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학교는 무언가 여유로우면서도 곧 방학이 시작된다는 설레임에 잔뜩 들떠있었다.
경수는 지금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서 유인물을 가지고 교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무겁지? 내가 좀 들어줄까?"
"아.. 종인선배.."
종인은 경수가 들고있던 유인물의 절반을 가져가더니 먼저 경수의 반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경수는 고맙다며 싱긋
웃고는 종인을 따라 자신의 반으로 향했다.
"요즘 선도부 일은 좀 할만해?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 중에 건방지고 까진애들도 많던데."
"그냥.. 요즘 애들이 다 그렇죠 뭐.. 그래도 시험 끝나고 곧 방학이라고 학교에서 살짝 풀어진 것 같긴 해요.
선배는요? 수능준비 잘 돼요?"
"하하- 나는 뭐 3학년이라 선도부 활동도 안하고 뭐 내신이라고 해봤자 이미 거의 다 끝난걸 뭐. 수능준비... 하고는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네. 워낙 수능으로는 별로 대학 갈 생각이 없어서"
"그렇구나... 그래도 선배 잘 하잖아요. 경찰대학 가신다면서요- 수능공부도 열심히 하시고!! 건강관리도 철저히!!"
"푸훕- 왜 니가 더 나서서 걱정이야- 꼭 우리 엄마같네?? 건강관리는 나 말고 니가 좀 해야겠다- 팔뚝 봐-
빼빼 말라서 이게 뭐냐? 밥도 좀 챙겨먹고 귀찮다고 굶지말고. 알겠어?"
"헤헤- 알겠어요. 안그래도 요즘 주변에서 하도 이것저것 먹으라고 챙겨주는 사람이 많아서요. 선배 저 그럼 이제 다 왔으니까
들어가볼게요- 고마워요"
"그래- 다음에 또 보자"
종인이 유인물을 다시 경수의 손에 옮겨주곤 경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교실에 들어온 경수는 유인물을 교탁 위에 올려두고 파란 하늘과 운동장이 바로 보이는 창가 4번째 자리로 가 앉았다.
"요~ 반장~ 교무실 잘 다녀왔어? 뭐야- 또 운동장이나 보고 있냐?"
"시끄러 변백현. 그리고 의자 돌려 앉아서 내 얼굴 마주 보지마. 점심먹고 쏠린다. 웩-"
"야. 그게 친구한테 할 소리냐? 이래봬도 이 변백현님 옆 학교 여자애들한테 한 인기한다 이말씀이지~"
"걔네가 미쳤냐? 착각도 정도껏 해- 너 본거 아니고 나 본거거든?"
경수가 귓 속을 파고드는 백현의 말따위 가볍게 스킵하고 다시 창 밖의 운동장을 응시한다.
대략 이 시간이면 그 소년은 언제나 운동장 한 가운데에서 공을 가지고 뛰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있어도 반짝반짝 빛이 나서 경수는 늘 그 소년을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오늘도 그 소년은 여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강한 뙤약볕 아래에서 열심히 공을 차고 있었다.
한참을 혼자 떠들던 백현도 제풀에 지쳤는지 곧 조용해져선 경수와 함께 창 밖을 보다 무언갈 발견하곤 손을 흔들며
"야!!! 박도비!!! 박찬열!!! 어디보냐!!! 여기다 여기!!!"
멍하니 백현이 하던 행동을 지켜보던 경수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언제나 빛나는 그 소년이 자신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곧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뭐냐 변백!!! 치사하게 너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고!! 나 아이스크림 사줘!!"
그러자 백현은 그 소년, 아니 찬열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곤 비릿한 미소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찬열또한 피식 웃고선 다시 축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쟤... 알아?"
"응? 누구? 찬열이? 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군데? 같은동네 옆 집 살거든. 학교도 쭉 같이 다녔지.
흐흐... 근데 왜? 관심있냐? 천하의 됴쫄보가?"
"뭔 개소리야- 쓸데없는 소리 할거면 니 자리 가서 잠이나 자. 그리고 쫄보라고 부르지 말랬지? 확 옥수수 털어버린다?"
"하이고- 내가 이래 무서워서 살겠나-"
"개드립치지 말고. 근데 쟤... 축구부야...? 왜 맨날 날도 더운데 공만 차?"
"응. 축구부야. 이제 시험도 끝났고 곧 있으면 지역 축구 예선전 있다고 학교 끝나고 오후까지 연습하는 것 같던데?
아이고. 나는 도경수 무서워서 가서 낮잠이나 자야겠다"
그러고서 백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엎어졌고 경수는 턱을 괸 채 다시 운동장의 그 소년을 쳐다보다 조용히 중얼거린다.
"박.. 찬열이라고... 했던가..?"
수업이 끝나고 하루 해가 저물어가는 학교는 조용하다. 오늘부터 학교행사와 더불어 방학 일주일 전부턴 야자를 하지 않겠다는
학생들의 이상한 반발심으로 인해 야자를 없애버린 학교 덕분에 야자 대신 교무실에서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고 선도부 간부들과
회의를 마친 경수는 노을이 지려하는 하늘을 보며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름이라 낮엔 푹푹찌는 더위가 몰려왔지만 그래도 저녁이 되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경수의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교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경수는 문득 운동장을 바라보았고, 거기엔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는 찬열이 있었다.
경수는 물끄러미 찬열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언제부터 찬열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샌가
깨닫고보니 자신의 두 눈은 찬열의 뒤를 쫓고 있었다. 경수 자신도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자꾸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 감정이 단순한 동경인지 아니면 흔히들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았으니까.
경수히 멍하니 찬열만을 쳐다보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찬열 역시 하던 행동을 멈추고 경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이제 찬열은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경수를 향해 긴 다리만큼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선 경수의 앞에 섰다.
"안녕?"
"어?어.. 아..안녕.."
"난 박찬열이야"
"어?어..그래..나..난..도경수야.."
아니 지가 박찬열인걸 뭐 어쩌란말인가. 경수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저도모르게 통성명까지 하게 되었다.
"알아. 너 도경수인거. 너 선도부지? 아침마다 복장검사하는거 봤어. 그래서 말인데..."
경수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소년은 다짜고짜 자신에게 이름을 밝히더니 또 자신을 안다고 하질않나...
내 존재감이 그렇게 컸나... 생각하는 경수였다.
"나 3일 전에 넥타이 없는거 걸려서 이름적힌거 말야... 그거 지워주면 안돼?"
"으..응..?;;"
어머 얘 뭐니.
"너 2학년 7반 창가 4번째 자리에 앉아있지? 변백현이랑 같은반 아냐? 오늘 너 봤어. 점심시간에. 거기 앉아서 나 보는거."
참... 자세히도 봤다. 그 사이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 경수는 입만 열지 않으면 멋있는 눈 앞의 소년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동안 쌓아왔던 그 감정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이미지인 줄 몰랐다.
경수는 다시한 번 그 소년을 향한 감정이 변질되려는 것을 꾹 다잡고서 말했다.
"할말이... 그거라면... 알겠어- 지워줄게. 대신 다음부턴 걸리지마. 그 땐 안봐줄거니까."
경수가 쿨하게 뒤돌아서다말고 갑자기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찬열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 심부름 하고 받은 음료수인데, 그냥 너 줄게. 나 그런거 별로 안좋아해. 뙤약볕 아래에서
그렇게 맨날 뛰어다니면 일사병걸려."
할말만 마치고 차가운 도시 남자처럼 돌아서는 경수를 찬열이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날, 어김없이 경수는 교문 앞에서 선도부 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남들과 다른 기럭지로 인해
남들보다 머리하나 더 올라오는 찬열도 등교중.
"안녕 도경수"
경수는 쌩깠다. 쿨하게. 찬열의 인사따위.
그리고 찬열은 당황했다. 뭐지... 얘 나 좋아하는거 아니었어...? 아니면 왜 맨날 태양보다 더 뜨거운 눈빛으로
운동장에 있는 날 뚫어져라 응시했던거지...? 내 예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는데. 라면서.
찬열은 예쁜 애가 자꾸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봐주니까 단지 좋았을 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평소에 관심도 있었고.
그래서 적당히 튕긴건데. 아- 어제 그렇게 이상한걸로 말을 거는 게 아니었나...? 하긴, 변백현 말을 믿은 내가 병신이다.
괜히 예쁜이한테 미운털만 박히게 된 셈이다. 에잇. 그렇다면 정면승부다. 용기있는 자만이 사랑을 얻는 법이지.
좀만 기다려 예쁜아. 오빠가 간다. 흥- 하며 찬열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점심시간. 오늘도 경수는 습관처럼 창 밖의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라? 오늘은 그 반짝반짝 빛이나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자체발광 박찬열이
안보이는거다. 뭐지..? 살짝 당황한 경수는 아침에 내가 인사를 안받아줘서 삐진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타났다. 박찬열이. 운동장에서 체육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아닌, 경수의 교실 앞에서 교복을 단정히 걸친 채로.
"어이, 예쁜아! 도경수! 나 좀 볼까?"
어머. 저 미친 놈이 또 뭐래니.
경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운동장에 있어야 할 애가 자신의 교실 앞에 서 있는 것도 모자라서, 예쁜이란다. 그것도 저보고.
이건 변백현이 쫄보라고 부르는 것 만큼 경수에게 쇼크로 다가왔다.
그래서 경수는 짧은 다리를 바쁘게 놀려 성큼성큼 교실을 벗어나 찬열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곤 선도부 회의실로 향했다.
"왜 찾아왔어 오늘? 축구도 안하고? 혹시 내가 넥타이 걸린거 안지워줬을까봐 확인차 온거야?"
경수가 매서운 눈빛으로 찬열을 보며 다다다 쏘아붙였다. 그리고 찬열은 또 할말을 잃었다. 예쁜애가... 한 성깔 하는구나. 하고.
"아니 뭐... 겸사겸사 너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그런거라면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처음부터 니 이름같은거 적지도 않았으니까"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찬열이 얼빠진 눈빛으로 경수를 쳐다보자,
"애초부터 니 이름따위 적지도 않았다구. 다른 애들이랑 차별한다는 소리 들을까봐 적는 척 한거야. 그러니까 가봐."
그제서야 찬열이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곤, 점차 능글맞은 얼굴로 변한다.
"왜~? 왜 내 이름만 안 적었는데? 다른 애들은 다 적어놓고선. 왜 나만 봐줬어? 역시 너 나한테 관심있구나? 그치?"
그러자 경수의 얼굴이 붉게 물들더니 그런거 아니라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에~ 얼굴 빨개졌네 우리 경수? 오빠가 어제 처음으로 말 걸어줬는데 넥타이 얘기만 해대서 삐졌구나 우리 예쁜이가?"
"미..미친.. 그..그런거 아니거든..? 그리고 왜 내가 니 경수야? 오빠는 또 뭐고 예쁜이는 또 뭔데? 자꾸 개소리 할래?"
"에이~ 빼지마 이거 왜이래? 아마추어 같이? 너 점심시간마다 창문으로 나 지켜보는거 내가 다 봤는데? 모른 척 할래?
오빠가 우리 예쁜이 좀 놀려주려고 튕긴거가지고 지금 삐져서 이러는거야?"
"그..그런거 아니래두..!! 그..그리고!! 왜 쳐다보는거 알았으면서 모른 척 해?"
경수는 이상하게 억울했다. 그래서 괜히 어리광부리고 싶어졌다.
"그거야 니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물론 그렇게 하면 니가 관심을 좀 가질 줄 알았는데
변백현 말 들었다가 너 김종인한테 뺏기고 새될 것 같아서.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됐어?"
잠시 멍잡던 경수가, 조..종인선배가 왜?? 하고 생각하다가 당황한 듯 횡설수설한다.
"조..!종인선배랑은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일 뿐이야!! 오..오해하지마..!!"
"근데 그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 안할껄?"
"그..그럼 어떻게 해야 니가 믿을건데..?"
"문 잠그고 이리 와."
그렇게 순진한 도경수는 완전히 박찬열의 계략에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 교실에 없는 경수를 찾아 어슬렁 거리다 선도부실 앞을 지나가던 종인은 선도부실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소리에 두 주먹 불끈쥐며 누군가를 저주하는 목소리와 함께 이를 갈았다는 후문이.
계절감각따위 상실해줘야 ㅍㅍ의 완성이죠...
다른 글들의 번외는 천천히 보고서 어떤 것 부터 쓰면 좋을지 고민하고 들고올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