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알람 소리는 내 귓전을 때린다.이 지긋지긋한 3월의 새학기도 작년 이맘때와 같았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아침에 챙겨입을 옷 정도가 되겠다.
"엄청 부었네."
한 달이 좀 안 되게 지내온 이 방은 아직은 어색해서 몽롱한 아침 정신에 이따금씩 놀라곤 한다.
다음 날이 대학교 생활이 어색할 풋풋한 새내기들을 위해 학과마다 모여 친목 다짐을 하는, 이른바 새터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어젯밤을 새우며 해치운 치맥 때문인지 두 배로 부어보이는 얼굴을 쓸어 내리며 무겁게 내려앉은 아침 잠을 깨우며 창문을 열었다.
원래 아침이 이렇게 밝던가.
때마침 울린 벨소리에 이불 깊숙히 숨은 휴대전화를 꺼내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 신입생 오티 때 봤던 같은 과 민현이다.
"어 민현아."
"ㅇㅇ야, 여태 전화 안 받고 뭐 했어."
"아, 미안.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설마, 지금 집이야?"
"집이지. 아침 먹고 슬슬 나갈 건데, 넌?"
"....너 지금 몇 신 지는 알고?"
여느때 처럼 차분하고 나른할 줄 알았던 그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다급하게 느껴졌다. 수화기 너머로 싸한 분위기가 귓볼에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왼쪽 뺨과 어깨로 휴대전화를 끼워놓고 여유롭게 냉장고에서 달걀을 집고 있던 찰나, 본능 어디에선가 흠칫 하는 기분이 들어 황급히 휴대전화를 빼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12시라고?
한 손에 잡혀있던 달걀은 그대로 자취방 바닥에 헤딩했다.
이과생의 문과적 연애
01.
"택시!"
결국 머리도 못 감았다.
어젯밤 과식 후 찌든 몸을 이끌고 제대로 씻지도 못 했으며,만취한어제의 나는아직 주말에 깨어나는 시간인 오전 11시 30분으로 알람을 맞춘 뒤에뿌듯한 마음으로 잠 든 것 같았다.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온갖 육두문자를 사용하며 어제의 나를 폭력 했을 것이다. 몸도 마음도 매우 찝찝하다. 떨군 달걀은 수습조차 못했고.
모임 시간은 12시 정각이었다. 원래 일정은 10시 반까지 모여 신입생끼리 인원 체크를 해야 했으며, 인원 체크 후 11시부터 민현과 점심을 먹기로 했던 것이다. 오전 내내 저를 기다렸을 민현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사실 모임 자체는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 될 리 없었다. 1학년 필수 참여, 2,3학년까지 모여 선 후배간의 훈훈한모임 정도의 개념이리라예상했으나, 적어도 칠십 명 좀 안 되는 인원 중 당당하게 홀로 지각을 하고 만 것이니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달리는 차 안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아저씨 얼마나 남았을까요..?"
"충분히 빨리 달리는 거여. 십 분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
"아, 네.. 감사합니다."
겨우 잡은 택시 안에서 선크림 대충, 틴트 대충 바른 다음다양한 연령별 선배와 동기들이 있는 단체 카톡방에 연신 죄송하다는 둥, 10분 내로 도착한다는 둥 지각생의 구질구질한 사죄의 말을 보냈다.읽는 사람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으나답장은 민현에게서만 왔다.
[ㅋㅋㅋ 조심히 와]
단촐한 저 몇 마디가 왜 그렇게 고마운 지 모르겠다.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약속 장소인 학교 근처 카페까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평소에 운동 좀 해놓을 걸.
그대로 카페 유리문을 박차고 들어가 2층 라운지로 급히 올라갔다. 계단 난간을 부여잡고 저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무리의 몇 백개의 눈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제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니 그러니까 알람을 여덟시 반에 맞춰야 할 걸 열한 시 반으로 잘못 맞춰서..."
"푸흡, 켁."
"?"
어디선가 과일 스무디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처음 보는 빨간 머리가 순식간에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기침을 하다 말고 입가를 닦으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저...웃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웃으려던 마음이 없었으면 웃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정적 속에서 나지막이 터진 빨간 머리의 웃음 소리에 별안간 여기저기서 일제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구차한 변명이 웃겨서일 수도 있겠지만 저 소심한 빨간머리의 변명이 웃겨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연신 목례를 하다 빨간 머리의 옆자리를 보니 옆에 자리를 내어주며 작게 손을 올리고 있는 민현이 보였다. 그의 옆자리를 향해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무릎 위에 아이보리색 에코백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마자 민현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여태 근 20년을 살아오며 사과하는 것이 저의 체질은 아니었으나, 오늘 이것 저것 따질 처지는 못 되었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응, 아니 괜찮아."
살풋 웃어보이는 그의 눈초리가 왠지 모르게 꼼데가르송 마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닮은 꼴이 좀 귀엽다는 생각에 미처 느끼지 못 했던 제 오른쪽에 앉은 재수탱이, 빨간 머리의 존재를 되새기자 입가에 그려진 호선이 다시 일 직선이 되었다.
모임은 나름 순조롭게 진행 되었다. 과 대표도 오늘 대강 정해질 것도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뭔가 저번 오티 때 봤던 과 신입생 인원보다 두 배 가량 돼 보이는 사람 수다. 갑자기 초면의 사람들 대부분이 여자인 것도 이상하며, 날 동물원 원숭이 처럼 보던 초면의 그 빨간 머리는 당당히 내 옆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몽땅 화학과 선배들일 리는 없을 텐데,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번에 미처 하지 못 했던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 됐다. 옛날부터 쭉 느껴왔던 것이지만 내 이름 석 자는 몇 년을 동고동락 해도 어색한 법이었다.
잡 생각들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서서히 옆자리로 다가오는 순서에 손에 땀이 맺힐 것만도 같았다. 매년 하는 자기소개는 정말이지 어색하다.
"안녕하세요, 화공과 17학번 ㅇ,ㅇㅇ 입니다."
여기 저기서 웃음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 했다. 아차, 말 더듬어서 그런가, 아님 나만 모르는 몰카인가 싶었다. 혼자 얼 빠진 표정으로 눈치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민현이 티셔츠 끝자락을 살짝 당기며 말을 걸어왔다.
"ㅇㅇ야, 너 티셔츠 거꾸로 입은 거 같은데."
"뭐? 그걸 왜 이제 말 해!"
"나도 지금 알았어."
또 다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쟤 진짜 웃기다, 무슨 컨셉이냐. 등 사람 웃기는 데 재주 없다는 소리를 달고 살아왔건만 오늘 하루만큼은 원치 않은 웃음 유발자가 되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에 한 손으로 작게 부채질 하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민현이 건네준 숟가락으로 테이블에 있는 애꿎은 딸기 빙수의 옆구리를 막 찔렀다. 빙수를 먹으면 달궈진 얼굴이 좀 나아질까 싶어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느껴진 초근접으로 들리는 웃음 소리에 오른 쪽으로 고개를 들자 아까 저를 보고 스무디를 뿜었던 아까 그 빨간 머리가 여전히 저를 보며 실실 웃고 있다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눈을 피한다. 어쭈. 근데 진짜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티 날에 처음 앉았던 자리 그대로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며 한 시간을 버텨 왔던 지라 우연찮게 못 봤을 수도 있겠으나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쟤도 나 초면일 텐데, 그냥 어이가 없다.
웃느라 잠시 멈춰진 자기 소개는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빨간 머리부터 다시 시작 되었다. 어, 그런데 멘트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유아교육과 17학번 임영민입니다."
엥, 웬 유아교육과.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남초 과로 소문이 자자한 화학 공학과는 정말 말 그대로 남자 밭이다. 여태 공대 과의 남녀 비율이 그렇게 편파적이진 않았으나, 올해 들어 남녀 비율 파탄 난 과라고 소문 난 화학 공학과의 신입생 총 정원 40명 중 세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남자였다. 민현이 그 세 명 중 한 명인 저를 유달리 챙기는 것도 아마 그 이유일 것이다. 공대에서 적응 못 해 전과를 하거나 아예 자퇴를 해버리는 여자들도 다분히 있어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새내기 모임 때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결론이 났나보다. 결국 학교 내 대표 여초 과인 유아 교육과를 불러드린 것이다. 그 과도 그러한 사정이 있는 것이 총 정원 30명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여자였다. 사실상 저쪽 과가 더 심각하다.
그리고 그 대망의 유아 교육과의 청일점이 그 빨간 머리였던 것이다.
며칠 전 대숲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입학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유아교육과 17학번 빨간 머리, 청일점, 체크 남방 입은 분. 어디서 봤는데 너무 잘 생겼다, 여자친구가 있느냐 없느냐 등 여러 제보가 올라왔었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렇게 올라오나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그 대단하신 제보의 주인공이 제 옆에 있는 것이었다. 이걸 영광 스럽다고 해야 할 지.
"다들 박수!"
"영민아 우리 과 너무 잘 왔어."
"어쩜, 너랑 유아 교육과랑 너무 찰떡이야."
난리가 났다. 화공과부터 시작 된 자기소개 이래로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온 적이 없는데. 이번 신입 공대생들 중 그래도 황민현 정도면 최상급이라고 생각해왔다. 남자에 관심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어왔던 제게 오티가 끝난 후 연락처를 물어오는 민현에 살짝 흠칫하기까지 했으니까. 민현의 소개가 끝났을 때도 꽤나 반응이 좋았지만 빨간 머리는 가히 넘사벽이라고 표현 해도 될 법 했다.
남자들의 둔탁한 박수 소리보다 여자들의 얇은 손에서 터지는 날카로운 박수 소리가 홀을 채웠다. 빨간 머리의 또 다른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노골적으로 그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친한 척을 했다. 무리 중 가장 예쁘장하게 생긴 그녀의 스킨쉽이 영민의 어깨에 닿자 남녀를 불문한 날 선 시선이 둘에게로 향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빨간 머리가 보였다.
새내기 배움터? 아니다. 그냥 과팅 하려고 나름 열심히 꾸미고 나온 듯 해 보이는 여자와 남자들의 견제 섞인 눈빛들이 빨간 머리를 쏘아댔다. 잘들 노네, 아주.
다행히도 훈훈한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 나만 숨 막히던 모임이 끝이 났다.
과 대표를 정할 땐 추천을 받았다. 우리 과의 대표 후보 중 한 명인 민현은 누가 봐도 엄친아 이미지인 덕택으로 독보적인 표수를 받았고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를 받겠다고 했다. 물론 그를 추천 한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였다. 상대편 과대 후보는 예쁘장하게 생긴 친구 한 명과 빨간 머리였는데, 빨간 머리는 슬슬 눈치를 보다 별안간 손을 번쩍 들더니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다며 시켜만 달랬다. 마다할 이유가 없는 그의 동기들은 배시시 웃으며 박수를 쳤다. 옆에서 나도 느린 박수를 대충 따라 쳐줬다.
그 후로 반 시간 정도 지난 듯 했다. 모두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으며 1층 프론트 앞에선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는 풍경이 보였다. 더이상 구경 할 새도 없이 재빨리 눈으로 화장실을 찾았다. 거꾸로 입은 티셔츠 부터 어떻게 해야 했으니까. 가방을 챙기는 제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민현이 일어나는 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집 가게?"
"어, 가야지. 근데 그 전에 나 화장실 좀. 옷 좀 제대로 입고 오려고."
"너 점심은? 안 먹었잖아."
"못 먹었지."
"그럼 나 선배들 가는 거 보고 일 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밥 먹으러 가자."
또 웃는다. 입가에 남는 그만의 웃음이 있다.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끄덕이며 민현을 바라보는데 주변으로 달려드는 여자들 사이에 묻혀 또 저를 지긋이 바라보던 빨간 머리의 눈과 마주쳤다. 이번엔 눈을 또르르 굴리며 서서히 눈을 피한다. 진짜 왜 저러는 지 모르겠네.
옷을 다시 고쳐 입다가 한숨이 나왔다. 정신 없던 오늘 하루 때문에 뒤늦게 두통이 찾아오는 기분이었다. 동기들과 선배들에게도 못 할 짓이었고, 민현에게도 미안한 하루였다. 근처에서 조금 비싸기로 소문 난 식당에서 한 끼 제대로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앞으로 당분간 술과 거리를 두리라 마음을 먹고 화장실 문 앞을 나서는데 큰 그림자가 시야를 가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그 빨간 머리다.
"저기, 혹시 지금 바빠?"
"뭐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답이다.
빨간 머리의 눈이 동그랗게 변한 걸 보고 문맥에 안 맞는 대답인 걸 2초 정도 뒤에 깨달았다.
"아. 바쁘냐고. 친구랑 약속 있는데?"
"...아까 그 옆에 있던 친구?"
"응."
"둘이 친해?"
뭐가 이렇게 궁금한지. 화장실 앞에서 청문회 하는 기분이다.
"뭐.. 나름."
"아..."
답답한 건 예전부터 딱 질색이었다. 말을 하려다 마는 친구가 있으면 폭력을 행사 해서라도 들어야 했고, 느린 전철이나 버스 대신돈이 조금 더 들어도 KTX를 애용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 빨간 머리는 어쩌자고 앞길을 막고 서 있는 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민현이 기다릴 텐데. 그러고 보니 아까 저의 멍청한 모습을 보고 다양하게 웃던 모습이 다시 생각 났다. 조롱 당하는 기분이었는데. 얘는 1g 도 모르는 눈치다.
"..내가 딸기 빙수 사줄게,"
"뭐?"
"나랑도 친하게 지내자!"
수줍게 긴 팔을 뻗으며 악수를 청하는 빨간 머리였다. 둥그런 빨간 빛 정수리가 퍽이나 웃겼다.
*
처음 뵙겠습니다 때깔이에요 !
오래 전부터 여러 개의 훌륭한 작품들 눈팅만 해오다가 이렇게 용기 내어 끄적여봤습니다.
전개도 문맥도 엄청 서투른 게 제 눈에도 보이네요.. 차츰 나아지겠죠 ..?
사실 글 주변도 없고, 이생문연의 여주처럼 이과적 성향이 강한 저로선 굉장히 큰 도전이었답니다 ^^.. 헛헛
밖에 천둥 번개가 내리쳐요 제 글의 망조 일까요..?
앞으로도 많이 부족한 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ㅎㅎ.. 그래도 앞으로 성장하는 작가가 되어볼게요!
감기 조심하세요 (っ´ω`c)
+) 암호닉 이라고 하던가요..? 대환영 입니다! 마구 마구 받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