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Bloody Romance
W.DKN
I.
한참을 뒤척이던 우현의 몸에서 기어코 이불이 흘러내린다. 침대 끝에 대롱대롱 걸린 이불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잠잠하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슬그머니 눈이 뜨인다. 익숙지 않은 풍경이 깜빡인다. 화들짝 놀라 일어난 우현이 무심결에 제 옷부터 확인했다. 멀쩡히 꼭꼭 싸매져 있는 웃옷과 바지에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이 터진다. 끌어안은 이불을 천천히 걷어낸 우현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붕붕 뜬 머리를 꾹꾹 누르며 주변을 살피는 우현의 얼굴에 아직도 지워지지 못한 졸음이 내려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어둡지. 방 안이 어두컴컴한 게 아무래도 새벽인 듯싶었다.
“어….”
새벽이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빈틈없이 조여 있던 블라인드를 풀어내자마자 쨍한 햇살이 방문 가득히 쏟아진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상환판단력이 흐려 머리 굴러가는 속도가 형편없이 낮아 창문 앞에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갑자기 벌컥, 열린 방문에 한강 위로 지나다니는 수많은 차의 뒤꽁무니를 쫓던 우현의 시선이 등 뒤로 향한다.
“어, 일어났네….”
좁은 눈 새로 우현을 훑으며 하품을 하는 성규였다. 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뜬금없는 웃음이 터졌다. 평소 보던 깔끔한 모습이 아닌, 헐렁한 추리닝 바지에 큰 박스티, 잔뜩 부은 얼굴과 위로 틀어져 묶여있는 앞머리. 갑자기 실없이 웃는 우현에 벙해진 표정의 성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어디 아프냐? 우현이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미안해, 일찍 일어나서 미리 깨워주려고 했는데. 내가 원래 낮에 잠이 많거든.”
“괜찮아요.”
“직장 안 나가봐도 괜찮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품 섞인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난다. 저를 따라 졸졸 쫓아오는 우현을 소파에 앉힌 성규가 부엌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걱정이었다.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우현이 어딘가에 있을 성규를 향해 소리쳤다. 제 핸드폰 못 보셨어요? 봉지 따위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던 부엌에서 소음이 멈춘다. 응. 너 가게 올 때부터 안 들고 온 것 같던데? 그 말에 무언가가 스치듯 지나간다. 방을 나설 때 재킷을 집어 들었고 그 앞에 자리한 탁상 위에 놓인 네모 반듯한…. 망연자실한 표정의 우현이 손으로 제 얼굴을 덮는다. 소파 앞에 놓인 탁상 위 전자시계는 분명히 오후 세 시 이십일 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어두컴컴하던 방안과 다름없이 한 줄기 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거실은 여전히 한밤중인 것처럼 침침했다.
“불 켜도 되죠?”
“아, 어. 켜도 돼.”
어느새 집안 곳곳이 퍼진 커피냄새에 우현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 그리고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요? 이어지는 우현의 물음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주방에서부터 들려온다. 화장실은 저쪽, 나도 좀 씻고 올게. 한 손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반대편 방향으로 걸어가는 성규의 뒷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던 우현 또한 씻기 위해 성규가 가리킨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혼자 살기엔 버거워 보일 만큼 널따란 집이었다. 화장실은 모던스타일로 깔끔했고, 본디 손님용 화장실인지 수건 몇 개와 욕실 용품 몇 개를 제외하면 그냥 텅 빈 공간에 세면대 하나, 샤워부스 하나, 변기 하나 덜렁 놓인 것과 다를 것 없는, 무언가 허전한 화장실이었다. 차곡차곡 개어있는 수건 밑으로 보이는 새 칫솔을 집어 들어 포장지를 뜯어냈다. 하나 쓴다고 뭐라 하겠어, 하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새 치약도 집어 들었다.
“…….”
갑작스레 사무실 생각이 번뜩 떠올랐지만 이내 우현은 그 생각을 꼬깃꼬깃 접어 다시 깊숙한 곳에 푹 찔러 넣었다. 이미 늦은 거 오늘 하루 째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변명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토요일이라 어차피 퇴근도 이르고, 업무 또한 그다지 많지 않고.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결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멍을 때리던 우현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우현의 고개 또한 좌우로 흔들린다. 정신 차리자. 옷을 벗어 내리고 샤워 부스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새까맣게 잊고 있던 다른 기억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지금은 그 말…, 후회 중이에요.’
미쳤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얘길 꺼냈는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안 돌아가는 목을 억지로 돌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본 우현이, 그 너머, 너머로 씻고 있을 성규의 모습을 그렸다. 확신이 설 때 다시 말하라던 성규의 말을 따라 혼자 메독 와인을 단숨에 비워냈었다. 취하기 직전 든 생각은 역시나 성규의 얼굴뿐. 조금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잭 다니엘을 주문했다. 함께 나온 서비스 안주와 콜라엔 입조차 대지 않았고, 역시나 또 금세 한 병을 비워냈다. 아마 그때쯤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성규 앞에서의 우현은 평소의 남우현과는 조금 다른 남우현이었다. 그리고 그걸 느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떠오르는 붉은 머리칼은 그저 그 임팩트가 너무 커서, 라고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억지로 발길을 끊자마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너무나도 지겨워졌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그 술을 내어준 성규 때문이었다.
자기가 먼저 나 좋다고 해놓고선. 예상했던 대로 역시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성규를 좋아한다는 것. 조금은 유치하고, 틀에서 벗어난 감정이 우현의 가슴속에서 꼼지락거렸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확신은, 섰다.
*
“너도 커피 마실래?”
“네, 주세요.”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우현을 보고, 먼저 나와 있던 성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까 들고 나갔던 머그잔엔 아마도 새로 담겼을, 뜨거운 커피가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껴입어 그런지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은 우현이 의자를 빼 앉았다. 누가 바 업주 아니랄까봐 목재 소재의 바텐테이블이었다. 접시에 토스트를 담아 커피와 함께 가지고 온 성규가 우현의 앞에 놓아주었다.
“잼은 뭐로 할래? 딸기, 귤, 땅콩, 블루베리 있는,”
“저기요.”
“…응?”
성규의 손짓이 허공에서 멈춘다. 제가 생각하는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까 겁부터 난다. 언제 이렇게 나약해졌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무슨 할 말. 역시나 한걸음 물러서는 성규에 우현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 마르지 못한 물기가 어깨위로 투둑, 떨어진다. 멍하게 서 있는 성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로 올린 우현이 가라앉은 눈으로 성규의 눈으로 시선을 두며 자신의 손 또한 성규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심장은 거짓말을 안 하거든, 아니 못 하거든.”
“….”
“말 해봐. 난 당신 좋아해. 당신도 내가,”
“….”
“좋아?”
‘사람이 아니었어?’
난 당신 좋아해.
‘무, 무서워. 다가오지 마.’
지금은 그 말…, 후회 중이에요.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우현의 질문과는 다른 방향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안 돼, 너도 날 피할꺼잖아. 힘없이 우현의 손을 풀러 내린 성규가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를 피해 가려는 성규의 손목을 붙잡은 우현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기회는 한 번뿐인데,”
“…….”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어차피 다른 이들과 똑같을 거면서 이미 발랑 까발려진 제 맘을 굳이 확인하고자 하는 우현에게 괜스레 짜증이 났다. 엉뚱한 곳으로 화를 돌린 성규가 우현의 손목을 아프게 움켜쥐며 우현을 뒤로 거세게 밀었다. 순식간에 테이블에 등을 기대어 눕혀진 우현이 당황한 눈치로 성규의 손목을 풀러 내리려 하자 천천히 다가온 성규가 우현의 얼굴 가까이 상체를 숙이며 비죽 웃음을 흘렸다.
“너도 똑같아.”
“….”
“물론 내가 경솔했어. 그렇지만 넌,”
점점 저를 조여 오는 성규에 우현이 헛숨을 들이켰다.
“너만큼은 경솔하면 안 돼.”
휙 뒤로 빠지는 성규에 의해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쉰 우현이 콜록거렸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얼굴이 일순간 멀어질 때, 우현은 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묘하게 섞인 슬픔과 두려움을. 더 나누고 싶은 말이 많은데, 기침 때문에 차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후에 네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 내가 널 놓아주는 것에 무진장 고마워하게 될 거야.”
“…콜록, 그게 무슨.”
“너 나한테 꼬인 거야. 내가 널 꼬셨고, 넌 걸려든 거야. …너는,”
“….”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만 가. 제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방문으로 도망치듯 들어가버린 성규의 모습에 우현이 이제야 좀 잠잠해진 목을 쓸어내리며 굳게 닫힌 방문만 뚫어져라 보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차였다. 자꾸만 발에 채이는 돌부리처럼 무언가 껄끄럽지 못한 게 분명 숨어있었다. 입술을 꾹 짓누르며 뒤를 돌았다. 제 짐이 놓여있을 방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는 저를 놓아버린 남자를 다시 붙잡을 만큼 위인이 아니었다. 의자에 걸쳐져 있는 제 카디건과 코트를 잡아채듯 빼낸 우현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신발을 빠르게 꿰차고 현관을 나섰다. 쿵, 닫히는 문과 함께 우현의 귓가에 제 마음의 문이 쿵, 하고 닫히는 환청이 들렸다. 솔직했던 감정을 뒤덮은 배신감이 우현의 걸음이 닿는 자리에 끈적히 늘러붙었다.
Say_
조금 전개가 빠르죠ㅠㅠ? 너무 빨라서 이해 못하시는 부분도 있을꺼에요..
그에 대한 설명은 차차 연재하면서 하나씩 풀어놓기로 하구요 ㅠㅠ 빠르게 진도를 빼는 이유는
딱히 없어요... 그냥 제 못난 손을 탓해주세요 ㅠㅠ
저는 금같은 피드백을 무지무지 사랑한답니다! 늘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분들 너무 감사드리구
암호닉분들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한번 한분씩 인사드릴게요 ^ㅠ^ 늘 감사해요S2
아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신정 지나고 다음편 들고 올 것 같아요.. 기다려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