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인사 03 |
잠이 오지 않아 지호는 한참을 뒤척였다. 딱딱해서 등이 배기던 바닥도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불편하지만도 않았건만, 초저녁의 일 때문인지 지호는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훈이 나가버려 휑한 집안은 보일러를 틀어도 자꾸 춥게만 느껴졌다.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던 지호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슴푸레 창가에 스며드는 푸른 달빛으로 더듬어 보는 시계는 벌써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훈은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고 대체 무얼 하는 걸까. 다 제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며 지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지훈과 얼굴을 맞대며 저녁을 함께 한 초저녁, 지호가 집을 구해 나가겠다는 이야기로 시작된 사소한 엇갈림은 걷잡을 수 없는 오해를 낳았다. 지호는 하루하루 약해져만 갔다. 검사 결과를 선고 받은 그 날 이후, 되도록 지훈에게만은 제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집에서 나와 있는 날이 많아졌고 때로 갈 곳이 없는 날이면 카페에 앉아 하루 종일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지훈은 종종 카톡을 보냈고, 전화를 걸어왔다. 요즘 무슨 일 있느냐고, 걱정되니까 너무 늦지 말라고. 하지만 무어라 딱히 둘러 댈 말도 떠오르지 않았기에, 지호는 자판을 두드리다 그냥 지워버리기 일쑤였다. 무엇을 먹어도 잘 소화시키지 못하고 헛구역질과 구토를 하는 날이 잦아졌다. 새벽 녘 잠든 지훈의 발치에서 끙끙거리며 혼자 열을 삭히려 애쓰는 날이 늘었고, 하루가 다르게 까칠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며 우지호 많이 죽었네―라고 씁쓸히 내뱉기도 했다. 길을 걷다 바닥에 주저앉아 간헐적인 두통과 구역질에 힘겨워 하며, 점점 초라해지는 제 자신을 느끼던 지호는 지훈을 위해서라도 집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달빛이 파랗게 들어오는 지훈의 빈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호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 눈가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 우지호- 나 너 좋아하나봐. 미친놈 같냐? 크- 그렇기도 하겠지……. 그래. 미친놈이지 내가. 표지훈 미친놈. 미친 새끼…….
언제였더라. 언젠가 지훈이 저에게 술에 취해 한 고백이 떠올랐다. 지호는 잠시 숨을 멈추며 눈가에 흘러내린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그리고 그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닦아내도 소용없는 눈물이 다시금 터지고, 지호의 마른 어깨가 들썩이며 흐느꼈다. 지훈아-.... 지훈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타게 그 이름을 불러보아도, 지훈은 여기에 없다. 들을 수가 없었다. 지훈은 그저 제 고백이 지호를 난처하게 만들어 도망치듯 떠나는 것이라고 여기겠지.
지훈이 말했다. ‘우지호, 혹시나 내가-....’ 그래, 혹시나 내가 술 취해서 너한테 했던 말 때문이라면,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 잊어버려. 잊어버리고, 그냥 여기 있어……. 이미 단호하게 말하는 지호를 붙잡으려는 지훈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애쓰는 지훈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지호가 식탁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지 않자, 애가 탄 지훈이 고개를 숙여 지호를 마주보며 설득했다. 가지 말아. 내가 미친놈이었으니, 다 잊어버려도 좋으니 여기에 있어줘……. 지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고, 지훈의 눈동자에선 빛이 사라졌다. 고개를 숙인 지훈의 호흡에서 습함이 묻어났다. 등을 돌린 지훈이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허나, 등 뒤의 지호는 지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병신아…….’ 짧은 한마디밖엔 해줄 수가 없었다. 주먹을 꽉 쥔 채 말없이 서있던 지훈은 옷걸이에 걸린 외투를 들고 문 밖으로 사라졌고, 방안에 혼자 남겨진 지호는 이젠 다 식어버린 김치찌개와, 둘이서 저녁을 함께 했단 흔적인 밥그릇 두 개를 바라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우지호 나쁜 놈......’ 하고.
***
“표지훈!”
“.....어?... 재효형이다-”
[형, 오늘 나랑 술 마셔요.]
지훈의 호출에 재효는 일이 끝나고 약속했던 곳으로 달려왔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술을 마시자는 걸까- 의아해하며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자신을 보며, 안재효다! 재효형- 손뼉을 치며 웃는 지훈을 보니 벌써 술에 만취해있는 모양이었다. 재효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오- 내가 얘를 어떻게 해야 하냐.’ 술 마시자더니, 그냥 자기 뒤치다꺼리 해달라고 날 부른 모양이구만?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하자 저편에서 태일이 글라스를 닦으며 말을 건넨다. ‘어! 재효야,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자신의 가게에 들른 재효를 보며 반가이 말을 건네는 태일과는 다르게 그리 좋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재효는 인사를 받았다.
“어, 그래 태일아. 오랜만이다. 근데 표지훈 언제부터 이렇게 고꾸라져있냐?” “지훈이? 글쎄- 오늘 무슨 일 있나보던데.”
제게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연거푸 술만 들이키더니 끝내 저모양이 됐다며 태일은 혀를 찼다. ‘어때, 너도 한 잔 할래?’ 물어오는 태일의 말을 잠시 뒤로한 채 지훈에게 일으키려 다가갔다. ‘표지훈, 일어나. 들어가자. 너 많이 취했다.’ 점잖게 말한 재효가 지훈의 팔을 잡아끌며 일으키려고 하자 지훈이 됐다는 듯 팔을 빼냈다. ‘형- 앉아. 앉아서 한 잔 해요.’ 입을 연 지훈에게서 풍겨오는 진한 술 냄새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재효가 옆의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태일아, 나도 잔 좀 줘.’ 부탁한 재효가 어디 한번 지훈의 말이나 들어보려는 심산으로 턱을 괴고 지훈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무뚝뚝해 보이지만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재효의 말에 지훈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형- 나 좀 슬프다……. 응, 나 좀 많이 슬퍼요…….’ 재효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훈의 곁에 앉아 말없이 술을 따르고, 마셨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지훈에겐 위로가 되었는지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서 지훈 스스로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형- 나 괜히 고백했나봐.’ 응... 나 정말 괜히 말했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죽을 때까지 꽁꽁 묻어두고서 혼자만 간직할걸 그랬어요―. 술잔에 비친 지훈의 얼굴이 일렁거린다. 물끄러미 계속 잔을 바라보며 지훈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난 내가 그 새끼 좋아하는지도 몰랐어. 병신 같았지만 5년 동안이나-.”
“....”
“형은요? 형은 그랬던 적 없어요?”
“나야, 뭘- 알면서.”
“칫, 뭐가 알면서야…….”
왠 별 이야기를 다 한다는 표정인 재효의 반응에 지훈은 저도 제 자신이 웃긴지 씁쓸하게 웃었다. ‘형. 내가 존나 좋아하는 놈이 있어. 왜, 좀 놀랬어요? 년이 아니라 놈이라서?’ 쓰윽- 고개를 돌려 재효의 반응을 살피는 지훈에게 재효는 조용히 고개만 가로저었다. 재효가 술을 한 모금 들이키자 지훈의 이야기가 또 다시 이어졌다.
“그래, 좀 이상하면 어때. 난 그 놈이 진짜 진짜 좋아요. 나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었나봐. 야자 튀었다고 둘이 같이 담임한테 몽둥이찜질 당하던 그 시절부터-. 근데 몰랐거든. 난 몰랐어요.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내가 그 새끼한테 느끼는 이 감정이 대체 뭔가. 친구로써의 우정일까, 아님 약한 모습 보이는 그 자식을 향한 연민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
“....사랑인가....-했어요. 사랑인가…….”
“.....”
“언젠가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그 녀석을 보면 좋고, 기쁘고, 가슴이 뛰더라고요. 이상하게.”
도수가 꽤 높았던 술인지 조용히 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잔 째를 연달아 마셨을 즈음, 재효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피커를 통해 느릿하게 흘러나오던 재즈 음악이 멈추자,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 말을 잇던 지훈의 목소리도 끊겼다. 한잔을 더 비운 재효가 고개를 돌려 지훈을 바라봤을 때, 지훈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고개 숙인 지훈의 얼굴에서 눈물이 방울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툭, 투둑-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처럼 굵은 눈물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지고, 지훈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전해지는 떨림은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지훈은 입술을 깨물고 숨죽여 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일이 재효를 보며 이만 데리고 나가는 게 좋겠다는 눈짓을 했고, 재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날이 밝았다. 온 몸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난 지훈은 곧 그곳이 재효의 원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나 어제 또 집에 안 들어갔구나.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지훈은 재효가 한 일인지 구석에 곱게 개어져 있는 자신의 외투를 집어 들어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9시 47분. 만취한 다음날의 기상시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지호에게선 부재중 전화도, 카톡도 와 있지 않았다.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지훈은 뒷머리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재효는 이미 출근해버린건지 집안에 사람 인기척이란 들리지 않았고, 다만 지훈이 현관문을 나설 때 현관문 앞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이 전부였다.
[표지훈 완전 무거워. 끌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다. 표돼지-. 힘내라!]
지난 밤, 추한 모습을 많이 보였을 텐데도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재효가 고마워 지훈은 살풋 웃는 얼굴로 노란 포스트잇을 주머니에 함께 넣어 집을 나섰다.
***
날이 갈수록 한겨울의 추위는 더해만 갔다. 볼을 스쳐 지나는 찬바람에 지훈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서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가지런히 놓여있는 지호의 신발이 보였다. 고개를 들고 방안을 살피니 아직 이불이 개어져있지 않은 게 지호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살금살금 소리를 죽여 방안으로 걸어가자, 규칙적인 숨을 쌕쌕- 내뱉으며 평온한 얼굴로 잠든 지호가 보인다. 이게 얼마 만에 아침에 마주하는 것인지. 두툼한 겨울이불에 폭 파묻혀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눈을 감은 지호는 참 예뻤다. 지훈은 곁에 다가가 침대에 앉아 지호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겨우내 많이 자란 지호의 갈색 머리가 눈을 찌를 듯 길어져 있었다. 이젠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 그간 힘들었던 지호를 대변해주기라도 하는 듯 마른 얼굴에 턱 선이 날카롭게 도드라져 보였다. 붉었던 입술에 윤기는 사라지고 모진 겨울바람을 맞은 듯 건조하게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지호는 예뻤다. 표지훈에게 우지호는 어떠한 모습이어도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조용히 숨죽인 채 지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그 때,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던 지호의 가슴팍이 갑자기 헐떡이기 시작했고, 지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거칠어진 호흡의 지호를 바라보던 지훈이 깜짝 놀라 지호를 흔들어 깨웠다. ‘우지호! 우지호! 괜찮아?’ 이불을 걷어내고 지호를 흔들자 힘겹게 눈을 뜬 지호가 구석에 둔 자신의 빨간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야, 약 좀-’ 가쁜 숨을 힘겹게 몰아쉬는 지호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지훈은 재빨리 지호의 가방을 열어 약을 찾아냈다. 컵에 물을 따라 가져다주는 시간이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던지. 지호의 갑작스런 발작과도 같은 호소에 지훈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을 부들부들 떠는 지호에게 물과 함께 약을 건네주고 무사히 삼킬 때까지 지켜보았다. 약을 먹고 난 후에도 지호는 이불 속으로 쓰러지듯 누워 끙끙대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훈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지호야, 괜찮아?”
지훈의 물음에 대답하기도 힘들만큼 힘이든지 지호는 눈을 흐릿하게 뜨며 그저 지훈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지호가 걱정스러워 식은땀을 흘리는 지호의 머릿결을 쓸어주려 다가간 지훈의 손을 지호는 고개를 돌려 거절했다. 손을 내민 지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말없이 손을 거두었다. ‘그래, 귀찮게 안 할게. 쉬어... 많이 힘들면 나 불러도 돼-.’ 괜스레 웃어 보이는 지훈의 미소가 안타깝다. 지호도 그것을 알 턱이었다. 그런 지훈의 눈빛을 외면하는 지호도 힘겨워 보였다. 지호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지훈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십분, 이십분, 삼십분이 흐르자 약기운이 도는지 힘겹게 내쉬던 지호의 호흡도 조금은 편안해진 듯 했다. 다시 잠이 든 것 같은 지호의 몸 위로 밝은 겨울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
조용하게 잠이 든 지호를 보며 지훈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고, 곧 지호의 가방에서 나온 약의 정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어디가 안 좋은 걸까. 지호가 잠에서 깨어나면 물어보기로 생각했다. 지훈은 벽 뒤에 기대 앉아 잠이 든 지호를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지호의 곁으로 다가섰다. 지호의 곁에, 하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훈이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우지호, 나쁜 새끼야. 너 진짜 나빴다.”
“나, 너 많이 좋아한다. 아니, 아니........ 사랑하는 것 같아.”
“근데 내가 잘못했나봐. 내가 다 접을게- 그래. 없던 일로 하자.”
“우리 그 전처럼, 밤새 PC방에서 게임하고, 투닥거리고 욕하고 치고박아도 즐거웠던 그 때처럼……. 그때처럼만 지내자.”
“가지 마. 이 나쁜 놈아-....”
덤덤하던 지훈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고, 잠이 든 지호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렀다. |
***
얼마 전에 꽁꽁 언 빙판길에서 미끄러질뻔 했는데 허리를 조금 삐끗 한것같아요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허리때문에 오래 앉아있기가 힘이 드네요ㅠㅠㅠㅠ
또 추워진다던데 모두모두 감기조심 빙판길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