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3부
11.
적막이 흘렀다. 그 애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앞에 앉은 종인이의 입술이 달싹이다가 이내 닫히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입이 바싹 마르는 듯, 혀로 입술을 축인다. 아무 대화가 없는 이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얼어붙은 듯 침울하게 가라앉아 내 숨을 죄어왔다. 답답하다. 이런 반응을 바라고 물은 게 아니었다. 너를 믿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너를 사랑하기에 억지로라도 너를 믿고 싶었다. 그 흔한 변명이라도. 그게 안 된다면 거짓말이라도 해준다면 그나마 이 답답한 가슴이 조금 나아질까 싶었다. 그런데 너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정말, 나에게 숨기는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
“…….”
잦은 한숨이 너의 입술에서 새어나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초조해져서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린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네 대답을 종용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처럼 아무 말 없이 그저 기다려야하는 걸까. 나는 모르겠다.
“…….”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아무것도 못한 채 그저 너를 바라보기만 했다. 1초가 10분처럼 느껴졌다. 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그 행동이 느린 화면처럼 내 눈에 담겨온다. 그 행동은 도대체 뭔데.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할 말.”
“…….”
“없어…?”
이 적막을 깨는 것이, 너였으면 하고 바랐는데.
“나한테 할 말 없냐고.”
“…….”
종인이는 끝내 대답이 없다. 밀려드는 허망함에 잠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너는 내가 아는 김종인이 아닌 것만 같다. 너무 낯설었다. 혹시 내게 숨기는 게 있냐고 물었을 때, 그런 게 어디 있냐며 한번 씩 웃어넘길 네 모습만 봐왔기 때문일까.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은 정말로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거라는 생각에 확신만 더해줄 뿐이었다. 그동안 만나오면서 이런 그 애의 모습은 처음이라서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경수야.”
그런데. 당황스러운 것 보단 낯설음과 실망감이 더 컸다. 누가 내게 돌이라도 얹어놓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있구나.”
“…경수야.”
“나한테 숨기는 거 있구나, 너.”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말 하기 싫어?”
“…….”
“…나한테 말 못할 일이야?”
선 채로 그 애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가만히 앉아있던 그 애가 고갤 들어 눈을 맞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눈동자가 너무 싫다. 그 애에게서 대답이 없는 이유를. 그 애를 너무 잘 아는 내가 싫다.
“…그런 거 없어.”
너는 거짓말 못하잖아, 종인아….
“…….”
“…….”
힘없는 목소리가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꼼짝없이 서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그 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원망 섞인 내 시선을 피하고 만다. 그렇게 멍하니 그 애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다퉈본지도 꽤 오래된 일인 것 같다. 예전엔 참 많이 싸웠었는데. 너도 울고, 나도 울고. 돌아서서 미안하다 사과하면서. 근데 이건 싸울 일이 아니잖아. 그치? 내말 맞지, 종인아. 나는 그저 네 대답을 바란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네가 거짓말까지 하면서 둘러댈 일이냐고. 그게….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멀뚱히 서 있는 내 팔을 그 애가 살짝 잡아당긴다.
“경수야….”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나 힘들어….”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너까지 이러지마.”
지친 목소리가 들리고, 잡고 있던 팔을 끌어당겨 나를 다시 앉히려는 그 애의 손을 뿌리쳤다.
“뭔데.”
“…….”
“네가 뭐 때문에 힘든 건데.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냐고 물었을 뿐이잖아 나는. 그거 묻는 것도 안 돼? 나는 너한테 물어볼 자격도 없어?”
“…경수야.”
“도대체 뭐가 널 그렇게 힘들게 하는데!”
“…….”
“좀 전엔 그런 거 없다며. 그런 거 없다더니 왜 또 힘들대?”
“…….”
“뭔데. 뭐가 널 그렇게 힘들게 해? 나한테 말 좀 해봐. 나한테 말 좀….”
“…….”
“말 좀…해 주면 안 돼?”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라고 그 애의 대답을 종용하는 것도 이젠 너무 힘들다.
“울지 마….”
자리에서 일어난 그 애가 내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얼굴에 닿는 그 손길은 여전한데.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왜 나는 네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울고 있는 걸까.
“나중에.”
“…….”
“나중에 말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 좀 마.”
내 얼굴을 붙잡고 있는 두 손을 잡아 내렸다. 그 애가 이러는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 애는, 나 때문에 힘든 것 같았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내가 너를 힘들게 하고, 그런 네가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악순환의 반복.
“…갈게.”
내게 말하는 그 지친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뒤돌아섰고,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 그 집을 나설 때까지도 너는 나를 잡지 않았다. 사실은, 네가 잡아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먼저 돌아서는 나를 따라 오기를 바랐을지도. 그런데, 나를 따라온 건 뒷모습만 보인 채 소파에 서 있는 너의 깊은 한숨뿐이었다.
一
“어쩐 일이야?”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준면이 형의 얼굴이 보인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몇 시간 전, 울며불며 김종인의 집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앞에 보이는 우리 집으로 가긴 죽기보다 더 싫었다. 게다가 그 상태로 혼자 있는 건 정말이지 끔찍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 애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형의 자취방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사실은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았다. 뭐, 김종인이 나를 찾지는 않겠지만. 그냥 내가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웬만하면 안 보이는 곳으로 숨는 편이 좋잖아. 아씨, 몰라. 너무 많이 울었더니 골이 울린다.
“어쩐 일이긴요. 형이 너어어무 보고 싶어서 왔죠.”
넉살 좋게 얼굴부터 들이밀었더니, 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문을 열어 준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빈손으론 올 수 없었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이것저것 집어넣은 탓에 제법 빵빵한 봉투를 형에게 내밀었다. 형이 그걸 받아들자마자, 꽁꽁 언 손 발을 녹이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밖엔 너무 추웠다. 가뜩이나 울어서 눈이며 코며 울긋불긋 꼴이 엉망인데 바람까지 찬 탓에 얼굴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밖에 많이 추워? 얼굴이 빨갛다.”
혹시나 울었던 걸 들킬까봐 아예 이불로 얼굴 속으로 얼굴을 꽁꽁 숨기며 대답했다.
“지인짜 추워요! 오는 길에 얼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나저나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그냥 와도 되는데….”
봉투 속에 담긴 이것저것을 꺼내는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제가 양심은 있잖아요.”
이불 속이라 내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내 말에 형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나저나, 내가 들어도 참 못났다. 내 목소리. 목소리도 못났는데 얼굴은 얼마나 못생겼을까. 오는 길에 액정에 비춰보았던 퉁퉁 부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 꼴을 마주 보고서도 아무 말 않던 형이 고맙다. 따지고 보면 나는 참 못된 동생인데. 힘들 때만 형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따스하게 내가 내민 손을 잡아주는 형이 참 고맙고 미안했다. 하지만, 김종인에게 받은 상처를 오세훈에게나, 박찬열에게나, 변백현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형도 종인이의 소개로 알게 된 사이지만 여하튼. 적어도 형은 입이 가볍지는 않은 사람이라 안심이 된단 말이야. 결국은 또 자기합리화다. 내가, 김종인 때문에 힘들 때 마다 형을 찾는 핑계를 대고 있잖아…. 아. 바보 같은 도경수. 등신도 이런 등신이 따로 없네. 못났다. 진짜, 못났다.
이불에 얼굴을 감춰놓고 있으면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큼큼 목을 가다듬고 얼굴만 쏙 빼내었다. 그러다, 마침 냉장고 문을 열던 형과 눈이 마주쳤다.
“저녁은 먹었어?”
형이 웃으며 묻는다.
“네. 먹었어요.”
그래서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참치를 왜 이렇게 큰 걸 사왔어...”
“어? 그거 저 먹을 건데?”
“이 큰 걸 너 혼자 다 먹을 거라고?”
“에이. 그건 아니죠. 형이랑 같이 먹어야죠!”
“밥 먹고 왔다면서, 먹을 거만 잔뜩 사왔네.”
“오늘만 날인가요, 뭐.”
“자고 갈 거야?”
냉장고에 캔 맥주를 차곡차곡 넣은 형이 나를 돌아보며 묻기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오늘만 자고 갈 건 아니에요. 아마, 며칠 간 신세 질 예정입니다. 라고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짧은 고갯짓에 담겨있었다. 형이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술도 마실 거야?”
“글쎄요.”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돼?”
“…안돼요.”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어?”
“…….”
“…….”
“부탁이에요, 형.”
내 말에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또 고맙고 미안해서 억지로 웃음 지었다.
“나, 세제 사러 갔다 올게.”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
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