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내게 주세요
w.냥냥주먹
"여주씨는 퇴근 안 해?"
"아, 저는 일이 좀 남아서... 먼저 들어가세요!"
"응 그래, 비도 오는데 좀만 하고 들어가-."
현재시각 5시 34분, 하나둘씩 퇴근하는 팀원들을 배웅하다 혹시 몰라서 또 날씨어플을 켜봤다. 이렇게 많이 쏟아지는 걸 봐선 금방 그칠 것 같긴 한데, 시리는 이 비가 4시간 뒤에야 그칠 예정이란다.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에 비상용 우산 하나 쯤은 놓고 다녀도 좋았을걸... 뒤늦게 후회해봤자 결론은 강제 야근이다. 비가 그칠 때까지 그동안 밀린 업무나 마저 끝내고 가야지. 제발 시리의 예상이 맞기를 바라면서 조용하고 어두워진 사무실을 돌아봤다.
'째깍째깍'
요즘만큼 회사가 평화로울 때가 없다. 덕분에 늦은시각까지 야근하는 사람도 없고,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사무실을 꽉 채웠다.
"후..."
역시 이렇게 휑한 곳에서 혼자 집중을 하려니 아무것도 안 되네. 벌써 7시를 훌쩍 넘겼는데 빗줄기는 오히려 아까보다 더 두꺼워진 것 같았다. 나 오늘 집에 갈 순 있는 거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쪽으로 향했다. 비는 어마무시하게 쏟아지고 우산 없이 뛰어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뭐야. 왜 나한텐 아무도 우산 챙기라고 말 안 해줬어. 시발. 택시를 타자니 요금이 너무 많이 나올 것 같고 버스를 타자니 정류장이 너무 멀고, 지하철은... 싫다, 비오는 날 퇴근길의 지옥철은 정말 죽어도 싫다.
핸드폰을 들어 결국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성공 가능성이 1%에 가까워서 수단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어쨌든 뭐,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가능성이 2% 쯤으로 오르지 않았을까?
- 여보세요.
"승관아."
- 너네 회사까지 1시간 넘게 걸리는 거 알지? 차라리 야근을 하다가 집에 가라. 감기는 걸리지 말고, 나 피곤하니까.
아마 1%에서 더 떨어진 모양이다. 한숨을 땅이 꺼지도록 내쉬었다. 녀석은 내가 비올 때 데리러 올 사람이 필요할 때만 전화한다고 해서 내 번호를 '비와요' 라고 저장해놨다. 성공 가능성을 2% 씩이나 주다니, 내가 존나 후했다. 에이, 몰라. 일단 회사에 10시까지 있어보고 그 때도 비가 안 그치면 미친척하고 택시나 타야지.
"어쩔 수 없..."
"여기서 뭐합니까."
"엄마마아아악!!!!"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돌려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눈에 꽉차게 들어오는 남자. 분명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자마자 내 뒤에 서있는 웬 남자의 음성에 깜짝 놀라 괴성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괜찮습니까? 일어나 봐요."
"...팀장님."
"뭘 그렇게 놀랍니까. 나도 깜짝 놀랐네."
"가신 거 아니셨어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계속 팀장실에 있었는데요."
"근데 왜 불을 꺼놓고...!"
"야근할 땐 스탠드 하나 켜놓고 업무 봅니다, 원래."
"...놀랐잖아요."
#
늦은 퇴근을 하려 팀장실에서 나왔다가 눈에 들어오는 뒷모습을 한눈에 알아채고 절로 웃음이 번졌다. 창밖을 보며 우물쭈물, 표정을 보니 아마 우산이 없어서 야근을 할 모양이었다. 내 목소리의 놀라 주저앉는 김사원에 나도 같이 놀라 보기 흉하게 파닥거렸다. 새끼, 모양 빠지게. 퇴근 한 거 아니였냐며 못생긴, 그리고 조금 귀여운 표정으로 투정아닌 투정을 부리는 김사원을 쳐다보며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넥타이를 조여맸다. ...어렵네.
"사무실에 있을테니 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봐요."
"그... 집에 가시려던 거 아니셨어요?"
"예?"
"...가방..."
퇴근하려고 들고나왔던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김사원에 아차 싶었다. "아 가방 안에 처리할 서류가 좀 많아서... 나눠주려고." 나름 성공적인 순발력에 김사원이 고개를 끄덕이면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가방을 들어 그 안의 서류들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책상 마다 그 위에 서류들을 올려놓으며 김사원을 슬쩍 쳐다봤다. 별 의심은 안 하는 것 같네.
"그럼 나는 이만... 마저 업무 보러."
"아, 네!"
바삐 걸음을 재촉해 얼른 팀장실로 들어왔다. 언제부터 심장이 이렇게 소심해진 거야. 미치겠네, 진짜. 의자에 쓰러지듯 풀썩 앉으며 눈을 감았다. 바깥에서 아주 작게 들리는 김사원의 키보드 소리에 고개를 휘저었다. "제대로 미쳤구나..." 눈에 보이는 서류를 아무거나 막 쥐었다.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이 넓은 사무실에 나와 김사원 단 둘만 있다는 사실이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신기할정도로 지금 그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연히 일 하고 있겠지, 아님 또 초콜릿 먹고 있겠지. 스스로 답을 던져봐도 매한가지. 눈에 안 보이니 더 궁금하다. 아까 쳐놓은 블라인드가 너무나도 애속했다.
"김사원."
왜, 사람은 갑작스럽게 드는 충동에 이성이 질 때가 이따금씩 있다. 어느새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그 사람을 부르는 내 모습을 알아차렸을 땐,
"들어와서,"
"......"
"들어와서 해요."
그녀를 내게 주세요
"......"
조용한 팀장실, 팀장님의 책상은 내가 차지하고 있고 결재할 서류가 있다던 팀장님은 소파에 앉아 여러 서류들을 보고 계셨다. 내가 치는 키보드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지금, 비가 한시라도 빨리 그쳤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그득했다. 시리야, 10시까지 1시간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고.
"하암-..."
"......"
"...죄송합니다."
"피곤한 것 같은데 이만 가죠. 벌써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아, 괜찮아요! 하품이 습관이라... 하하."
"데려다 줄테니까,"
"......"
"비 맞을 걱정은 말고."
팀장님은 내 하품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만 가자며 들고 계시던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셨다. 비 그칠 때까지는 있어야 하는 내가 손사레를 치며 멋쩍게 웃으니 팀장님이 내 앞에 본인의 차키를 흔들어보였다. 우산 없어서 야근하는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아셨는지. 벌써 혼자 다 정리하시고 일어나서 얼른 퇴근 하자고 얼굴을 찡긋하시는 모습에 웃음이 번졌다. 다행히 비는 안 맞겠다.
[아직도 회사?]
[팀장님이 데려다 주신대. 지금 가는 중.]
[ㄷㅎ]
(다행)
[ㅇㅋ]
(오키)
[남자?]
[ㅇㅇ]
"행쇼."
[행쇼]
벌써 세 번째 타는 팀장님의 차에 나름 익숙하게 올라타고 아까 와있던 승관이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팀장이 남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장을 보낸 후 "행쇼." 작게 부승관의 답장을 예상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오는 [행쇼] 두 글자 답장에 웃음이 터졌다. 남자랑 있다는 문자만 보내면 부승관의 답장은 무조건 이 두글자다. 하여간...
"집이 어딥니까."
"그... 상근 고등학교 앞이라고 하면 아시려나?"
"가는 길이네요. 벨트 해요."
"아아, 네!"
집을 물은 후 차를 출발시킨 팀장님은 와이퍼를 키며 "비가 정말 많이 오네요." 비가 많이 온다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게요, 팀장님은 비오는 거 좋아하세요?"
"조용히 비만 오면 좋은데... 습하니까, 싫어요."
"아..."
"김사원은요."
"전 좋아해요! 빗소리도 좋고, 비 떨어지는 거 보고있는 것도 좋아해요."
차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열심히 구경했다. 정말 심심한 광경이지만 이상하게 봐도봐도 질리지 않고 계속 보고있는 게 좋다. "그래서 우산도 안 들고 다닙니까?" 웃음기 있는 팀장님의 말에도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작게 소리내서 웃었다.
새삼 생각해보니 팀장님이랑 이렇게 길게 대화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예전 같았으면 아마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진 절대 먼저 입을 열지도 않거니와,
'팀장님은 비오는 거 좋아하세요?'
'아뇨.'
이 두 문장으로 끝났을 상황이다. 매일같이 팀장실에 불려가서 호되게 혼나고, 어쩌다 둘이 같이 있게 되면 대화 한 마디 없는 어색한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바쁘던 그 때가 벌써 먼 옛날같지만 생각해보면 신기할 정도로 최근이었다. 팀장님과 둘이 이렇게 웃으면서 대화하는 게 얼마만인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아니었으면 정말 비 쫄딱 맞을 뻔 했어요."
"이거 챙기고."
"어우, 괜찮아요! 팀장님도 쓰셔야죠."
"난 어차피 집 주차장으로 들어가니까 안 써도 상관없어요. 들고 가요."
"...그럼, 내일 꼭 가져다 드릴게요."
집 앞에 도착해, 뒷자석에 있던 접이 우산을 하나 내게 건네는 팀장님께 손사레를 쳤다가 가져가라고 내 손에 직접 쥐어주시는 행동에 결국 우산을 쥐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내가 내리고 얼마 안 가 벌써 꽤 멀어진 팀장님 차를 끝까지 지켜보며 손을 흔들었다.
***
그래도 야근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