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김여주 는 박력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냐?"
"야 배진영, 그럼 자세히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 답답한 등신아, 그냥 존나 당당하게 무표정으로 밀어붙여!"
---
오늘은 야자도 없으니 집에가서 무슨 라면을 끓여먹을지, 내 머릿속은 오로지 그 생각 뿐이었다. 오랜만에 컵라면으로 달려봐? 아님 엄마가 세일한다고 잔뜩 사온 비빔면을 처리해? 종례 시간 내내 나름대로 신중하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래, 결정했어. 비빔면을 3개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3개만 끓여먹자. 저번처럼 4개 먹다가 배진영한테 꼽 먹지 말고 3개만 먹자고 다짐을 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긴 것 같은 종례가 끝나고 애들이 건성건성 인사를 하고 요란하게 일어났다.
야자를 안하는 날은 노는 날이지만 나도 예의상 교과서와 문제집 몇 권을 가방에 쑤셔넣으면서 교실을 나서려고 뒷문 쪽을 향했다. 안그래도 정신 나간 애들처럼 교실을 우르르 떠나는 애들 꽁무니에 붙어 나가고 있는데 누가 내 가방을 홱- 낚아채갔다.
"키도 작은게 가방에 책은 존나 많이 쑤셔넣고 다니네."
"......"
"집에 가져가봤자 공부도 안할거잖아? 아니야?"
"아니 왜 갑자기 시비를......"
갑자기 교실 뒷 문 밖에 기대고 있던 남자애 하나가 내 가방을 세게 낚아채서 팩트 폭력을 날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입으로 옹알거리면서 팩트는 폭격하고, 손은 분주하게 내 가방 안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면서 지퍼까지 닫아주기 시작했다. 얘 진짜 뭐야..? 완전.. 진짜로...
빡치게 만드네?
---
이미 내 머릿속에 라면은 물건너간지 오래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나에게 시비를 턴 뒤로 맛이 살짝 가버리는 나는 그대로 배진영의 집으로 향했다.
내 가방을 낚아채서 팩트폭력을 날린건 배진영 친구 박우진이라는건 알았다. 근데 배진영이랑 친구지 나랑 친구야?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릴 때부터 표정관리도 안되고 다혈질에 분노조절장애 의심까지 받은 내 성격에 이번 일을 눈 감아줄 수는 없다. 아까는 막상 팩트폭력을 당해서 당황해서 조용히 있었지만 박우진을 어떻게 조질지, 이제는 그 생각 뿐이었다.
"아 깜짝아.. 야 김여주 내가 너 아무리, 어? 10년 친구라해도 너가 도어락 따고 들어오지 말랬지."
"그래서 뭐, 지금 너도 나한테 불만 품고 시비터냐?"
"왜 나한테 지랄인데..."
"너, 박우진 그 돌.. 아니, 아무튼 걔랑 친구지?"
배진영 표정이 스멀스멀 변하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무슨 표정이야? 배진영이 초등학생 때 복도에서 오줌 싸던 표정인데 내가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거지. 배진영의 입이 오므라들고 앞머리를 한번 쓱 넘기더니 나와의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야 박우진 걔가 방금 나한테 뭔 짓을 한지 알아? 내가 진짜 존나 빡쳐서..."
"알겠어."
배진영 표정이 다시 스멀스멀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되게 당당하다는 듯이 미소를 짓더니 나중에는 혼자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이게 쌍으로 나를 엿맥이나? 배진영이랑은 10년동안 알아온 사이지만 박우진이라는 애라는 정말 초면인데 왜 시비야, 진짜?
---
여주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진영은 허둥지둥 자기 휴대폰을 꺼내서 박우진한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
"야, 박우진! 장하다, 장해!"
[무슨 개소리야, 배진영 알아듣게 좀 말해라.]
"김여주 가 너한테 빠졌어! 분명해, 너의 그 무뚝뚝한 상남자미에 반했다고!"
아까 자신이 학교에서 여주에게 한 행동이 옳았던 것인지 고민을 하느라 침대에 누워서 머리를 쥐어뜯던 우진에게 진영의 전화는 희소식이자,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우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주에게 했던 무뚝뚝하고 박력있었던 행동이 이상해서 못해먹겠다 싶었는데 그러던 찰나에 여주가 자신의 행동에 반했다니. 진영의 전화로 인해 자신감을 얻고 입에 미소를 머금는 우진이었다.
"야, 내 말이 맞지? 김여주 존나 단순해서 그런 상남자미에 반한다고."
[어, 반할 것 같긴 했는데 진짜 반했다니, 좀 놀랍네.]
괜히 무뚝뚝한 상남자처럼, 다 알았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우진이었다.
---
어제 밤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더니 예상대로 다음 날 아침까지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우산 써도 교복 어깨나 치마 분명 젖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일어날 때였다. 분명 현관에 있어야 할 우산 하나가 남아있지 않다. 내 우산, 내 우산! 우산에 발이 달릴 일도 없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저께 아빠가 회사에서 우산을 안가져오신게 생각났다. 아, 좆됐다.. 아침부터 뛰게 생겼다며 보슬보슬 내리는 비 사이로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5분거리니까 괜찮겠지.
근데, 나 누가 봐도 너무 찐따 루저같아. 아무리 뛰어도 5분 거리는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고 달리다 지쳐서 편의점 천막 아래서 잠깐 숨을 고르고 있는데 큰 그림자가 생겼다. 설마 추하게 뛰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구원해주러 온 훈남일까? 하는 생각을 갖고 고개를 들었지만 왜 박우진이 쳐다보고 있는걸까.
"야, 집에 우산도 없냐? 존나 골때리네."
"알바야? 신경 꺼."
"나랑 같이 쓰고 가던지. 집에 우산도 없으면서 말이 많아."
"아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아니다. 여기서 내가 튕겨봤자 좋을건 없지... 괜히 굴복하게 만드는 박우진의 기에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추하게 비 다 맞으며 뛰는 모습보다는 괜찮은 그림이 형성 될것이라고 믿고 천천히 발을 맞춰 걸으려고 했다. 근데, 아니 왜이렇게 빨리 걸어 얘는?
"야, 좀 작작 빨리 걷지?"
"너 다리가 짧은 거 아니야?"
"이런 미친.. 그래, 존나 맞는 말이긴 한데 나 허리 아파."
"가방 줘, 어제 그렇게 많이 들고 가니까 허리 아프지."
무슨 일인지, 밥을 잘못 먹은건지 일단 가방을 달라니까 순순히 넘겨주려고 했다. 이렇게 편히 등교를 하게 되는 거면 나야 존나 오예지? 가방을 주섬주섬 박우진의 한쪽 어깨에 걸쳐주고 있는데, 이 정신 나간 박우진이 무뚝뚝하게 지긋이 욕을 했다.
"아, 씨발 존나 무겁네... 지금 이걸 나더러 들고 가라고?"
"......"
존나 벙찌게 만드는 박우진의 태도 변화에 삶을 포기했다.
우산 접고 학교 들어가면 진짜 한판 뜬다고, 다짐을 하며 다시 가방을 돌려받아 드는 여주였다.
"야, 김여주 너 우진이랑 좀 친해진 것 같아. 맞지? 근데 이렇게 보니까 너네 미운정 든 것 같아. 그치?"
계속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는 배진영을 뒤로하고 종례 후 청소를 마무리 지으러 대걸레를 들고 여자화장실로 가는 길이었다. 저 앞에 박우진이 걸어오는데, 아 진짜 발 걸어서 넘어뜨리고만 싶었다. 그냥 재수없어, 재수없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나치려던 찰나 박우진이 말을 걸었다.
"김여주 너 지금 나 무시해?"
"그럼 뭐 안녕하세요 인사해야하냐?"
복도에서 신경전이 붙었다. 복도를 거닐던 다른 애들은 이게 일상이었다는 듯이 흘끗 보고만 지나갔다. 일주일 전부터 곰곰히 곱씹어도 갑자기 나타난 혜성처럼 박우진은 나를 왜이렇게 못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르겠다. 슬슬 나도 화가 끓어오르고 대걸레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박우진, 일주일 전부터 존나 거슬렸어. 왜 그러는데, 갑자기?"
"니가 지금 내가 존나 거슬린다고 했냐?"
"거슬리지, 어이가 없잖아! 네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 같았으면 그냥 나도 꾹 참고 서로를 위해 넘어갔을텐데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박우진이 날 도와준걸 바탕으로 깔고 시비를 턴다해도 기분은 안 좋았다. 언젠가는 이렇게 터뜨려야지, 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게 학교 복도라니. 사실 박우진이 남자라서 무서워서 참아온게 80% 이긴 했는데, 그랬는데. 나 지금... 쫄았냐?
"야, 김여주 그만하자. 미안해."
"왜 갑자기 사과하는데, 너 재수없어. 알아? 내 가방 들어주고 우산 씌워주고 아침에 밥 못먹었다고 하면 매점에서 뭐 사다주고, 왜 그러는건데."
"......"
"그렇게 도와줄거 다 도와주면서 입으로 시비는 왜 털어, 나 썅년 만들려고 하는거야? 이유가 뭔데."
박우진 표정이 굳어갔다. 남자랑 싸우기는 나도 처음이다. 물론 배진영이랑 작은 다툼은 있었지만 이렇게 소리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분도 안좋아져서 눈물이 맺힌채로 박우진의 답을 기다리는데 박우진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렇게 복도에 정적이 흐르고 박우진이 고개를 떨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배진영이 이렇게 하면 너가 좋아할거라고 그랬단말이야..."
"......"
"너가 내 행동이 기분 나쁘지 않고 마음에 들었다고, 진영이가 그래서 그랬어. 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역시 이건 내가 생각해도 아니었지..."
...... 나는 존나 할 말을 잃고 벙쪄 있었다. 신이시여, 박우진이 내뱉는 저 말이 실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