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Bloody Romance
W.DKN
F.
“하나도 안 변했네, 여기.”
한참 동안 가게를 누비던 명수가 이제야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내며 소파에 앉았다. 얼그레이 두 잔을 들고 온 성규가 명수의 몫으로 한잔을 내밀고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검은색으로 도배한 코디하며, 불을 켜지 않아 주변이 꽤 어두침침한데도 콧등에 걸쳐진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변함없는 건 명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써 내민 얼그레이를 마실 생각도 않고 잠잠히 앉아있기만 하는 명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성규가 할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오라고 할 때까지 안 온다며. 성규의 말에 그제야 한 모금을 넘긴 명수가 능청스럽게 말을 받아친다. 네가 오라고 했잖아. 그런 명수의 태도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린 성규가 내가 언제, 하고 맞받아치자 성규 쪽으로 몸을 기울인 명수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입으로 말구, 가슴으로.”
신경질적으로 명수의 선글라스를 벗겨 낸 성규가 명수의 몸을 다시 반대편 쪽으로 튕기며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아 몰라,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너까지…. 테이블 위로 떨궈진 선글라스를 주워 낀 명수가 기스 났다며 투덜거리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어디서 지내게. 집도 없을 거 아냐.”
“집 있는데?”
네가 집은 무슨 집. 날이 서 있는 눈초리에 명수가 한 발짝 물러서며 눈길을 피했다. 아 제발, 좀. 이미 한국 온 거 인상 좀 펴지? 소파에 편히 앉아 다리를 꼬며 틱틱대는 명수가 영 아니꼬운 성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하긴, 한낮인 지금 시각에도 멀쩡히 잘 깨어있는 걸 보면 괜찮아 보이긴 했다. 한참을 말없이 눈만 감고 있는 성규를 바라보던 명수가 내려두었던 가방을 다시 짊어 매고 성규의 앞에 멈춰 섰다.
“어이, 사장님. 나 집도 있고 먹을 데도 있는데.”
“…….”
“돈 벌 데가 없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저 낯짝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겨우 맘을 추스른 성규가 차 키를 집어 들고는 먼저 걸음을 옮겨 출구로 향했다. 내일부터 출근해. 너무나도 손쉽게 얻은 대답에 명수가 정말이냐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되묻는다. 뭐해, 집 안가? 데려다 줄게. 가게 문을 나서는 성규의 뒷모습에 정신을 차린 명수가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라나왔다. 이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데.
“나 정말 내일부터 출근해도 돼?”
“너 그지잖아. 나라도 널 구원해줘야지.”
잠깐 고마울 뻔했는데 도로 취소해야겠다, 중얼거리는 명수를 향해 비식 웃어 보인 성규가 기어를 올렸다. 먼저 차에서 내린 성규의 코에서 새하얗게 번지던 콧김이 하늘 위로 흩어진다. 성규의 눈에 비친 건 그 흔한 엘리베이터 하나 없는, 낡고 오래된 빌라였다. 명수 뒤를 바짝 붙어 허름한 계단을 올라가다가 얼결에 낡은 창문 옆으로 거미줄이 잔뜩 널려있는 걸 본 성규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다. 3층의 끝자락, 둥그런 손잡이에 열쇠를 꽂아 넣어 돌리자 손쉽게 문이 열린다. 먼저 들어가라는 명수의 말에 천천히 발을 들인 성규가 매캐한 집안 공기에 또 한 번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데서 살 수 있겠냐?”
“어, 너와는 달리 난 야생적인 기질이 다분하거든.”
이런 데서도 살아보고, 저런 데서도 살아보는 거지. 속 좋은 말만 늘어놓는 명수는 무시한 채 방문 앞으로 걸어간 성규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식탁 위를 쓸어보더니 혀를 찼다. 가게에서부터 줄곧 성규의 눈치만 보던 명수가 가방을 조심스럽게 풀러 내렸다. 가구는? 내일 사려고. 너도 참 대책 없이 산다. 계속 이어지는 쓴소리에 지쳤는지 아무 대답도 않고 노트북 설치에 여념이 없는 명수의 어깨를 가볍게 누르고 일어난 성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뭐야, 가려구? 별다른 대꾸 없이 손만 설렁설렁 흔드는 성규의 뒷모습이, 한국을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본 성규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느 하나 변한 건 없었다. 한번 물면 안 놓는 미친개 김재규도, 그런 미친개한테 쫓기는 김성규도, 그리고 쫓을 수조차 없는 명수, 자기 자신도.
*
“너 결혼 준비는 잘 돼가고 있는 거냐?”
“…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는 고요하던 집안에 중엄한 목소리가 흐름을 깬다. 안 그래도 오늘 사부인이랑 차 한잔 하고 왔어요. 새아기 될 애가 어찌나 참하고 예쁘던지. 피식, 헛웃음이 터진다. 고실고실하던 밥알이 어느새 까끌까끌한 돌멩이가 되어 목구멍 안을 들쑤신다. 더부룩한 속을 이끌고 먼저 일어선 우현이 방을 향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우현의 손목을 붙든다.
“내일 웨딩드레스 보러 가는 거 안 잊었지?”
“…안 잊었어요.”
“이것저것 입혀보게 하구, 신사처럼 행동하구.”
사소한 것 하나까지 놓아주지 않는 탓에, 도리어 짜증만 내버린 우현이 성큼성큼 방으로 향했다. 점점 더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결혼식. 이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곳까지 와버렸다. 그냥 처음부터 세게 나갔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까? 방으로 들어온 우현이 질질 슬리퍼를 끌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결혼에 걸린 명예, 재산, 암묵적인 계약들. 우현이 손꼽을 수도 없을 만큼 큰 거액이 오가고, 그만큼의 이윤을 차지하기 위한 억지 어린 결혼. 잔뜩 깨진 유리조각 파편들이 심장으로 날아가 푹, 꽂힌다. 욱신거리는 온몸을 뒤로한 채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불쑥 떠오르는 하얀 얼굴, 붉은 입술, 붉은 머리…. 몸이 절로 움직였다. 뭐에 홀린 것 마냥 손을 뻗어 외투를 집어 들었다. 힐링, 힐링이 필요했다.
Bloody Romance
W.DKN
G.
“…….”
애초에 술을 먹고싶어 온 바가 아니였기에 우현은 라운지 바에 들어서자마자 성규를 찾았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배는 북적거리는 바(Bar)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던 우현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린다. 맞구나? 꼬맹이. 무언가를 칠한것 마냥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현이 건네받은 메뉴판을 도로 성규의 옆구리에 꽂아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가장 좋아하는걸로 골라요. 나름 진지한 발언임에도 풋, 하고 웃는 성규에 눈썹을 밀어 올린 우현이 입술을 내민다. 또 왜 웃는겁니까? 비웃는것도 정도껏 비웃어야지, 날이면 날마다 돌아오는 비웃음도 이제는 지겨웠다. 도리 짓 한 성규가 메뉴판을 스윽 훑더니 이내 턱, 덮는다. 난 오늘 와인이 끌리는데,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자 빙긋 웃은 성규가 잠깐만 기다리라며 반대편으로 사라진다.
무얼 고를까 하다가, 결국 제일 싼 값에 속하는 메독와인을 집어들었다. 뒤를 돌자마자 저 멀리 보이는 우현의 동그란 뒷통수를 바라보던 성규가 옆을 지나가는 진석에게 잔 두 개를 갖다줄 것을 부탁했다. 평소 꼭 껴입고 오던 수트는 집어던지고 편한 차림에 카디건 하나 달랑 걸치고 온 모습을 보고나니, 이제야 제법 꼬맹이 다웠다. 코르크 스크루(corkscrew)와 안주 몇개를 집어들고 우현에게로 다가가자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다. 겨우 메독이에요? 더 비싼거 마셔도 되는데. 하여튼 허세로는 어디에도 안 지지.
“사장님, 부탁하셨던 잔이요.”
“땡큐.”
무심코 성규와 우현 곁을 지나던 진석이 앞을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손에 쥐고있던 잔을 테이블에 얌전히 내려놓는다. 우현과 마주친 시선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선 진석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쫓던 성규가 코르크를 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님?”
“엉?”
“뭐야, 여기 사장이었어요?”
뽁. 물음과 동시에 쑥 빠진 코르크가 성규의 실수로 테이블 밑으로 굴러떨어진다. 아, 응. 역시나 건조하기 짝이없는 답변에 얼 빠진 표정의 우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왜 거짓말 한 건데요? 물음에 대답은 않고 우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성규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바닥에서 굴러다닐 마개를 잡기 위해 몸을 숙인다. 그러게, 일개 알바생이랑은 안 사귀어 줄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사장이라고 말할걸. 겉잡을 수 없는 꼬맹이다. 불쑥불쑥 튀어드는 행동과 말투가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새로운 기분이다. 잡았다, 손에 잡힌 코르크를 주워올리곤 자리에 앉아 와인병을 잡았다. 말없이 성규의 움직임을 쫓던 우현은 잔에 적당히 차오르는 붉은색의 와인이 성규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왜 왔어?”
이제는 공식질문이 되어버린 질문에 우현이 딸기 하나를 집어들며 웃었다. 힐링이 필요해서요. 힐링?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잔을 든 우현이 뒤따라 들려진 성규의 와인잔을 가볍게 치고는 성규의 잔 위를 둥글게 배회했다. 이런 데서 격식 차리지 마, 사람들이 비웃는다. 성규의 이죽거리는 소리에도 웃어넘긴 우현이 금세 한잔을 비운다. 아직도 목 넘김을 마치지 못한 성규의 모습을 쳐다보던 우현이 말을 꺼낸다. 있잖아요, 나 되게 뻔뻔한 놈이에요. 성규의 고개가 들린다. 남들은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 부사장직을 당장에라도 때려치고 싶구요. 반말 한 댔다가, 존댓말 한 댔다가 갈팡질팡 하는 건 내 주특기구요. 결혼할 여자랑 상견례까지 다 마쳐놓고선 지금 당장에라도 파혼하고 싶구요. 그리고…,
“나 좋아하지 말라고 해놓고선…,”
“…….”
지금은 그 말…, 후회 중이에요. 제 입으로 내뱉은 말에도 변화 하나 없는 표정에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나름 용기낸답시고 말한건데. 결국 나 차인 건가. 역시 한번 갖고 놀려고 그랬던걸까.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연달아 시끄럽게 울려퍼지던 댄스곡이 천천히 잦아가고 잔잔한 재즈곡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성규와 우현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러게 후회할 일은 뭣하러 해. 올곧게 서로를 향하는 눈빛의 잔재가 바로 밑 와인잔에 담긴 붉은 와인속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성규가 우현 쪽으로 걸어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쥔다.
“지금 말고, 확신이 생기면 다시 말해.”
“…쉽게 확신이 안 서면요?”
“여기 이 와인 있지?”
이제 막 두 잔을 따라낸 탓에, 아직도 병 입구에서 찰랑이는 와인소리가 들린다. 이걸 다 마셔도 확신이 안 서면, 그건 이미 네 맘속에 확신이 있어서야. 성규의 손길이 멀어진다. 말없이 와인 병을 노려보던 우현이 한참있다가 손을 뻗어 병을 잡았다. 저도 모르는 제 안의 확신을 찾기 위해 감싸쥔 병을 집어 들었다. 어쩌면 이미 답은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현은 두 눈을 꽉 감은 채 잔에 한가득 따라낸 와인을 목 뒤로 빠르게 삼켜냈다. 꼭 전하고 싶었다, 성규에게도, 저 자신에게도.
Say_
브금 혹시 신경쓰이실까봐 따로 묶었어요.. ^ㅠ^
그래두 제가 매 편마다 브금은 신경써서 고르고 있거든요~.. 아마 같이 들으시면 더 괜찮을거에요 ^^
조금 많이 늦었네요.. 송구스럽슴돠 ㅠㅠ 못난 제 탓이죠 으헝 무릎 꿇으시라면 꿇겠습니다..
아참, 원래 블로(블러디 로맨스)는 회원전용 글이었는데요 이제부터 비회원분들과도 함께가고자 회원전용을 풀까해요
다음 편은 이렇게 늦어지지 않도록 할게요 ㅠㅠ 분발해서 미리 써두어야 겠어요.. 추운데 독자분들 감기 조심하세요 ~
※암호닉은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 신청은 언제나 환영해요 ^_^ 제가 기억하는 모든 암호닉 분들이 끝까지 함께 가셨으면 좋겠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