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狼): 이리, 늑대.
“아아아아아악!!!!!!” 찢어질듯 끔찍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내시 하나가 근정전 뒤편에서 잿빛 꼬리를 목격한 것이다. 곳 발견된 그의 시체 뒷목에 새겨진 선명한 이빨자국은 그 무엇보다 명백한 늑대의 흔적이었다.
궁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망치시오! 어서 도망치시오!”
“강녕전과 교태전을 지켜라! 전하를 보호하라!”
“수문장은 광화문을 닫고 모든 금군들을 근정전앞으로 집합시켜라!”
“전하께서 사라지셨다, 속히 전하부터 찾아라!”
오시 (7시)가 되자 검붉은 홍월이 떠올라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었다. 흩날리는 꽃잎마저 피비린내를 풍기는 밤이었다.
정유(丁酉)년 기유(己酉)월 정묘(丁卯)일, 경복궁에 늑대가 출몰하였다.
***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직 방에있을 그가 생각났다.
오늘은 만월. 그는 무슨일이있어도 방에서 나오지 않을것이다.
힘쓰는 제왕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질만큼 강한힘을 가진 국왕 제노(帝努).
그런 그라고 한들 어찌 무기도 없이 좁은방에서 들짐승을 상대한다는 말인가.
산산히 부서지는 익숙한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려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름 항아님, 어서 몸을 피하세요! 강녕전의 궁인들은 벌써 다 빠져나갔습니다. 더 늦었다간 언제 화를 당할지 모릅니다!”
아기나인의 재촉소리에 빠른 선택을 내렸다. 얼굴한번 마주한적없는 나의 은인, 국왕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로.
“아니다, 전하를 먼저 찾아야 한다. 전하께서 위험하시다.”
“전하께선 이미 피신하셨을꺼에요. 금군들이 전하를 보호해드리고 있지않습니까! 우리도 어서 나가요!”
“금군들이 전하를 아직 찾고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나는 전하를 찾는것을 도울테니 먼저 나가거라!”
울상이되어 나를 잡아끄는 아기나인을 겨우 보내고 서둘러 강녕전과 사정전을 잇는 쪽문으로 향했다.
국왕이 만월때마다 찾는 이 쪽문과 문뒤 밀실을 아는사람은 나와 상선, 그리고 어릴적부터 국왕을 모신 김내관 뿐,
다른이들이 백날 궁궐을 뒤져봐야 절대 찾을수 없을만큼 교묘히 숨겨져 있는 비밀장소이다.
때문에 달이 차는밤이면 국왕은 쪽문을 통해 밀실로 들어가 세상으로부터 완벽히 숨을수있었다.
국왕이 밀실에 들어가면 김내관과 상선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쪽문근처를 지키고,
밀실옆 작은방에 있는내가 국왕의 잔심부름을 하며 그의 도피아닌 도피를 도왔다.
따로 방까지 내주기에 궂은일을 맡을것을 예상했었으나
막상 국왕이 내게 시킨것은 직접 물한사발을 떠다주는것과 그가 잠이들때까지 말동무가 되어주는것이 전부였다.
조곤조곤 그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마저 주로 그의 일상이나 관심사,
힘들었던 일이나 실없는 농담따위의 소소한 것들 이었으니 나에게는 그를 상대하는것이 그 어떤일보다 편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언제부턴가 국왕와 보내는 밤을 기다렸다.
비록 그 찬란하신 용안을 직접 뵙지는 못하지만, 비록 그토록 긴박했던 도피의 연유조차 몰랐지만
그저 그와 정을 나눌수있는 시간이 막연히도 그리웠다.
하필 오늘이었던 그의 탄신일과 조용히 자축을 하고자 한다며 혼자 밀실로향한 국왕이 원망스러워질만큼.
***
“전하! 어디 계시옵나이까? 전하! ”
초조한 하게 외치며 문지방을 넘는순간,
“으…으윽…..크흡…흐으….. “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조차 되지않는 괴이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더러운 짐..짐승 주제에 성스러운 궐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혹 사…사람이면 어서 저..전하의 전각에서 나나..나오지 못할까!….”
“이름……..어서 도망치거라……이름 아…”
떠듬떠듬 내뱉는 호통에 답하는 음성은 정녕 국왕의 것이었다.
“전하! 소인 이름 이옵니다! 괜찮으시옵니까? ”
“가까이 오지 마라!….방문을 열면…..대..대역죄로 참수를…… 으르릉! 당장 나가지 못할…. 커헉!”
더는 지체할수 없다는 직감에 있는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서서히 열리던 문틈사이로 보이는것은
달빛위에 군림한 한마리의 늑대였다.
비취옥 마냥 영롱히 반짝이는 그 초록빛 눈매는 섬뜩하도록 아련하고,
칼날이 춤을추듯 우아하게 휘둘리는 발톱은 마음마저 베어버릴듯하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진회색 털과 위협적으로 솢은 송곳니에 소름이 돋아
새빨간 달빛마저 푸르게 얼려버리는 한기에 몸을 떨었으니
그 존재가 가히 아름답고도 두렵도다.
더러운 핏물조차 흐드러진 꽃으로 승화시키는 그의 기운은 분명 제왕의 것
허나 국왕이란 이름을 벗어버린 그는 달빛아래 나신으로 서있다네. 본능에 충실하는 짐승, 자신에게 주어진 제노라는 이름으로.
".....너에게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허망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한걸음,두걸음 거리가 좁혀진다.
"지존의 약점을 본 너를.....죽여야할까, 살려야할까?"
허망한 웃음은 이내 잔혹한 비수가 되고,
"그래.....과인이 바로 그 더럽고 흉측한 늑대다. 저주를하던, 사살을하던 어디한번 해보거라!"
그 칼끝은 자신의 약점을 향했다.
미쳐버린 포식자가 폭주하는것을 막아선것은
먹잇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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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고 해서 약간 사극삘(?) 나는걸 써보고 싶었는데 엔시티 한복사진이 뜨더라고요ㅎㅎ 근데 제노 보니까 약간 왕이랑 늑대 둘다 잘어울려서 둘다 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여주는 수랏간 궁녀 인데 한달에 한번 제노를 만나요. 근데 얼굴도 보지않고 이야기만 나누는거라서 승은은 입지 않은거죠....(아직)
제노는 반인반수라서 여주가 겁먹을까봐 숨기고 있다가 이제 여주도 알고 이해해줬으니 더 적극적으로 나올꺼에요.
다음편은 과거 이야기인데 애초부터 둘이 운명이라 약간 끌리는게 있기때문에 과거에도 인연이 있어요(스포그만!!)
+)귀연담은 엔시티 멤버들 돌아가면서 한멤버당 2~3편씩 다른 귀신/괴물로 나옵니다! 멤버들 보고 생각날때마다 쓸계획이라 꾸준히는.....모르겟어요ㅠ
++)아! 그리고 정유(丁酉)년 기유(己酉)월 정묘(丁卯)일은 제노가 태어난 2000년 4월 23일 입니다!! 글에서는 조선시대 숙종-경종때쯤 배경이니
대충 1700년대라고 생각하시면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