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 늑대소년
09
w. 마카
경수는 내내 멍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본능적으로 집 앞에 다다라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도 경수는 온통 준면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놔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 말들을 혼자 중얼거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세뇌의 말이었는지, 아님 그저 포기한 것들에 대한 미련에서 오는 말이었는지 경수는 혼란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둘 다 인가.
경수는 마당 한 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이젠 꼬일 데로 꼬여버린 머릿 속에,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었다. 순간 경수는 백짓장처럼 머릿 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목도리를 잡아당겨오는 느낌에 경수는 고갤 돌려 다가온 인기척을 확인했다. 누군가, 라고 할 것도 없이 역시 소년일 것임이 뻔했다. 빨간 목도리를 한 소년이 달뜬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수는 그제서야 정신이 파뜩 드는 것을 느꼈다. 엄마한테 칭찬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어린아이처럼, 소년이 그렇게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수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제 또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었어."
경수는 손을 뻗어 소년의 목에 엉성하게 감겨 있는 목도리를 고쳐 매어 주었다. 목도리에 파묻혀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이 덩치 큰 강아지 같았다.
"예쁘다."
경수가 히죽 웃으며 소년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빨간 목도리를 한 모습이, 어린아이같이 달뜬 모습이, 언제나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예뻤다.
"들어가자."
밖에 나와 차가워진 손을 아무렇지 않은 척 맞잡으며 경수는 집 안으로 소년을 이끌고 들어갔다.
그래, 이거면 됐어.
지금만큼은 복잡한 머릿 속도, 미련이 가득한 마음도 잊기로 했다.
의외로 다시 상자를 열어 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곳에 올 때 최대한 예전의 것들은 모두 두고 오려 했지만, 다시 열어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유일하게 챙겨온 것들이 담겨있는 상자였다. 항상 처음이 어려운 것일 뿐, 그 다음은 조금씩 대담해지곤 한다. 처음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던 것이, 준면의 말을 듣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뚜껑을 열자 그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공기 중으로 하얗게 일었다. 경수는 그 안에서 차례차례 모아온 것들을 꺼내는 동안 이상하게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대 슬프다고도, 즐겁다고도 할 수 없는 기분에 잠식 되었다. 경수는 수많은 캔버스북들 중 가장 아래에 있던, 자주 손이 타 잔뜩 헤어진 것을 골라 첫장을 넘겼다. 여기까지도 경수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다.
여기저기 서툰 손길이 묻은 그림들이 종이 위에 담겨 있었다. 처음의 설레임을 담고 있는 그것들 안에서, 그때에 자신은 행복해 했었던가. 그 작은 비밀 안에서 꽤나 짜릿한 기분을 느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사락사락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오래된 영화 필름이 재생되듯, 오래된 기억들이 좌르륵 펼쳐졌다. 조금씩 조금씩 서툰 손기를 벗어나던 그것들은, 마지막 캔버스 북을 펼쳤을 때는 너무나 오래 가두어져 빛을 잃은 안타까운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결국, 완성되지 못했던 마지막 그림.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던 경수가 책상 한 구석 연필 꽃이에 꽂혀져 있는 4B 연필을 집어 들었다. 처음 꺼풀을 깎인 연필은 그 이후로 한 번도 쓰여진 적이 없었다. 완성되지 못한 그림 위로 연필을 가져 가려던 경수는 파뜻 떠오르는 기억에 그만 손에서 연필을 놓치고 말았다.
'붓쟁이나 되라고 내가 널 이렇게 키운 줄 알아?'
'쓸데 없는 짓 그만하고 네 할 일이나 해.'
이것까지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바닥에 떨어진 연필의 연필심은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엔 능력을 벗어나, 아무리 이루고 싶은 꿈이라 하여도 애초부터 시작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그리고 경수는 자신 역시 그것들 중 하나를 겪을 뿐이라 생각 했다.
경수는 다시 캔버스북을 덮어 버렸다.
톡톡. 경수는 멍하니 앉아 손톱을 물어 뜯고 있었다. 그에 반해 경수의 맞은 편에 앉은 소년은 꽤나 집중한 얼굴로 노트 위를 메꾸고 있었다. 사각사각 거리는 연필 소리와 톡톡 깨지는 손톱 소리만이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멈추고 경수 앞에 소년이 노트를 내밀 때까지도 경수는 허공에 둔 시선 그대로 손톱만 괴롭히고 있었다. 두 눈 가득 기대를 담고 있던 소년의 눈이 조금 가라 앉았다. 경수는 자신의 앞으로 다시 노트가 바짝 내밀어지며 팔에 닿았을 때에서야 손톱 깨물길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잘했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노트 위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선 경수는 노트를 덮어 다시 소년에게로 내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경수는 노트 위만 내려다 보고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에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던 자세에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동안 소년과 경수 사이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동안에서야 경수는 아차하며 깨달았다. 이러려던 건 아닌데.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본의 아니게 소년을 실망시킨 듯 했다. 덩치만 경수보다 클 뿐 한참 아이같은 소년이었다.
"종인아."
그러나 이름을 불러놓고도 차마 그 뒷말은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소년에게 이미 너무나도 많이 했다는 걸 경수는 알고 있었다. 그때, 소년이 다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곤 팟 고개를 들어 경수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경수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소년의 물끄럼한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책상 위를 구르던 연필을 잡은 소년이 노트 위로 무언갈 쓰기 시작했다. 경수의 시선이 소년의 손을 따라갔다. 자세히 보니 소년은 쓰는 것이 아닌,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갈 그리고 있었다. 투박한 손길로 움직이던 연필질이 얼마안가 끝나고 소년이 경수에게로 그린 것을 내밀어 보였다.
하. 경수의 입에서 바람 빠지며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곤 이내 경수는 와하하하며 고개가 뒤로 넘어갈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이게 나야?"
동그랗고 큰 눈. 짙은 눈썹. 또렷하면서도 살짝은 뭉툭한 코. 하트 모양으로 올라간 입술. 소년이 그린 것은 경수의 얼굴이었다. 마치 유치원생들이 그린 것 같은 유치한 그림 이었다. 그래도 분명 그 속에서 경수는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 이었다.
그림 위를 가르키면서 소리 내어 웃는 경수를 따라 소년도 히죽 웃어 보였다. 어느새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힌 경수는 그 위를 닦아내고 애써 터진 웃음을 잠재우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 웃으라고?"
말없이 히죽 웃고만 있는 소년에, 경수도 히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자 정말 소년의 그림처럼 하트 모양으로 입술이 변했다. 경수는 거실로 쏟아지는 노을 빛에 앞에 앉아 있는 소년의 얼굴이 아득해지는 것이 보였다.
경수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소년의 손길이 닿아 왔다. 경수가 소년에게 해주던 것처럼, 소년이 그렇게 경수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느낌에 조금 놀란 경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가만히 소년의 손길을 받아내었다. 부드러우면서 설레이는 느낌이 경수의 마음 속을 꽉 채웠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혼자 몇번이고 속삭였다.
그래 나는 너를,
***
_'논문 하나 보냈으니까 꼭 읽어 보도록 해라.'
"그런거라면 일일이 확인하고 있으니까 굳이 연락 안하셔도 돼요."
오랜만에 준면의 친부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러나 준면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전화에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각오로 도망치듯 내려온 곳이었다. 준면은 빨리 이 전화를 끊고 싶었다.
_'거기에 있으니까 살만 하단 거냐.'
"... ..."
_'못난 놈.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고마운 줄 알고 살아야지.'
별안간 쯧, 하는 혀를 차는 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준면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깊이 몸을 묻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한 느낌에 준면은 이마 위로 손을 가져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준면은 이내 다시 묻었던 몸을 일으키며 컴퓨터 화면을 켰다. 별로 달갑진 않았지만 그저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첨부된 파일을 열자 그 안에 빼곡한 문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준면은 무심한 눈길로 마우스 휠을 내리며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곧 무심하게 괴었던 턱을 떼며 준면은 조금 놀란 눈으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저 따분한 의학 논문일 줄 알았던 그것은 생각보다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
준면의 낯빛이 경악과 놀라움으로 물들어 갔다.
***
어두워진 방 안에 켜진 불빛은 책상 위에 켜진 스탠드의 불빛 하나 뿐이었다. 경수는 담담한 눈길로 그림 위를 바라보았다. 곧 그림 위로 단정하게 깎인 4B 연필이 닿았다. 스윽 스윽 그림 위로 연필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경수는 그 순간 작게 짜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별안간 따뜻한 무언가가 목 끝까지 벅차올라 온 몸을 감싸 안았다.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애써 겁나 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괜찮았다. 이제는 행복할 수 있었다.
작은 마음 하나가 자신을 움직였다. 그림 위를 움직이는 연필을 따라 경수는 환하게 웃었다.
어이쿠.. 또 늦어버렸네요... 수요일날 올린다 해놓고 또 일요일날 올리기.. 이번엔 조금 쓰면서 아주 조오금 슬럼프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홈으로 이전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늑소를 텍파로 만들어 퍼뜨리기에는 제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고 글잡에서 독자님들 자꾸 기다리게 하면서 부담을 느끼는 것보다는 홈에서 편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아직 정해지진 않은 부분이니까 만약 홈으로 이전하게 된다면 따로 공지를 올리도록 할게요^_ㅜ 암호닉 됴르륵, 똥주, 두비랍, 왕관, 동해, 고등어, 전주 비빔밥, 도도하디오, 향수, 김미자, 알찬열매, 사물카드, 얌냠냠, 흰자부자, 민트초코, 맥쥬, 끼용, 경수네, 띵뚱,김 어휴, 뭉티슈, 우왕, 경뜌, 꽁꽁, 르에떼, 오리, 소그미, 나나뽀, 떡덕후, 꿈이뤄21, 다이아몬드, 됴됴, 루루, 박수함성, 타워, 초코, 됴종이, 효렌지, 감다팁, 횬이, 똥 개, 종수, 루한희, 팬더, 아됴겐, 떡덕후, 됴종, 찡코, 깡아지, 초밥, 오징어, 코아, 매미, 장이씽, 꼬꼬마, 토끼 감사합니다 하트 ⊙♡⊙ P.S. 카디 생일축하해ㅠ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