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전 간단한 설명 |
1. 다니엘의 작 중 이름은 강의건입니다. 조선시대에 다니엘이면...의금부에 끌려가서 곤장맞아요 때찌때찌 2. 성의원이란 관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궁궐의 병원인 내의원에서 따온 이름이니 그렇게 알아주세요! |
성균관 양아치_00
w.서화
달빛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시각, 반궁이라 불리우는 성균관의 동쪽 문으로 작은 발걸음이 향했다. 연분홍빛 쓰개치마가 얼굴을 가려 그 형태를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고운 자태는 숨길 수 없었다. 은빛 물결과 옅게 어우러지는 남색 비단 치마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만이 저잣거리를 메꿨다. 여자의 하얀 손이 치맛자락을 사뿐히 집어 올리자 그 소리마저 사라진 공간은 저 멀리 홀로 빛나는 기방의 시끌벅적한 소리로 채워졌다.
몇 발자국 더 나아가자 남녀의 웃음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술에 잔뜩 취해 옆구리에 기생들을 한 명씩 끼고 나오는 남정네들에 나는 느슨해진 쓰개치마를 깊게 감싸 낯을 가려냈다. 그 탓에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저 사람들에게 붙잡히느니 이 방도가 훨배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멍청했음을 확인 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좌측 시야가 막혀버린 탓에 급히 나오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꽤 세게 부딪혔던 것인지 내 손에 들려있던 보따리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으며 꽁꽁 묶어놓았던 매듭마저 풀려 안의 내용물들이 튀어나와 버렸다. 급히 허리를 숙여 물건들을 챙겨 들며 흘깃 본 남자의 도포는 내 치마와 같은 빛깔의 남색 비단이었다. 한 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도포에 난 입술을 꾹 깨물며 머리를 조아렸다.
"ㅅ,송구합니다, 나으리."
"아닙니다. 양반 댁 여식 분께서 반촌까진 어인 일로."
보통 천민과 손 끝 하나 스치기라도 하면 질색 팔색을 하는 양반들과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꽤나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남자는 내가 미처 줍지 못한 약재 봉지를 주워들어 내게 건네며 말했다.
"양반이라뇨. 가당치않습니다. 전 그저 천한,"
"천하다 하기엔 두르고 계신 치마가 상당히 고와 보입니다."
"아.."
치마는 고울 수밖에 없었다. 궁궐에서 만들어진 옷이 곱지 않다면 조선 팔도 그 어느 옷이 곱겠는가. 한낱 의녀라지만 이 또한 궁궐의 사람이기에 고운 옷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야 궁궐에서 지내며 살같이 지니던 옷이라 익숙해 인지를 못 하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겐 당연지사 양반 댁 여식의 옷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그제야 남자의 다정한 말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치마가 아니었다면 반응은 상반되었겠지. 나는 새어나오는 씁쓸한 미소를 겨우 삼켜내며 남자에게 답했다.
"..치마는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가던 길 가시지요."
보따리를 꽉 움켜쥐며 남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던 몸뚱아리를 틀었다. 별 대답 없이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이라 예상과 달리 이어지는 소리는 여전히 다정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저야 코앞인 반궁으로 들어가면 된다지만, 낭자는 갈 길이 먼 것 같은데 먼저 가시지요. 그게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반궁? 조선에서 반궁이라 칭할 곳은 성균관 뿐 이었다. 그렇다면 내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이 남자는 성균관 유생이라도 되는 것일까. 허나 남자가 빠져 나온 곳은 기방이었다. 유생과 기방이라. 참으로 이질적인 두 존재였지만 어릴 적 반촌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리 어색한 두 부류도 아니었다.
"혹, 성균관 유생이십니까."
"제 신원만 알고 가시려는 것입니까."
"예?"
"성함이 어려우시다면 어느 댁 여식이신지라도 알려주시지요. 그 뒤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쓰개치마 사이로 흘깃 본 남자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예쁘게 올라간 그 입꼬리는 흡사 구미호 마냥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 미소에 넋이 나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쑥스러운 듯 제 갓을 매만지며 헛기침을 내보였다.
"큼, 제 얼굴에 뭐라도 묻은 겝니까."
"아, 아니요. 송구합니다."
"송구할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낭자는 알려주실 생각이 없으신가봅니다."
"..전 그저 반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일 뿐입니다. 나으리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귀한 여식이 아니니 질문을 거두어주시지요."
"..."
"갈 길이 구만리인지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구만리는 무슨. 내 목적지도 그와 같은 반궁이었지만 지금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벙찐 남자를 뒤로 한 채 성균관이 아닌 다른 쪽으로 향했다. 조용한 골목 사이로 몸을 숨기자 성균관으로 향하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을 쯤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쉴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저를 놀리듯 골목을 비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
이튿날, 해가 밝고 북소리가 세 번 울리자 식사를 마친 유생들이 명륜당으로 모여 들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자 대제학이 뒷짐을 진 채 명륜당의 앞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전에 이야기가 끝나 대제학 어른의 뒤를 쫓아가자 당 안의 모든 유생들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노비를 제외한 여인은 발 끝 하나 들이지 못 하는 이 성균관에 웬 비단 옷을 입은 여인네라니. 유생들의 눈이 땡그래질 만한 이슈거리임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관심에 익숙지 않은 나는 괜히 저고리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대제학 어른의 입이 열리길 잠자코 기다렸다.
“경연 시작 전에, 반궁에 새 손님이 오셨다. 어명으로 궁에서 오신 분이니 무례하게 대하진 말거라.”
세상에 나올 적부터 충의예지신을 강요받아온 그들에게 말해봤자 무엇하나. 저들 스승의 말은 강물마냥 흘러 보내곤 나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유생들에 대제학 어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모습이 허구한 날 기방만 다니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비의 모습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여 씰룩이는 입꼬리를 애써 잡아당겼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웃음을 참아내는 모습을 발견하지 못 한 것인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를 바라보는 대제학 어른에 나 또한 같은 미소로 화답하며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앞으로 성균관의 의약을 맡게 된 내의녀 ㅇ,”
드르륵- 이름을 읊으려던 순간 명륜당의 문이 열리며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유생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자태였다. 어젯밤 달빛이 그윽한 기방 앞에서 마주한 그 남자였다.
"송구합니다. 소인 심신이 피로하여 늦잠을,"
유생치곤 껄렁한 모양새로 등장한 그는 저 마냥 바람에 나풀거리던 유건의 끈을 대충 매며 빈자리를 찾아 시선을 돌리다 한 곳에 꽂히고 말았다. 명륜당의 앞 쪽. 즉 내가 서 있는 곳이었다. 그의 기다란 눈매와 내 동그란 눈매가 마주한 순간, 아무 무늬 없던 그의 얼굴에 분홍빛의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끈이 매듭지어짐과 동시에 그의 입꼬리가 옅은 호선을 그리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다. 하찮은 의녀 복장을 보았음에도 그의 능글맞으면서도 다정한 미소는 어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지. 괜히 열이 오르는 듯한 느낌에 눈동자를 굴려보았지만 미소는 집요하게 날 따랐다.
*유건 : 유생들이 도포·창의에 쓰던 검은 베로 만든 실내용 관모
"..."
"쯧쯧, 자넨 언제쯤 제 시간에 올텐가. 아, 소개 마저 하시게."
대제학 어른의 꾸중에도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 벙글 이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싱숭생숭. 그 단어가 지금 내 마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단어였다. 난 그 마음을 애써 가려내며 소개를 마무리지었다.
“ㅇㅇㅇ입니다. 성의원은 반궁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니 불편한 곳이 계시면 찾아오시지요.”
*성의원 : 성균관 관리들과 유생들의 의약을 담당하는 관청
말의 끝마침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다들 환호성을 내지르는 반면, 한 마리의 학처럼 유유히 앉아있는 그가 유독 튀었지만 딱히 시선을 주진 않았다. 한 번 만 더 그 미소를 마주한다면 하얀 두 뺨이 붉은 빛을 띨 것 같았기에.
나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유생들을 뒤로 한 채 명륜당을 빠져나왔다. 제발 체통 좀 지키라며 호통을 치는 대제학 어른의 목소리와 마당을 뛰놀고 있는 강아지의 왈왈 거리는 소리가 한 때 어우러져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옅게 내리쬐는 햇빛 틈새로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든 성균관에서의 첫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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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글맞은 성균관 양아치 녤이 보고 싶어서 막 쓴 글이에요...ㅠㅠㅠㅠㅠㅠㅠ다녤 데뷔해ㅠㅠㅠㅠㅠ상황 설명은 다음화 쯤에서 자세히 해 드릴 예정입니당!!!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