 영재가 또 한편으로는 기특해서 빨리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조심하라는 말도 보태 그를 보냈다. 금방 다녀올 것이라고 믿었다.
*
이미 숲에서 나오는 것만으로도 다리에 멍과 생채기가 여러 군데에 났다. 영재는 아팠지만 놀다가 한 두 번 이런 게 아니라서 참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생각한 마을과는 꽤나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 장터를 이루었고, 중간 중간에 사람들끼리 욕설이 섞인 말싸움을 하는 것도 들었다. 생전 처음 듣는 험악한 말에 영재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저기, 혹시 여기에 사는 치유사 아세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재는 오늘 하루만 해도 술에 취한 남자,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여자, 담배를 입에 물고 빼질 않는 여자, 험악한 인상으로 영재를 노려보는 남자 등, 자신이 생각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을 몇 명이고 만났다. 그래도 그 중 친절하게 답해 준 사람들은 치유사가 한 둘이 아니라는 둥, 아는 사람이 없다는 둥 자신이 원한 대답과는 다른 대답을 뱉었다. 영재는 몸도 지치고 기분도 꿀꿀해졌다. 그 때 마다 준홍이 아프다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지만 그래도 복잡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환상과는 달라서가 가장 큰 이유였을 거다. 세상은 환상적이지 않았다. 영재가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는 이미 별들이 하늘에 박혀 자신의 빛을 뽐내고 있었다. 영재는 급격하게 피로해짐을 느꼈다. 이 쯤이면 자신은 이미 자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영재는 파장한 장터의 아무 곳 하나의 벽에 기대 앉았다. 제 생에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저기요, 여기 제 자린데요."
아, 네? 영재가 당황한 듯 물었다. 깨끗하지 못한 차림을 한 사내가 영재를 툭툭 치고는 비키라는 손짓을 했다.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영재는 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멀리 떨어지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누웠다. ……빨리 간다고 했는데. 자신의 약속이 떠오르면서 속상한 채로 눈을 감았다. 다음 날에는 꼭 그를 만나리라는 다부진 다짐을 하곤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 어리네. 차가운 바람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데다가 잠도 안 오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 그리고요, 그 사람 진짜 착해요.'
준홍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준홍 자신은 모르는 사람인데 아는 건 참 많다. …아, 진짜 자야지. 영재가 자신의 옷을 꼼꼼히 입으며 몸을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