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소음
W 크로마키
김시민이는 나밖에 몰라. 걔가 내 옆에 있어야 하고, 내가 걜 옆에 두는 이유야. * 암묵적인 호의 한 번이 지극히 당연한 게 되어버리면 골치 아프다. 왠지 끝까지 맡게된 그 일에 열성을 다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그 애 발 밑의 그림자처럼 살고 있다. "동스청-" 스 와 청 사이에 시옷 발음이 들어가 슷청으로 부르는 건 내 구강구조 상의 어쩔 수 없는 오류이다. 그런데 그 애는 내가 저를 슷청 이라 부르는게 좋다고 했다. 곱게 감겨 있는 속눈썹이 위로 들렸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자고 있는 동안 저릿해진 감각을 깨우며 움직인다. 나, 물. 초단위로 지나가는 말의 나열에 부리나케 협탁 위에 놓여진 주전자를 들어 물컵에 쫄쫄쭐 따라 건넨다. 짧은 순간에 닿는 손 끝의 온도가 짜릿하게 뜨거워 절로 오므라졌다. 그 애는 목으로 물을 꼴깍 넘기면서도 곁눈질로 나를 놓치지 않는다. 다시 내게 주는 컵 안에는 갈증만 더 돋울 것 같은 딱 한 방울이 컵을 동그랗게 기우는 방향에 따라 굴러갔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뒤로 젖혀 그 한 방울을 내 입 안으로 털고 다시 협탁 위에 놓아두었다. "학교 안 가?" "너가 여기 있는데 학교를 왜 가?" 내 말에 그 애가 힘 없이 웃으며 머릴 끄덕였다.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려주더니 이내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착하다. 시민." "스청, 빨리 건강해져." "응. 좀 있다 래연 오니까 자리 비켜줘." "..래연이 맨날 오네." "너도 맨날 오잖아." "그야 나는, 네가." "응. 내가 전부니까." 다 알겠다는 듯 뺨에 붙어있던 끈질긴 손이 내 턱을 꾹 누른다. 알겠으니 알아서 기분 풀라고. 내 얼굴의 온도를 높이던 손이 떨어져나가기 무섭게 허전함이 파고든다. 시리다. 내려간 손에 미련을 못 떼고 따라 시선이 내려간다. " 말 잘 듣는 우리 시민. " 가라는 소리였다.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스청- 괜히 이름을 부르며 끝에 아쉬움을 가득 담았다. 낑낑 거리며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그 애가 앉아 있는 침대 쪽을 돌아봤다. "얌전히 밖에 있어. 부르면 들어와. 래연이랑은 인사 말고는 하지 마." 나는 동스청 여자친구 자리에 앉아있기는 한데. 래연이라는 애에게 자주, 아니 거의 대부분 그 자리를 내어준다. 위치상 점만 찍어놓고 주변 반경을 위성처럼 맴도는게 나다. 슬라이딩 도어가 소리없이 열리고 닫혔다. 텅 빈 복도 끝에서부터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문 옆 복도에 등을 기대고 쭈구려 앉아있다가 그 소릴 듣고 일어났다. "어, 안녕." "..스청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됐어." "응." 래연은 내 말을 바로 던졌다. 그래서 그게 어쨌냐는 눈빛으로 깔보며 들어갔다. 사소한 하나하나에도 짓밟힌 자국이 마음 곳곳에 있다. 안에서 시끄러운 래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병신 같아." 날 두고 하는 말일까. 드문드문 밖으로 새는 말은 하나같이 다 래연의 입에서 나오는 말 뿐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동쪽과 가까운 이 곳에 와서는 고작 5분 남짓 저택의 주인을 만나고 싸늘한 복도 공기만 서너시간 맡다가 간다. 래연은 해가 노을에 뭉개져서야 나왔다. 나는 다리에 저릿함을 넘어서 통증처럼 욱신거리는 쥐가 났다. "아직도 거기 있었어? 너도 진짜 독하다." 멍청이. 래연의 돌아선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그렇게 휘갈겼다. 멍청이라고. 나는 울먹임을 겨우 삼키며 안으로 들어갔다. " 시민. 나 배고파." "아주머니 부를게." "아니, 그거 말고." 앉기 무섭게 배고프다는 말에 일어나 호출 버튼을 누르려는 내 팔을 잡아 당긴다. 다시 털썩 앉은 나를 조금은 거세게 끌어당긴다. 맥아리 없이 끌려갔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억압적이래도 좋았다. 갖고 싶은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아예 입술에 힘을 풀고 그 뜨겁도록 축축한 혀가 내 안을 마구 지지고 다니는대로 내비뒀다. "재미없다. 이제 너도 가. 내일부터는 나도 학교 나갈 수 있으니까 우리 집 오지 말고 바로 학교에서 만나." 아쉬워서 윗입술을 말았다. 음맘마 거리며 입술끼리 부대끼다가 등을 돌리고 돌아 누으려는 뒷통수에 대고 물었다. "래연이랑 같이 등교할거야?" "당연한 걸 물어." "나랑은." "..너, 질리려고 해." "미안해. 그만 질척댈게. 잘 자. 내일 꼭 봐." 보지도 않는데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동스청의 집 대문 밖을 나서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오고 옆구리가 콕콕 쑤셔도 멈추지 않고 천천히라도 배를 부여잡고 달렸다. 빨리 잠들어야 덜 불안할 것 같았다. 얼른 자고 일찍 학교가서 스청이 오기만을 기다려야지. *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중요한건 무엇보다 그 애였다. 당당하게 체육 시간이니 체육복을 달라고 요구하는 래연이 내민 손을 두고 고민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이번 시간이 체육이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 애 한 마디에 나는 바로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내다 잔뜩 새침한 래연에게 주었다. "래연 빌려줘. 체육복 없으면 래연이 혼나." "응." 그 말에 혼나는 건 래연이 아닌 내가 되었다. 올바른 복장을 입고 운동장에서 애들이 피구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홀로 선생님 옆에서 치마를 입은 채 엎드려 뻗치고 있었다. 부들부들 팔이 떨리고 귀가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힘드냐." "..네." "그러니까 누가 체육복 안 입고 당당하게 교복 입고 있으래?" '죄송합니다." 3반 대 8반의 피구 대항 시합은 래연이 속해 있는 8반의 우승으로 끝났다. 나는 붉은 선이 선명하게 잡혀 있는 접혔던 손목과 손 사이의 꺾인 부분을 문질렀다. 손바닥에 콘크리트 바닥의 작은 알알이들이 새겨졌다. "멍청이." 손바닥을 털며 래연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동스청을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뛰듯이 걷던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그런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멍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면 마찬가지로 멈춰서서 슬쩍 고개만 돌려 나를 주시하고 있는 눈과 마주친다. "너 얘기하는거 맞아." 이민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