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추운 아침!"
어제 호되게 당했는지, 오늘은 옷을 비교적 얇게 입고 온 성규가 지구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활기찬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모두들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고개를 까딱 숙이면서 그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어제에 비해 얇게 입고 오셨네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성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춥다는 말과 함께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로 총총총 뛰어갔다.
"김경위님, 몸은 어떠세요?"
"응? 뭐가요?"
남색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면서 되묻는 성규에게 '어제 아프시다고 조기 퇴근하셨잖아요.'라며 그의 기억을 되새겨주는 동우였다. 그 말을 듣고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책상을 부여잡고는 기침을 토해내듯이 콜록콜록 거린다.
세상에서 제일 아픈 척…. 엄청나게 처량한 척….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척…. 경미한 사고를 당한 뒤 보험금을 노리고 병원에 드러누운 꾀병환자처럼 온갖 척이란 척은 다하면서 감기환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지나가던 진짜 감기환자가 보면, 기침하다가 요절하게 될까봐 자신의 감기약을 건네줄 정도의 엄청난 연기력이었다. 물론 그 '연기력'이란 단어의 앞에 '발'이라는 글자가 붙는 건 비밀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기침을 하고 나서 고작 한다는 말이,
"자…장경장! 콜록콜록….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이면 싹 나을 것 같은ㄷ- 콜록콜록!"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의 순진한 장경장은 그가 많이 아픈 줄로만 알고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부랴부랴 티테이블로 달려갔다. 다 죽어가는 사람 마냥 기침을 계속 이어가면서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는 성규의 눈빛이 음흉스러움으로 번뜩였다. 그가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머리를 삥삥 굴려서 급하게 세운 계획은 단 하나. 동우가 타준 코코아를 마시고나서부터 기침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치 다 나은 것처럼! (같잖은 계획인 듯하다.)
*
"에이씨, 지각이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야상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성열은 근무지를 향해 부지런히 뛰고 또 뛰었다. 8시까지 출근인데 휴대폰 속 시계는 원망스럽게도 8시 20분을 알리고 있었다. 어차피 20분일 바에야 차라리 8시가 아니라 7시였으면 좋을 듯싶다. 에라이, 그 놈의 눈이 뭐라고!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면서도 찡그린 채 열심히 뛰는 성열이었다.
눈싸움을 어제 두 번씩이나 거하게 치렀더니 물을 잔뜩 머금은 솜 마냥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주 그냥 어깨가 축축 처졌다. 그러다보니 퇴근하는 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버스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깨다가 또 졸다가 깨다가를 셀 수 없이 반복했다. 옆에 앉은 대머리 아저씨의 어깨에 수줍은 듯 살포시 기댔다가 크흠, 하는 헛기침에 화들짝 놀래서 깨기도 하고, 자세를 바로 잡은 뒤 다시 눈을 감고 자다가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시 깨기도 했다. 알고 보니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머리로 콩콩콩 줄기차게 박은 거였지만 말이다. 에라이!!!! 스스로에게 신경질을 내자마자 곧바로 마취 총에 맞은 짐승처럼 스르륵 잠이 든 성열은, 한참동안 꿈나라를 헤매다가 문득 사람들이 웃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니 하나같이 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사람들이 웃는 이유를 몰라서 뻑뻑하기만 한 눈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고생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한 마디 했다.
'저기, 실례지만…. 락커세요?'
………….
바깥에서 창피함을 톡톡히 맛보고 온 성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빨간색 야상을 벗더니 괴성을 지르며 방바닥에 내리꽂았다. 어쩌면 패대기쳤다는 말이 더 어울릴 법 했다. 버스에서 열정적으로 헤드뱅잉을 했단 생각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스웨터를 훌러덩 벗어서 한 번 더 패대기쳤다. 그러고 나서는 온 힘을 다해 발로 팍팍팍 밟았다. 그의 청바지 또한 야상과 스웨터 꼴을 면치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달랑 사각팬티 하나만 입게 된 그는 처참하게 처형된 옷가지들을 방바닥에 내버려두고 푹신한 침대 위로 힘껏 몸을 던졌다. 매트리스와 등이 맞닿으면서 '풍'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큰 대자로 벌러덩 누워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있는 하늘색 사각팬티를 입은 채로 말이다.
아니, 근데 저렇게 일찍 잠들었는데 왜 아침부터 지각으로 뛰고 있냐고? 눈치 빠른 몇몇 독자들이 이미 예상했듯이, 알람을 맞추는 걸 깜빡하고 잠들었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저번 주의 오늘은 휴가여서 알람이 해제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무엇하리~ 주인이 똑똑하지 못한 것을~"
다리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털레털레 걸으며 타령을 하고 있는 그의 시야에,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는 게 들어왔다. 우왁!!!!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걸 건너야겠다 싶었는지 빨래 짜듯이 없는 힘을 빡빡 짜내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딱 당도하는 그 순간, 신호등이 약을 올리는 것 마냥 빨간불로 바뀌었다.
아…아니…, 이럴…이럴 수가…!
"뭐 이런 거지같은 신호등이 다 있어!!!!!!!"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의 성열이 괴성을 지르며 신호등을 발로 팡팡 찼다.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영화 속 슬로우모션처럼 '무어어 이으르언 그어지이그아트은 시인호오드으응이이 드아 이있으어!!!!!!'라며 신호등을 부셔버릴 듯이 발로 차는 성난 헐크로만 보일 뿐이었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래…."
신호등의 상큼한 밀당 덕분에 그만 이성을 잃고 난폭해진 그를 가리키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수군덕거리는 여고생들이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그 중 한 명이 어떤 사실을 깨달았는지 옆에 있는 친구의 팔을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저 사람…, 건너편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잘생긴 경찰 아니야?"
그 말에 성열을 한 번 힐끔 보더니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옆친구였다.
"얘가 뭐래. 경찰이 학생도 아니고 9시에 맞춰 출근하냐? 경찰도 엄연한 공무원인데? 야, 웃긴 소리 좀 그만해라…. 우리가 등교할 때 교통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 봤지, 출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네요~ 그 사람들 아마도 7시나 8시에 맞춰 출근해야 할 걸?"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잘생긴 경찰이랑 닮은 것 같아…."
그러자 같은 무리의 친구들이 하나 둘씩 관심을 보이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 잘생긴 경찰 누구? 이호원?"
"야야, 혹시 이호원 아니야?"
"잘생겼으면 당연히 이호원이지! 존잘남이야, 존잘남. 그냥 개쩔어…."
신호를 기다리며 소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성열은 뿌리 깊은 빡침으로 인해 어금니를 꾹 물었다. 어째서 '잘생긴 경찰'이라는 말 한 마디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이호원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 거지? 걔는 7등신이고, 나는 8등신인데!!! 게다가 짜리몽땅한 누구랑은 차원이 다른 길쭉한 명품 기럭지 덕분에 제복 간지 하나는 완전 죽여주는데!!!! 경찰차 타고 순찰 돌 때도 누구는 여자 보기를 돌 같이 하느라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반면, 나는 친절하게 인사하고 팬서비스도 기가 막히게 해주는데!!!!!
이 고얀 것들이 어째서 이호원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거냐고!!!!!! 내 이름 어디 있어!!!!!!!
"아, 이름 생각났다! 내가 말한 잘생긴 경찰은 이성열이야!"
이 한 마디에 성열이의 얇은 귀가 쫑긋거렸다. 와이파이 신호를 잡는 것처럼 소녀들의 말에 주파수를 잡는 듯 했다. 옳지, 잘한다!! 누군지 몰라도 참 기특하구나!!! 나이스샷!!!!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기뻐하는 그의 마음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는 호순이들의 한 마디….
"아…, 그 비글…?"
"쟤 지금 개코원숭이 닮은 사람 말하는 건가?"
"아마도 그럴걸? 그 왜 있잖아, 키만 멀대같이 큰 사람."
뭐어? 비글? 뭐어어? 개코원숭이? 뭐어어어? 키만 멀대같이 큰 사람? 이 말을 들은 성열의 폭력성이 다시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대체 이호원의 어디가 좋다는 거지?
*
"여러분,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세요?"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성규가 대뜸 지구대 식구들에게 알 수 없는 물음을 하나 던졌다.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린 호원은 동우를 향해 '알아?'라는 입모양을 지어보였다. 동우도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언뜻 보니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현재 시각은 8시 35분. 이성열 순경이 35분씩이나 지각한 날이죠!"
'씩'이라는 단어를 유독 강조하며 기쁜 듯이 말하는 성규였다. 이와 동시에 지구대의 유리문이 활짝 열리면서 찬바람이 안으로 숭숭 들어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찬바람이 달갑지만은 않은지 모두들 인상을 찡그리며 출입문을 바라보았고, 그 자리에는 빨간색 야상을 입은 성열이 코를 훌쩍 들이키며 서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허리를 반으로 접어 꾸벅 인사를 하는 성열에게 짝짝짝 박수를 쳐주는 성규였다. 어리둥절해진 성열과 무한지구대 식구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아니, 저 인간이 왜 저러지? 그 뜨거운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며 성규는 부처 마냥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하긴요~ 늦을 수도 있는 걸요! 그 모습, 참 보기 좋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성열에게 다가간 성규는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힘내세요, 이순경! 저번 주에는 30분 늦으셨는데 오늘은 35분을 돌파했군요. 지각왕의 길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자신이 세운 최고 기록을 깨고 또 깨고, 끊임없이 깨는 그 모습에 전…, 정말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뭐하세요? 지각왕에게 박수를 쳐드립시다!!! 그러자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무안해진 성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소심하게 물개박수를 쳤다. 이제는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혼쭐을 내기 시작하는 성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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