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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자란 이동혁의 이야기
- 이동혁의 순간들 -
너 무슨 병 있니?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김도영이, 무슨 아기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여자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안절부절을 못 하던 이민형이 엄지 손톱을 딱딱 물어뜯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참을 우리와 대치하듯 화장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애를 빤히 바라만 보던 이민형이, 얼을 잔뜩 타며 미안해, 하고 사과했다.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민형이 굳이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저 애를 의심해서? 그러기엔 여자애가 너무 의심스러웠고, 이민형의 말을 듣고 상처받을 만큼 나약해 빠진 애로 보이지도 않았다.
“알 거 다 아는 애 같은데 뭐. 너 진짜 병 있냐?”
“동혁아.”
“왜요. 저거 봐요. 쳐다보는 꼬라지 하고는… 야, 여기 네 어리광 받아 줄 사람 없어.”
“그만. 둘이 동갑인데 보자마자 물어 뜯니? 사이 좋으라고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싸우지는 마라.”
“어. 나 에이즈야. 정신병도 있어, 몽유병. 큰일이네? 내가 밤에 덮칠지도 모르는데, 그치. 근데 착각하진 마, 너 좋아서 덮치는 건 아닐 테니까.”
“허.......”
“.......”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난 저래서 계집애들이 싫어. 나를 똑바로 노려보는 눈이 곧 울 것 같았다. 구를 대로 굴렀다는 애가, 고작 이런 말 한 마디에 상처받은 척을 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중간에 서 있던 문태일이 여자애에게 다가가 속이 전부 들여다 보이는 기모노를 건네 받았다.
너도 그만. 아닌 거 다 아니까 괜히 동혁이랑 싸울 생각 말고 자라. 이제부터 네가 소파에서 자. 다른 애들은 아무데서나 잘 자니까, 알겠지?
달래듯이 말하는 문태일의 말에 토를 달려고 했지만, 내가 입을 떼자마자 그걸 눈치 챈 문태일이 여자애가 못 보게 재빨리 검지 손가락을 입에 붙이는 바람에 소파를 그냥 내주고 말았다. 이럴 때만 형이지. 이럴 때만 친절해. 낯이라도 가리는 것인지, 문태일은 방 안에 마구 펼쳐져 있던 ‘천국’의 흔적들을 모두 벽장 안으로 숨기고는 바닥까지 청소기로 빨아냈다. 그래 봤자 쟤도 이미 다 봤을 텐데. 괜히 심술이 났지만 또 애새끼 취급 당하기는 싫었다. 의연한 척 이불장에서 얇은 이불들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잠자리에서 잠을 청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 봐야 요 없이 덮는 이불 몇 장 뿐이었지만. 문득, 문태일에게 낯을 가린다고 했지만 왠지 나도 낯을 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이불은 좀 오바였나.
“저, 그거 한 장으로 돼요, 다들?”
“여름인데 뭐. 이불 없다고 얼어 죽나.”
말이 계속 헛나왔다. 어른스럽게 굴려고 했는데. 쟤만 보면 자꾸 말이 유치하게 나간다.
“너 말고.”
“괜찮아. 얘들 원래 땅바닥에서도 픽픽 잘 쓰러져 자.”
“맞아. 그게 그냥 쓰러질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아마 오늘은 픽픽 안 쓰러질 거라.”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김도영이 문태일 들으라는 듯 한 마디 했다. 맞는 말이지. 오늘은 이 말도 안 되는 일 때문에 다들 완전히 맨정신이니까. 문태일이 김도영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쉿.
김도영이 짜증스럽게 문태일의 손등을 탁 쳤다. 아 알았다고. 그러더니 오버액션으로 픽 쓰러지는 척을 했다. 아무리 형이라지만 진짜 성격 더러웠다. 나도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웠다. 김도영이 대신 짜증내 준 덕에 괜히 멋쩍은 기분이 되려고 해서, 누운 채로 팔등을 눈가에 올렸다. 이제 난 몰라, 하는 암묵의 표현 같은 거였다.
누군가 배 위로 살살 이불을 덮어 주는 게 느껴졌다. 팔꿈치에 닿은 까슬까슬한 이불이 잘게 떨렸다. 이민형이구나. 민형이 얼른 눕고. 이민형이 내게 이불을 덮어주는 모습을 보지 못한 문태일이 그새 잔소리했다. 이민형은 억울하지도 않은지, 얌전히 내 옆에 누우며 또 미안해요, 하고 말했다. 병신. 이렇게 나란히 누워서 다같이 잠드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나와 같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형들이 성인이 되고, 어느새 하나 둘 떠난 더 큰 형들을 대신해서 집을 비우기 시작한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딸깍, 전등 줄을 당기는 소리와 함께 팔등으로 가린 눈 위로 암전이 찾아왔다. 그제야 팔을 떼어냈다. 이제는 아무도 내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볼 수 없을 터였다.
암흑 속이었지만 좀처럼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문태일도 아니고, 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 저 끝에서 김도영이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와도 잠은 오지 않았다. 한참을 허공만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하필이면 내가 그 애랑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나와 같이, 숨죽여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고 있는. 낯선 공간의 암흑 속에서 아마도, 나보다는 좀 더 겁을 먹었을.
“야. 너 잠 안 오지.”
“…….”
“안 자는 거 아니까 대답 좀 해라.”
“…….”
“……아까 오바해서 미안하다고….”
“…….”
“우리도 병, 같은 거 없으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고.”
내일은 새벽 일찍 일을 따라가야 했다. 눈을 감았다.
출장이 끝나고 잠시 일을 쉬는 주간이 되면 문태일은 가벼운 심부름을 받아 하곤 했다. 위험한 데에 비하면 돈도 많이 받지 못하는 소일거리였다. 그의 선택이었지만, 잠시를 쉬지 못하고 자꾸 일만 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출장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엄청 벌어 오면서… 우리 중에 제일 수입이 짭짤한 사람인데 자기 몸 상해 가면서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어서였다.
인생 뭐 있냐고, 뭘 그렇게 열심히 버냐고 투정을 부리던 나에게 문태일은 다 쓸 데가 있는 거야, 라고 말했다.
아직 어려서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돈이야 당연히 쓸 데가 있지, 하고 망연히 생각했었다. 아마도 그 때 문태일이 말했던 건 음식이나 마약 따위를 사는 간단한 쓸 데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잔심부름은 내 전문이었으므로 공공연히 문태일을 따라갈 오늘의 조수는 나로 단정되는 분위기였다. 바보 같은 이민형과 나가서 헐레벌떡 도망이나 치는 일이나, 성격 더러운 김도영에게 하루 종일 말로 쥐어 터지는 것보다는 문태일을 도와주는 쪽이 백 번 나았다.
별 불만 없이 따라 나서려던 내게 조용히 손짓한 그는 그 동그란 눈으로 내 어깨 뒤편을 가리켰다.
“오늘은 형 혼자서도 가볍게! 클리어할 수 있는 일이니까 넌 그냥 집에 있어.”
“오늘 하는 거 인터럽트 아니에요? 망 봐줄 사람 필요하잖아.”
“아, 하루 이틀 해 보냐. 이 형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서 괜찮으니까 넌 두 개 뿐인 눈으로 집이나 잘 보고 있어라.”
놀리듯이 말하는 문태일의 표정은 아주 태평해 보였다. 내가 알기로는 분명 오늘 상당히 아슬아슬한 일을 하고 올 예정이었는데.
커다란 트렁크에 담겨 거래되는 상당한 양의 금품을 낚아채는 일이었다. 누군가 따라가서 망을 보는 건 당연하고, 혹여 불운에 대비해서 몸빵으로 상대방을 막아서야 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 형이 꿍꿍이가 있나… 그 얼굴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살펴보던 나는 문태일이 조용히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애가 집에서 나쁜 생각이라도 하면 어떡해. 지키고 있어야지.”
물론 내가 동의한 이유는 그보다도 그 애가 집에서 뭔가를 꿍쳐 놓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김도영은 이미 동이 트기도 전에 일을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형들이 나가 버린 집 안에는 나와, 여자애와, 얼굴에 까맣게 검댕을 바르고 있는 이민형만 남아 있었다. 피부가 새하얀 이민형은 일을 나가기 전이면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슨 거지처럼 숯검댕을 칠하곤 했다. 그 탓에 집에 들어와 얼굴을 깨끗이 닦아내고 나면 약한 피부가 울긋불긋 전부 상해 있었다. 검댕이 너무 많이 묻었는지 볼을 빡빡 문질러 대는 모습에, 살살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이민형은 입가 끝이 까맣게 물든 채로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매일 보던 광경인데도 그냥 계속 화장실 문가에 서 있었다. 거울에 대고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 본 이민형이 작은 한숨과 함께 옆에 내려 놓았던 비니를 머리에 눌러 썼다.
“난 그것만 쓰면 형이 무슨 이슬람 좀도둑 같더라.”
“……좀도둑은 맞지 뭐.”
시비조로 들릴 수 있는 말인데 기분 나빠 하지도 않고 씩 웃은 이민형이 검댕이 잔뜩 묻은 손으로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화장실을 나갔다. 그 손바닥만큼 끈이 까매진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은 이민형이 입모양으로 갔다 올게, 싸우지 마. 하고 말했다.
“뭐라고?”
괜히 못 알아들은 척을 했지만 내 서툰 수를 눈치챘는지, 그냥 웃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됐어, 나 간다.
아까부터 묘하게 외면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 이민형이 쿵 하고 대충 닫은 문이 문간에 부딪혀 다시 열렸다. 손잡이를 끌어다 닫고 야무지게 잠그며 이상한 생각을 했다. 문은 원래도 잠가 놓는데, 저 애가 혼자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짜증이 났다. 다시 잠금 장치를 풀어야 하나 고민하다 뒤를 돌아봤을 땐, 그 애가 언제 깼는지 소파에 앉은 채로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이민형이 문을 닫는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문은 왜 잠가? 왠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애의 눈이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이거 원래부터 잠가 놓는 거야.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이런 낡은 아파트에서 문 잠가 놓는 게 왜 이상해?”
“……아님 말고.”
또 짜증이 났다. 진짜 쟤는, 잘 해 주려고 해도 그러지를 못하게 해.
그 애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다는 건 신경질이 잔뜩 담긴 말투로 대꾸하고 한참 지나서 깨달았다.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형들이 오기까지는 최소한 반 나절을 이 애랑 둘이 보내야 했다. 끔찍했지만 소파 방향에서 들려오는 작은 꼬르륵 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도 말라 빠져서 멸치 같은데, 더 마르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 때 내가 용의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
못들은 척 하며 어젯밤에 문태일이 가져온 햇반을 한 개 꺼냈다. 아껴 먹어야 하는 식량인데, 평소에는 햇반 하나 가지고 형들이랑 싸우기까지 하는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이 없었다. 왜인지 아깝지가 않았다. 햇반을 쟁반이 약간 깨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그 때까지도 여자애는 소파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노란 조명 속에서 돌아가는 밥을 보고 있자니 무슨 아내 밥을 챙겨주는 남편이 된 것 같아서 혼자 헛기침을 했다.
숨막혀 죽을 것 같아.
괜히 분주히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찾았다. 제대로 밥을 챙겨먹고 사는 사람이 없어서 반찬이 변변찮았다. 그나마 태용이 형이라도 있었다면 상태가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일을 나간 지 일주일을 다 채워 가고 있었다. 쪽 팔려서 냉장고에 머리를 처박고 상태가 좋은 것들을 골라냈다.
삑,삑,삑. 전자레인지가 즉석 밥이 완성되었음을 알렸다. 락앤락 통에 담긴 열무김치의 냄새를 맡고 있다가 깜짝 놀라 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씨발… 이게 뭐야.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나 지금 긴장한 건가. 뭐 때문에?
입 속으로 욕을 중얼대며 주저앉아 김치 통을 바로 세웠다. 빨간 김치 국물이 노란 마룻바닥 위에서 스멀스멀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으차, 통을 들어 싱크대에 올려놓는 잠깐 새에도 국물이 떨어져 바닥에 빨간 원이 두어 개 더 생겼다. 지난 주에 새로 산 하얀 행주를 빨아 허리를 숙였을 때, 눈앞에 불쑥 낡은 걸레가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한 쪽 어깨로 넘긴 그 애가 바닥에 잔뜩 쏟은 김치 국물을 바깥쪽에서부터 훔쳐냈다. 싹싹 국물을 닦아내는 손길이 능숙했다. 무작정 얇은 행주를 적시고, 싱크대에 가서 짜고, 그러는 동안 또 바닥에 빨간 국물을 뚝뚝 흘려댔던 나와는 달랐다. 여자 애라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김치 국물 한 가운데에 올려놓았던 행주가 온통 빨갛게 될 때까지 그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화장실 앞에 걸레 있길래.”
“어?”
“행주 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하얀 거 물들면 아깝잖아.”
“아…….”
고마워, 하고 말하지 못했다. 형들이 매일 놀리던 그 철없는 성격이 고마울 때도 입을 막았다.
그런 말은 많이 해도 된댔는데. 눈치를 보며 입을 열까 말까 고민할수록 정적은 깊어 갔다. 이제 정말로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생각했을 때 그 애가 하던 모양을 따라 서투르게 가장자리부터 훔쳐내던 내 행주를 하얀 손이 빼앗아 갔다.
“이거는 아까우니까 너는 밥이나 먹으라니까. 내가 할게.”
나 먹으려던 거 아닌데….
“너 배 안 고파?”
“나는 원래 잘 안 먹어서 괜찮아. 밥 식겠다.”
“아니… 그럼 같이 먹자. 밥 더 있으니까, 반찬은 좀… 그렇지만.”
너에게 주려고 챙기던 거라고는 낯 뜨거워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왠지 아까처럼 못되게 말할 수도 없었다. 말끝이 기어들어갔다. 같이 먹자는 내 말에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본 하얀 얼굴은 조금 웃고 있었다.
그래, 같이 먹자.
방 안에 가득 찬 김치 냄새를 빼려고 창문을 열다가 박스에 쌓인 햇반을 본 그 애는 잠시 고민하다 내게 말했다.
“밥은 이거 하나만 먹자. 열무김치랑 시금치랑 고사리 있고 고추장도 있으니까 다 넣어서 비벼 먹으면 되겠다. 나물 싫어해?”
“아니.”
“잘 됐네. 나 비빔밥 진짜 잘 해.”
아마도, 남은 햇반이 세 개 뿐이어서 그러는 거겠지. 우리의 밥을 빼앗아 먹기는 싫은 것 같았다.
연변에서 먹는 비빔밥은 처음이었다. 있지도 않은 엄마 생각이 났다. 새빨간 빛으로 물들었던 행주를 짤 때마다 원래의 하얀색이 조금씩 되돌아왔다. 행주가 하얘지는 걸 보면서 문득, 생각보다 못 돼 처먹은 애는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됐다.”
커다란 보울이 없어서 임시로 낡은 냄비에 비빈 밥은 하나도 빨갛지 않았다. 김치 국물을 전부 쏟아 버려서, 대신 간장을 넣어서였다.
아무래도 군침 도는 빨간 빛과는 거리가 먼 밋밋한 색깔에 잠시 고민하던 그 애는 고추장을 더 넣으려고 했었다. 그걸 보고 나는 고추장 대신 간장을 더 넣으면 어떻냐고 그랬다. 김치 국물을 쏟은 건 나였으니까 한 번 부려 본 오지랖이었다. 매운 게 싫다는 내 말에 그 애는 눈을 반짝이며 나돈데, 했다.
나는 사실 매운 걸 되게 잘 먹는데, 고추장을 한 술 뜨면서 입에 침을 묻히는 얼굴이 왠지 초조해 보여서 해 본 말이었다. 잘 한 것 같다 싶어서 내심 뿌듯한 마음을 숨기고 숟가락을 들었다. 사실 밥은 되게 짰지만, 우리 둘 다 간 얘기는 하지 않았다. 맛있네, 하면서 그냥 다 먹어 버렸다.
형들이 와도 우리가 밥을 비벼 먹었는지 모를 만큼 냄비를 싹싹 비워 버렸다. 천국이 생각나지 않았다.
느지막이 집에 들어온 이민형은 오자마자 얼굴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볼 부분이 또 빨갰다. 누구 돌잔치에서 받아 온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멀찍이 떨어진 우리 둘을 보던 이민형이 한 쪽 입꼬리를 요상하게 올렸다. 이민형은 습관적으로 입가를 가만히 안 놔두곤 했다. 인중이 가려운지 입술을 동그랗게 굴리기도 했고 지금처럼 한쪽으로만 올리기도 했다. 얼굴 근육이 참 유연한 것 같았다. 수건을 대충 걸어둔 그가 나와 여자애를 번갈아 보며 다가왔다. 저 표정은 뭐야… 우리가 어색해 보여서 그런가.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네? 안 싸웠나 봐?”
그 반대였구나. 분위기가 좀 나아진 게 티 났을 줄은 몰랐어서 괜히 뭐라는 거야, 하며 딴청을 부렸다.
이 형도 은근 눈치 빠르다니까. 이민형은 내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씩 웃으며 구석으로 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천국을 한 번도 들이마시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팔목 부근에 주사기를 팍 꽂아 넣는 이민형이 보였다. 진짜 아프지도 않은가… 정맥이 어딘 줄 알고 꽂는 건지, 혈관을 제대로 잡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막 바늘을 쑤셔 박는 모양새를 볼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형들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이민형인지도 몰라.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흐아… 나도 모르게 내가 대신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나 보다. 이민형이 나를 뒤돌아보며 킥킥댔다. 액체를 끝까지 뿜어낸 주사기를 힘겹게 옆에 던진 그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마른 몸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눈을 감은 머리통이 제 어깨에 기대듯이 꺾어졌다. 매일 같이 함께했던 짓인데, 갑자기 그 모습이 생경하게 보였다.
흘깃 소파 방향을 살피자 그 애는 이민형의 모습을 못 본 건지 못 본 척 하는 건지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잔뜩 일어난 손끝을 뜯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잘 몰랐는데, 나이에 비해 손이 꽤 거친 것 같았다. 여우 굴에서 왔다면서 화려한 네일 하나가 없었다. 일을 많이 한 건가?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일 말고, 집안일 같은 일.
꽤 한참 동안을 나도, 그 애도 거칠어진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다 되고 나서야 김도영이 돌아왔다. 김도영은 항상 제일 일찍 나가서 제일 늦게 들어왔다. 물건을 받아다가 떼어 넘기고 나면 하루가 다 가곤 하는 것이었다. 아침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로 돌아온 김도영은 겉옷을 벗고 그대로 방 구석에 쓰러졌다.
형 뭐 안 먹어요? 이민형이 다가가 속삭였지만 김도영은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오늘 도영이 형 주려고 빵도 가져왔는데, 또 어디서 슬쩍해 온 소보로빵을 겉옷 주머니에서 꺼내 쥐고 있던 이민형이 빵을 내게 내밀었다. 너 먹을래? 너는? 나에 이어서 김여주까지 고개를 젓자 시무룩해진 이민형이 빵을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으려던 찰나였다.
“뭔데? 나 먹을래. 무슨 빵인데?”
장장 한 달 간의 출근을 마치고 돌아온 정재현이었다. 김도영이 들어오면서 문이 전부 닫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리 없이 들어서며 문 좀 고쳐야겠네, 하고 혀를 찬 정재현은 쓰러진 김도영과 빵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이민형, 그 모습을 구경하는 나를 보고 웃었다.
“여긴 그대로네.”
그리고 소파에 시선이 닿았을 때, 붉게 물든 입술이 더 짙은 호선을 그렸다.
“하나 빼고.”
이런 가난해 빠진 곳에서도 그 얼굴에서는 부내가 철철 넘쳐 흘렀다.
정재현은 그 인간이 아닌 것처럼 잘생긴 얼굴을 인정받아 비싸고 좋은 곳에서 일을 했다. 비싸고 좋은 곳. 그러니까, 선수라는 말이었다.
정재현의 입술은 매일 빨갰다. 원래도 꽤 붉은 색이었는데, 인위적인 화장품이 계속 묻어나고 묻어나서였다. 소보로빵을 받아 들며 웃던 정재현의 눈동자가 깜박임 한 번 없이 스르르 움직여 김여주를 향했다.
“안녕. 난 정재현이야.”
정말이지 일상적이고 밋밋한 인사였다. 저 형이 이제 미쳤나, 웬 여자애가 앉아 있는데도 태연자약하기 짝이 없었다.
“너는 뭐니?”
뭐니, 라니. ‘이름이’ 따위의 말이 빠진 것 같았지만 정재현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우리와 정재현의 재회 장면을 지켜보던 여자애가 천천히 일어났다.
“김여주요.”
더 묻지 않고 빵을 우물거리는 정재현을 보고 그 애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하네요.”
“음…… 좀 그렇지?”
“그래도 좀 독해야 짭짤하잖아요.”
“재밌는 애네. 넌 눈치가 좀 있구나.”
“옆에서 많이 봤거든요.”
어깨를 으쓱한 정재현이 소매에 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을 때에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재현은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향수는 독할수록 좋아, 그 역겨운 냄새만 버티면 돈을 쥐어주거든.”
“…….”
“코는 좀 마비될 것 같지만.”
장난스레 미간을 찡긋거린 정재현이 소파에 다가가 그 애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엉거주춤 서 있던 김여주의 허리를 감싸 안아 앉힌 그가 품평하듯 그 애를 위아래로 살폈다. 뭐 하는 거야, 변태 같은 새끼. 상체를 비틀어 김여주의 코앞에 얼굴을 붙인 정재현이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너는 향수 안 뿌렸네. 내가 이 향 제일 좋아하는데. 아무것도 안 뿌린 거.”
“…….”
나지막이 달싹이는 입술과 그 숨결에 뻣뻣해진 김여주가 상체를 최대한 뒤로 뺐다. 흐흥, 하고 웃은 정재현이 하얗게 질린 볼에 가볍게 뽀뽀하고 떨어졌다.
“장난이야.”
“…….”
“놀랐어?”
“……네, 좀.”
“아아, 미안. 습관이라.”
미친 놈. 여자애가 자기를 보고도 떨지 않는 게 거슬려서 일부러 한 짓이었다. 정재현은 자주 그랬다. 누가 거슬리면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티도 안 나게 살살 꼬여내서 자기에게 져 버리게 만들곤 했다.
“뱀 같아.”
정재현을 보며 중얼거리자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고 있던 눈이 내게 윙크했다.
넌 곰돌이 같아, 동혁아. 귀여운 곰돌이.
씨발, 맞는 말이었다. 나는 저 형에게 상대도 안 되는 그냥 곰 같은 새끼였다. 뱀과 곰. 우리는 그랬다. 서로 너무 달라서 부딪히지도 않는 그런 사이였다.
곰이 뱀 한 마리 쯤은 잡아먹을 수 있는 게 정상인데, 저 뱀은 덜 자란 곰이 잡기엔 너무 큰 구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