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라이닝
:구름의 흰 가장자리
w. 석원
01.
“처음 뵙겠습니다. 전정국입니다.”
“아, 정여주에요. 반갑습니다.“
처음에는,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그를 보고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며칠 전, 미안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내게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요즘 시대에도 정략결혼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충격과 그 대상이 내가 되었다는 충격을 동시에 받았었다. 예의바르고 인품이 좋다고 소문난 사람이라 내 마음에도 들 거라는 말에 그나마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옆에서 보던 드라마 속 정략결혼의 주인공들처럼 자신들만의 규칙을 정하고, 집 안에서는 모른 채 하고 종국에는 좋지 않은 결말을 맺는 것만은 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그를 보았을 때도 괜찮은 사람 같아 아빠에 대한 원망이 거의 사그라졌다.
“여기 오는 거 싫었겠어요.”
“네?“
“나는 진짜 싫었는데. 지금도 싫고.”
적어도, 그와 둘이 남겨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Silver Lining
“어차피 결혼은 무르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규칙이나 정하죠.”
“….”
“상당히 당황했나봐요. 아, 아까 그 사람이 맞나 싶나봐요.”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웃는 그를 여전히 멍하게 바라봤다. 양가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젠틀하고, 온화한 미소를 종일 머금던 사람이 그의 검은 빛 양복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얼굴에서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괜히 구설수에 오르기는 싫으니까, 관계들은 정리하는 걸로 하고.”
“….“
“집에서는 굳이 연기 안해도 됩니다. 어른들 계실 때만 적당히 비위 맞춰주세요. 밝은 분 같던데.”
“아….”
“일, 이년 후에는 엮일 일 없을 거니까 괜히 사사로운 감정 갖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저는 이정도면 될 것 같고. 필요한 거 있으면 제 수행비서 쪽으로 연락해주세요. 저는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 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정리라도 해온 건지,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겪어보는 유형의 사람을, 그것도 아침마다 얼굴을 매주해야 할 사람의 냉랭한 모습에 그가 나간 뒤에도 제대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인터넷으로 신혼집을 검색해 보았던 것이, 비록 의도적인 출발이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그와의 첫 만남부터 후회가 되었다.
Silver Lining
“어땠어?“
“말도 꺼내지마.”
“왜, 별로야? 그 사람 평판 되게 좋던데.”
“그거 다 거짓말일 걸.”
집으로 돌아가려다 발걸음을 돌려 박지민이 하는 카페로 향했다. 박지민이라도 봐야 숨이 트일 것 같아서였다. 시간대를 잘 맞춰서인지 한적한 카페에서 익숙하게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네 맞은편에 앉아 분위기에 눌려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도망갈까? 너도 같이 갈래?”
“또, 쓸데없는 소리. 그리고 나는 왜 데려가.”
“너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을 거니까.”
“됐네요. 그리고 살다보면 좋아질 수도 있지.”
내 표정보다 더욱 씁쓸해지는 박지민의 표정에 의아해하다가 아직 남아있는 박지민의 딸기라떼를 한 입 마셨다. 달고 시원한 게 목을 타고 넘어가니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마시던 걸 마시고 그래. 하나 줘?”
“아니야. 금방 들어가야 돼.”
“다음부턴 하나 달라고 해. 곧 결혼 할 애가 조심해야지.”
박지민이 맞는 말을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비죽였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설레는 마음이 컸는데. 개뿔, 이젠 다 없어졌다.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로 엎드리자 내리쬐는 햇빛에 뒷통수가 따갑다가 금새 사라졌다.
“머리 뜨거운 거 싫어하면서 또 엎드려?”
“네가 가려줄 거잖아.”
“머리는 좋아가지고.”
박지민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얹혔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박지민의 손길이 나른해 눈이 감겨왔다. 네 시에는 회의가 있기에 슬슬 일어나봐야 했다. 고개를 들고 짐을 챙기다 책에서 손을 놓고 나를 바라보던 박지민에게 말했다.
“박지민.”
“어.”
“나 결혼해도 오면 이렇게 반겨주라, 알겠지?”
“넌데, 반겨주지.”
그럼 고맙고. 박지민을 보고 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을 해주기 위해 네가 따라 일어나는 걸 보니 아까의 상황이 다시 떠올라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차에 타서야, 내 표정이 얼마나 별로였을지 상상됐고, 그제야 네 걱정스러운 표정도 볼 수 있었다. 입은 웃고 있어도, 눈에는 걱정이 가득한 박지민을 보고 오늘의 자세한 내막은 내가 무뎌졌을 때 네게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이 부족하고, 텀도 조금 길지 모르지만
마음에 남는 글이 될 수 있도로 열심히 쓸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