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박우진이 집 앞에 서있었다. 대부분의 날은 박우진이 초인종을 누를 때쯤에야 알람 삼아 눈을 뜨는 나지만, 오늘은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평소 문을 열어주던 엄마가 아닌 잔뜩 들떠 보이는 내 등장에 놀랐는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나를 보던 박우진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 오늘은 안 늦었네. " " 야, 사람이 때는 가릴 줄 알아야지. 수학여행 날에 늦는 사람이 어딨어? " " 말이나 못하면. " " 잠깐만 기다려봐. 나 짐만 가지고 다시 나올게. " 박우진은 무릎이 찢어진 검은색 스키니 진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반팔 티 차림이었다. 참 박우진스럽게도 입었네. 문득 이번 생일 때는 좀 화사한 색의 옷을 사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반응이려나. 괜시리 상상이 가 혼자 소리 나지 않게 들썩거리며 웃는 나를 보고 박우진은 이상한 표정을 했다. " 들떴냐? " " 내가 애냐! 초등학생도 아니고. " " 너 엄청 들떠 보이는데, 지금. " " ...아, 몰라. " 자기도 엄청 들떠 보이는구만. 학교까지 걸어가는 내내 박우진은 자기가 들떴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꾸 말을 걸었다. 핸드폰을 보고 웃기도 하고, 그러다 버스나 비행기에서 앉을 자리가 나와서 먼저 물었다. " 야, 너 남자애들하고 앉을 거지? " " ...아니? " " 응? 안 앉아? " " 나 너랑 앉으려고 했는데. " 근데 이건 또 뭔 소리야. 나야 낯도 가리고, 여자애들보다는 오래 같이 있던 박우진이 더 편해서 딱히 반에 유독 친한 여자친구는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중학교까지 같이 나온 은주 정도? 근데 박우진 주위에는 항상 친한 남자애들이 차고 넘쳤다. 박우진도 친한 남자애들하고만 뭉치면 별말은 안 하는데 행동이 온통 신났다는 걸 보여준다. 사람을 들어 올려서 돌린다든지 뭐 그런. 그래서 여태 현장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 때는 눈치껏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들 무리에 껴서 다녔었다. 이번에도 물론 그럴 생각이었고. 근데 왜... " 비행기는 자리 랜덤이니까 뭐 어쩔 수 없고. " " ......... " " 나 친구 없어. 같이 앉아줘. " 거짓말인 걸 다 아는데. 이렇게 말하는 박우진은 처음이라서, 이런 떨림에는 면역이 없어서. 버릇처럼 귀 끝이 붉게 물든 박우진이 좋아서.., 그냥,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좋으니까 같이 앉자, 이런 말들은 속으로 삼키면서. #남사친 박우진 버스에서 같이 앉자는 소리가 공항 갈 때 그 잠깐인 줄 알았더니, 박우진은 제주도 공항에 도착해 관광버스에 탔을 때도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앉아왔다. 의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보고 태연하게 같이 앉아준다며, 라는 말을 내뱉으며. 사실 수학여행이 기대만큼 그렇게 재미있는 편은 아니었다. 중학교 수학여행, 혹은 가족여행으로 한 번 씩은 와봤을 법한 장소들이었고, 애들 기대와는 다르게 걷는 코스들도 꽤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들뜨는 건, 역시 같이 있는 박우진 때문이겠지. 첫날 코스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오르니 점점 해가 지고 있었다. 옆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박우진을 생각 없이 쳐다보다 휙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 오는 박우진에 깜짝 놀라 어버버 거리다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 오늘 장기자랑 한다고 했나? 너 나가지? " " 어, 댄스부 애들. 우리는 이겨도 상금 없어." 그럴 만도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창밖으로 두자 박우진도 머지 않아 다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숙소까지 가는 데 꽤 걸리네. 천천히 달리는 버스 안이라 그런가, 점점 밀려오는 잠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창턱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기대 눈을 붙이려는 찰나 반대쪽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박우진이 앉아있는 쪽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눈을 감은 박우진이 있어서, 다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창에 비친 눈이 잔뜩 커져 있었다. " ...야, 박우진. 자? " 버스 앞을 살피자 다행히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잠들었거나 핸드폰을 하고 있었고, 기사님께서도 잠든 애들을 배려해 버스 무드등만을 켜놓은 상태라 뒷자리 쪽에 앉은 우리가 다른 애들에게 보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가까운 거 아닌가. 눈만 돌려도 금방 박우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감은 눈의 속눈썹과, 길고 곧게 뻗은 콧대, 꾹 다물린 입까지. 그러보 보니 박우진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반쯤 넋을 놓은 채로 박우진의 얼굴을 보고 있다 한순간에 팍 켜진 버스 불에 놀라서 몸을 들썩거렸다. 박우진이 움찔거리며 자세를 바꿔 기대고 있던 내 어깨에서 떨어져 반대쪽 팔걸이로 몸을 기댔다. 숙소 도착한 것 같은데. 하나둘씩 깨어나 앓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펴는 아이들에 박우진을 깨워야 할 것 같아 팔을 잡고 흔들었다. " 박우진. 숙소 도착했대. 일어나. " " ...아. " 낮게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뜬 박우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안전벨트를 푸르고 연거푸 마른 세수를 하던 박우진은 아이들이 전부 내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리자고 말했다. 버스에서 나오자 두리번거리는 은주와 눈이 마주쳤다. 찾았다는 듯이 웃으며 이쪽으로 뛰어온 은주는 아직 잠이 덜 깬 박우진에게 나를 데려간다고 말하고는 짐을 꺼내 배정받은 숙소로 올라갔다. " 저녁 먹고 바로 장기자랑이래. 빨리 먹고, 숙소에서 옷 갈아입고 나가자. " " 아, 응! " 방에 도착하자 조금 먼저 와 있던 애들이 짐을 받아 방 안쪽으로 넣어주고 바로 밥을 먹으러 숙소 식당으로 향했다. 애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밥을 먹고 허겁지겁 다시 숙소로 와 짐을 풀고 장기자랑 때 입으려고 애들과 산 옷을 집어 들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살 때 착용이 불가능한 옷이라고 해서 못 입어보고 샀었는데. 다행히 들어가긴 하는데, 이게... " 좀 짧나... " 짧고, 붙고. 부족한 몸매로는 차마 입기 민망한 옷차림이라 쭈뼛거리며 나갔더니 은주는 예쁘다며 장난치듯 어깨를 치며 웃었다. 노래가 좀 센 편이라 거기에 맞춰서 옷이고 화장이고 맞추다 보니 평소 하던 화장보다 조금 진해져 있었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이긴 하지만. 막 준비를 끝내자 천장에 달린 스피커로 집합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와서 팔짱을 낀 은주에게 이끌려 숙소 밖으로 나갔다. 아, 뭐 덮을 거라도 가져올걸. 넓은 홀에 도착하자 반별로 자리를 맞추고 앉은 애들이 보였다. 박우진은 아직 안 왔나? 박우진이 어디쯤에 앉았을지 찾아볼 심산으로 은주와 애들을 먼저 보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어깨를 두드려오는 손길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잔뜩 심기 불편한 얼굴인 박우진이 서 있었다. " 뭔데, 이건 또. " " 뭐가? " " ...옷. " 뭐가 이렇게 짧아. 박우진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는 다른 소리들에 묻혀 금방 허공으로 퍼졌다. 아, 지금 옷이... 그러고 보니 편하게 차려입은 애들 사이에서 유독 튀는 옷차림이긴 했다. 그래도 장기자랑 준비한 애들은 거의 이런 옷이던데. 그 정도로 짧은 편은 아니라고 말하려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에 박우진은 앞머리를 두어 번 만지더니 입고 있던 얇은 청자켓을 벗었다. 한 손에 청자켓을 들고 한 뼘 가까이 다가와 붙어 선 박우진의 입에서 새어 나온 한숨이 목 언저리에 그대로 닿아왔다. 곧이어 박우진의 두 팔이 허리를 감싸듯이 둘렀고, 박우진의 팔이 스친 부근에 청자켓이 감겼다. 다시 한 발자국 떨어져 청자켓의 양 소매를 잡고 느슨하게 묶는 박우진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멋쩍은 듯 뒷목을 긁적거리며 우물쭈물 내뱉는 박우진이. " ...다 쳐다본다. " " ....... " " 그거, 하고 있어. " 일순간 홀의 불이 꺼졌다. 애들의 함성 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고, 무대 중앙 조명만 켜졌는지 어둠 속에서 박우진의 얼굴에 희미한 빛이 비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끄덕거리는 나를 보며 박우진은, 오랜만에 덧니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나 간다. 그리고는 곧장 무대 옆의 간이 대기문으로 향하는 박우진의 뒷모습이 불빛을 받아서 그런진 몰라도 유독, 유독 빛나 보였다. " 여주야! 여기! " 박우진의 뒷모습이 문 안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본 후에야 자리를 찾아갔다. 맨 끝에 앉아 나를 부르는 은주의 옆에 앉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 우리 차례 세 번째래. 첫 번째가 댄스부랬으니까, 이거 보고 바로 대기하러 가면... " 은주의 목소리는 머지않아 우렁차게 울리는 환호 소리에 묻혀 사그라들었다. 은주도 나도, 반사적으로 무대 쪽에 시선을 두었다. 일사불란하게 나오는 댄스부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박우진. 대형을 맞춰 선 댄스부 아이들에게 반응하는 아이들의 소리 사이로 큰 음악 소리가 스며들었다. 바로 시작되는 안무와, 박우진의 역동적인 움직임. " 어... " 박우진을 제외한 댄스부 애들 모두가 청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안무 중간중간에 겉옷을 잡는 안무가 있는 걸 보면 안무 상의 이유로 다 같이 맞춘 모양인데, 박우진만이 겉옷이 없는 반팔 차림이었다. 박우진이 허리에 감아준 소매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박우진이, 무대 위에서 부족해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다고 했던 게 떠오른다. 그게 중학교 때였나... 넋 놓고 무대를 보다 희미하게나마 박우진과 눈길이 부딪힌다. 우연인지, 박우진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환하게 웃는다. 무대로 향하는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 여주야, 대기하러 가자. " " 어, 어... " 이윽고 박우진의 무대가 끝이 난다. 은주의 따라 무대 옆쪽으로 가자 막 나오고 있는 댄스부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잔뜩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박우진과 시선이 얽혔다. 홀 가득 울리는 노래 탓에, 박우진은 입모양을 크게 움직이며 말을 건넨다. 허리에 감긴 청자켓을 검지로 가리키면서. ' 풀 지 말 고 올 라 가 ' 그리고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는다. 무대, 잘했다고 말해주려는 찰나에 은주에 손에 이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기하는 내내 박우진의 청자켓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애들하고 맞춘 옷이 있으니까 풀어야 하는 게 맞는데. 아까 풀지 말라고 했던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한참을 손을 댔다, 뗐다 고민하다 결국 느슨하게 묶여있던 소매를 푸르고 조금 더 조이듯이 묶고 순서가 되자 무대로 올라갔다. 실수하지만 않기를 바라며 외운 춤을 췄고, 내려와서는 애들하고 아무 자리나 앉은 탓에 박우진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하고 남은 무대를 봤다.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나간 팀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지 장기자랑은 금방 끝이 났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아이들 사이에 뒤섞여 쫓기듯 숙소로 올라간 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몇 분을 드러누워 애들과 뒹굴거리며 늦장을 부리고 있는데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주은이가 놀라며 말했다. " 대박, 남자애들 벌써 술 마신다는데? " " 진짜? 근데 어차피 쌤들도 안 잡을 것 같더라. "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으며 가방 위에 올려둔 박우진의 청자켓이 떠올랐다. 화장 지우기 전에 잠깐 나가서 주고 올까. 남자 숙소는 이보다 위층인 4층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박우진 숙소가 몇 호인지 물어보려는 심산으로 핸드폰을 들어 올리자 때마침 긴 진동이 울리며 전화가 왔음을 알렸다. ' 박우진 ' 마침 잘 됐다 싶어 신발을 끼워신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문을 열고 숙소 밖 복도로 나오자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나저나 남자애들 술 마시는 거면 박우진도 껴 있을 텐데, 시끌벅적할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전화기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 여보세요. 박우진? 나 지금 청자켓 주러 갈 건데, 너 몇 호..., " " 김여주. " " ...어? " 어느 때보다 낮게 깔린 전화기 너머 박우진의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뭐지, 얘 이미 술 마신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우진의 말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조금 길게 침묵이 이어지자 답답한 마음에 다시 이름을 부르자 한숨 비슷한 것이 전화기 너머로 새어들어왔다. 그 한숨이, 박우진 답지 않게 많이 떨리는 게 전화기 너머로도 여과 없이 느껴져서, 독촉하던 것을 멈추고 말없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엘리베이터는 이제 막 4층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여기가 2층이니까, 1층 갔다가 다시 올라오면 타고 가야겠네. 3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고 점점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층계를 보며 박우진의 말을 기다렸다. 3층을 지나 2층. 그리고 2층을 지나 1층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과는 다르게 엘리베이터는 소리를 내며 2층에서 멈추었다. 사람 내리려나 보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기다리려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박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그리고 서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안에는, 잔뜩 긴장한 얼굴의 박우진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여기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놀란 내 모습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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