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앞서 말하지만 나는 결단코 김종현에게 밉보일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건 우리 집에 남아 있는 치킨을 걸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김종현과 안면이 있는 사이냐? 그것도 아니다. 김종현과 나는 단지 같은과 선후배이지만 단 한번도 말을 튼 적은 없는 사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 김종현과 새내기인 나의 접점은 학교 행사가 아니면 있을 수가 없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김종현은 학교 행사란 행사는 모조리 불참한다고 그랬다. 강력한 인싸인 나와는 다르게 김종현은 강력한 아웃싸이더였다.
" 안녕.. 하세요.. "
" ..... "
강력한 아웃싸이더인 김종현과 1도 접점이 없는 내가 김종현에게 인사를 하는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빌어먹을 조별과제를 김종현과 같이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김재환이 같이 듣자고 한 교양 과목을 나 혼자만 수강을 한 게 문제였다. 김재환은 보기 좋게 수강신청을 광탈 당했으며 나는 닥쳐올 악연도 모른 채 광탈 당한 김재환을 놀리기에 바빴다. 지금와서 후회해봤자 뭐가 달라지겠냐마는. 같은과끼리 조별과제를 같이 하라는 건 지금 생각해도 존나 너무한 명령이었다.
" ..저, 그.. 제 이름은.. "
내가 원래 말을 더듬는 사람이 아닌데. 김종현의 낯선 눈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말이 절로 더듬어진다. 김종현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로 허리를 꼿꼿이 피고 내 얼굴만 보았다. 그러다 내 얼굴 닳겠어요 오빠. 마음 같아서는 평소 친구들에게 날리는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김종현의 얼굴을 보아 하니 드립을 치자마자 날 이상한 눈빛으로 볼 게 뻔하여 닥치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조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잘도 조별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 조는 벌써부터 망할 조짐이 보인다. 김종현의 동공이 데구르르 굴렀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건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김종현이 돌연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큼.
무슨 말이라도 하나 싶어 김종현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건 걍 내 착각이었다. 김종현은 순전히 목을 다듬은거였다. 가래라도 꼈나보다. 두어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니 강의가 끝났다는 교수님의 말에 부리나케 짐을 싸고 총총총 강의실을 빠져나간다. 아니, 쫌. 사람이 뭐 저래.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쓰지도 않은 연필과 지우개 노트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 ..오 대박인데. 그 형이랑 조별과제를 같이 한다고? "
ㅇㄷ. 카톡 하나를 보냈을 뿐인데 김재환은 저도 강의가 끝났다며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학교 근처 식당에 오면서 내내 표정이 굳어 있던 내 낌새를 눈치 챈 건지 김재환은 왜 그러냐며 닦달을 했고 결국에는 실토를 해버렸다. 김종현, 그 오빠와 같은 조가 되었다고.
" 응. 오늘 한마디도 안 하고 강의 끝나자마자 걍 강의실 나가더라. 나, 참. "
" 그 형, 그래도 착해. "
" 같은 김씨라고 지금 편 드냐? "
" 아니, 그건 아니고. 너는 그래서 그 형이랑 같은 조 돼서 싫어? "
뽁뽁. 괜히 티슈를 뽑았다. 김종현과 같은 조가 돼서 싫냐는 물음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 대답 없는 거 보니까 싫지는 않은가 보네. 야 그 형 착하다니까. 민현이 형 친구라서 내가 잘 알아. "
" 민현이 오빠? "
" 어. 둘이 자취하는데 몰랐어? "
황민현오빠. 이번 학기에 복학한 오빠였다. 큰 키와 잘생긴 외모 그리고 다정한 성격. 강력한 인싸 중 하나인 민현이 오빠와 김종현이 친하다고? 뜻밖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9월 개강을 하고 개강 총회 때 민현 오빠를 본 기억이 난다. 활발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하고 어두운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동기들과 나란히 가서 인사를 하니 눈이 없어질 정도로 웃어 주었다. 응 얘들아 안녕. 잘 부탁해. 그 이후로 동기들 사이에서 민현 오빠는 황제로 통했다. 걍 존나 멋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 때도 개강 총회에 김종현은 오지 않았다. 나는 김종현의 이름도 이번에 알았다. 교양 수업에 같은 과가 그 사람 밖에 없어서 알게 된 이름이었다.
" 아무튼. 종현이 형 착해. 몇 번 밥도 같이 먹었는데. "
" 야 너는 친구 나밖에 없다면서 은근 잘 논다. "
" 뭐야 질투해? "
" 뭐래. 이거나 먹어. "
질투는 뭔 질투. 사정없이 김재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고 물을 마셨다. 오늘 새로 안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김종현과 황민현은 친구.
황민현 = 핵인싸
김종현 = 핵인싸?
아니 그것보다.
그래서 우리 조별과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일주일에 두 번 들은 교양 시간마다 괴로워할 내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아, 벌써부터 끔찍.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학교에서 김종현을 보면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눈만 2초 정도 마주치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각자의 갈 길을 갔다. 김재환의 말을 들으면 사람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아니면 날 싫어하나. 설마 내가 하도 나대서 싫어하나. 그때였다. 교양 수업에 들어가려 하는데 반대편에서 김종현이 홀로 걸어오는 게 보인다. 검은색 반팔과 검은색 바지 그리고 검은색 신발과 검은색 모자. 검은색 성애자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번에 본 옷차림과 어떻게 같을 수가 있지.
김종현이 먼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김종현을 따라 눈치를 보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부터는 조별끼리 앉아야 한다는 지시가 강의실 칠판에 쓰여 있다. 힐끔 시선을 김종현 쪽으로 두었다. 김종현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조심 김종현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앉아 있는 김종현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 ..안녕하세요. "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면서 인사를 건넸지만 김종현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니, 이 사람 말하는 걸 본 사람이 있긴 해? 생각해 보면 종종 학교에서 마주치는 김종현은 검정 마스크를 쓰고 홀로 캠퍼스를 거닐었다. 이번에는 검정 마스크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같은 과 후배가 인사를 하는데 대답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순간 김종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김종현은 고개를 돌리고 입을 뻐끔거렸다.
" 하,핫.. "
? 내가 잘 못 들은 건가. 방금 김종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어 따위가 아닌 의태어였다. 김종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김종현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가 잘 못 들은 게 맞나 보다. 괜히 목 언저리를 긁었다.
" 저, 이제 저희도 조별과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
대답 대신 김종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당찬 고갯짓이 연거푸 지속되더니 이번에는 노트를 꺼내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슥, 슥. 김종현의 연필 움직임이 서서히 멈추었다. 김종현은 슬며시 노트를 내게 건네었다.
' 제가 조별과제 다 할게요 ^^ '
아, 이 사람은 정말 뭐지. 노트를 보고 내가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거 약간 그런건가. 싫어하는 사람과 말도 섞기 싫어서 일부러 말도 안 하고 과제도 그냥 자기가 도맡아서 하는 거. ..시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울화통이 차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인사는 가뿐히 무시했고 이제는 말도 섞지 않으려 한다. 물론 대화 한 번 나눠본 적 없지만 나는 꽤 분했다.
" 저기요. "
얼씨구. 이제는 아예 내가 말을 걸자 노트에 글씨를 끄적인다. 기가 차서 말을 하지 못하는 내 앞에 표정 변동 없이 노트를 내민다.
'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ㅎㅎ '
..... 나는 그냥 존나 할 말을 잃었다.
빌어먹을 어니부기는 날 싫어한다
" 잘 하고 왔어? "
"..안니.. "
민현은 힘없이 자취방에 들어서는 종현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에도 실패한 모양이다. 민현이 병장으로 군대에 있을 때부터 종현은 항상 전화로 민현에게 실패했다는 말을 전하곤 했다. 미녀나.. 실패해써. 유독 혀가 짧은 종현은 민현 같은 친한 사이인 친구가 아닌 이상 먼저 입을 여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종현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대학교의 3월을 쓸쓸하게 혼자서 보냈다. 민현의 제대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러던 찰나에, 종현은 여주를 보게 되었다. 3월 14일 화이트데이. 종현은 아직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 실패야? "
" ..응.. "
친구들에게 가득 둘러쌓여서 사탕을 주고 받으며 환히 웃던 여주의 얼굴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포켓몬스터 캐릭터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에게 첫 눈에 반한 적은 있어도 실직적인 사람에게 첫 눈에 반한 건 여주가 처음이었다. 종현은 잔뜩 풀이 죽은 채 울상을 지었다.
" 조별과제.. 용기 내써.. 내가 한다구 해써.. "
" 근데 뭐래? 여주가, 싫대? "
" 그냥..가써.. "
" 말로 했어? "
" ..안니? "
그럼 뭐로 말했는데? 설마, 수화했어? 민현은 고등학생 시절 종현이 떠올랐다. 그때도 종현은 혀가 짧았다. 짓궂은 아이들은 종현이 말을 할 때마다 웃으면서 손가락질을 했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종현은 그날 이후 수화교실을 다녔다. 다행히도 민현 덕에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은 멈추었지만 종현은 그 이후로 더욱 말을 아꼈다. 민현은 그저 그런 종현이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좋아하는 애가 생겨써 미녀나... 처음 제게 여주의 존재를 고백했을 때도 종현은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이야기했다. 혀 짧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함이 분명했다.
" ..노트. 여기에 적어서 보여줘써. "
" 종현아. "
" 응? "
" 용기 갖자 우리. "
" 응? "
" 안되겠다. 너 이러면 평생 혼자 살지도 몰라. "
뜨헉. 민현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종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진다. 반면에 민현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입꼬리를 끌어 당기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나만 믿어 친구야. 민현의 표정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부기 너무 귀여워서 그만..클리셰 가득한 글이구요
연재는 글쎄요...너무 막써서 지울지도 몰라욬ㅋㅋㅋㅋ그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목표는 쏠쏠2조 다 나오기인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