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 0214, 더 파라디(The paradis) 11
w.규닝
11. 공개수배 : 찾습니다
"남우현 없어요?"
"없어요?"
이른 아침이었다.
스물 세살이면 그렇게, 아침잠이 없어질 정도로 많은 나이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요즘따라 부쩍 일찍 일어나게 되는 탓에 말똥말똥한 눈만 멍청하게 뜨고 있을 때였다. 철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성규가 벽면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7시 10분. 빨리도 오는구나, 남우현. 무심하게 뒷머리를 정리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간 성규가 피곤한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면서 의심없이 문을 열었다.
"여기도 안왔어요?"
하지만 그런 무감각한 성규를 반긴 것은 헤프게 웃는 우현의 얼굴이 아닌 호원과 동우의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성규는 뜻밖의 손님에 의아한 눈썹을 꿈틀댔다. 남우현 친구들? 문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을 풀고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전주에 다녀오기 전날 밤에 잠시 본 적이 있던 녀석들이었다. 성규가 갑작스레 가졌던 경계태세를 풀고 호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작스럽게 쳐들어 온 주제에 그들이 뱉은 첫인사는 남우현의 행방을 묻는 말이었다. 그에 성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왔어. 성규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쑤욱 내밀어 집 안을 염탐하던 동우가 흐으음,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니까 이틀 째였다. 남우현의 발길이 끊긴지는. 그리운 사람을 보낸 것도, 몇년만에 고향을 찾은 것도 전부 성규의 몫이었지만 그 뒤의 후유증은 모두 우현이 짊어지고 있는 듯 했다. 유골함을 묻은 순간부터 기차에 오른 순간까지도, 심지어는 서울에 도착해 역 앞에서 헤어질 때까지도 우현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애초에 제녀석이 먼저 펑펑 울어제낀 것부터가 의아한 점이다. 대책없이 미안하다고만 말해오던 우현은 성규가 미처 들어가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보겠다며 역 앞을 벗어났었다.
그 뒤론 하루가 멀다하고 옥탑방에 출석도장을 찍던 우현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던 그 때의 밤엔, 술에 취해서 이상한 얘기만 늘어놓던 평상 위의 어느 날이 떠올라 도망치듯 벗어나는 우현의 발길을 차마 잡아세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헤어진 지 이틀째. 그러니까 이틀씩이나 우현은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틀 씩이나,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우현은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옥탑방에 찾아와 두개나 되는 동그라미를 버젓이 그려넣고 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현이 사라진 이틀이라는 기간은 '씩이나'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마땅했다.
"형! 남우현이 매일같이 가던 곳, 그게 여기 맞죠? 형 집!"
호원의 옆에서 추운 발만 동동 구르던 동우가 불현듯 얼굴을 쑥 내밀었다. 아침부터 맞는 찬바람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성규가 제 앞으로 불쑥 다가온 얼굴에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응. 성규가 건조하기 짝이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지나치게 밝은 톤의 목소리로 대답한 동우가 뜻모를 폭소와 함께 호원의 팔을 마구 내리쳤다. 우리 예상이 맞았나봐, 호야!
"그럼 형형! 남우현 올 때까지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돼요?"
호원의 패딩을 소리나게 때리던 동우가 역시나 조증 비슷한 목소리로 성규에게 물어왔다.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겠다고? 성규가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네? 네? 남우현보다 10배는 더 심한 강아지처럼 제 바로 앞에서 발을 동동 굴러대는 동우를 보고나선 오버스러움 앞에서 나오는 특유의 인상을 찌푸린 성규가 대답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남우현한테 꼭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이새끼가 전화는 안 받고. 속터져 죽겠다니까요."
"……."
"급한 얘기라서 꼬옥, 오늘 전해줘야 할 것 같은데."
동우에 비하면 비교적 정상적인 호원의 목소리가 성규의 기분을 살살 구슬리고 있었다. 호원이 답지않게 입을 벌려 헤 웃었다.
"여름 피서 계획을 세웠거든요. 그러니까, 고민 끝에 남남커플도 바닷가에 데려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해주고싶어서."
호원이 직접적인 이유를 대자마자 동우가 제자리에서 통통 튀어오르며 성규의 소매를 간간히 흔들었다. 네? 네 형? 우리 갈 곳도 없고 추워서 들어가있을게요. 동우의 조증어린 손이 소매를 잡아당기자 팔짱을 꼈던 손이 풀려 찬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어왔다.
…여름 피서 계획이라고? 그러니까 애초에 그걸 지금부터 정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1월부터 준비하는 피서 계획이라니. 성규가 어이없게 구겨지는 눈썹으로 호원과 동우의 얼굴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결국 그러기도 잠시, 호원과 동우는 둘째치고 일단 저부터 추운 탓에 집 안쪽으로 몸을 튼 성규가 한층 더 까칠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문 닫고 들어와. 추워서 돌아가시겠다.
"근데 두시까지 남우현 안 오면 그냥 가. 꼭 여기 올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아싸! 근데 왜 하필 두시에요?"
"내 맘."
제 말을 듣긴 들은건지, 신발조차 벗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 거실 바닥에 드러눕는 동우를 보던 성규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에 비해 그나마 좀 더 신사적인 호원이 고갯짓으로 꾸벅,하는 인사를 한 뒤 현관문을 닫았다. 성규가 차갑게 식어버린 두 팔을 싹싹 문지르며 등을 돌렸다.
약간 그렇게 보이는 면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혹시나가 역시나다. 성규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추고 호원과 동우를 돌아다보았다. 피서 계획에 남남커플이니 어쩌니 하던 것으로 보아 사귀는 사이가 맞나보다. 따뜻한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동우 위로 엎어지듯이 따라 누운 호원을 스캔하던 성규가 작게 웃었다.
으아아, 따뜻하다.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동우의 등 위에서 기지개를 켜던 호원이 방 안으로 쏙 들어간 성규에게서 눈을 떼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어들었다. 금세 리모컨을 집어든 동우가 휙휙 채널을 넘겨대고 있을 때 호원은 신난 듯한 손가락을 놀려 키패드를 눌렀다. 남우현, 니 성은 함락되었다.
* * * * *
"너 카톡왔다."
온 신경을 모니터 속으로 쏟고 있던 성열이 제 발치에서 반짝거리는 휴대폰을 걷어차 우현에게로 던졌다. 바닥 위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던 우현의 허리께에 미끄러지듯이 던져진 휴대폰이 날아와 부딪혔다. 아,씨발. 둔탁한 통증에 눈썹을 찡그린 우현이 그대로 상체만 일으켜 앉아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성열은 홀린 듯한 눈으로 모니터에 집중하면서 현란하게 손가락을 놀리며 말했다. 뭐 씨발? 씨바알? 너 지금 몇일째 먹여주고 재워주는 친구한테 씨바알?
「남우현. 니 성은 함락되었다」오전 7:21
성열의 텃세를 듣는 둥 마는 둥 한 우현이 액정을 켜 카톡을 확인했다. 이호원에게서 온 카톡. 뜬금없게도 성이 함락되었다는 말과 함께 잔망스러운 이모티콘이 둥둥 떠올라있었다. 그대로 까치집이 진 뒷통수를 두어번 긁적이다가 액정을 끈 우현이 소파 위로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아침부터 뭔 개소리래. 소파 위로 턱을 얹고나서 힘없는 눈꺼풀을 감은 우현이 입을 쭈욱 내밀었다. 아, 진짜 심심해.
"심심해 죽어버리겠다."
"남 게임하는데 옆에서 죽는소리 하지 말고 다른데나 가서 놀아라, 어?"
성열이 입 안에 대충 집어넣은 오징어를 잘근거리면서 대꾸했다.
"평소에 불러낼 때는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왜 하필 알바 쉬는 날에 찾아와서 행패냐?"
"우린 친구잖아."
"친구 좋아하시네 미친놈아. 니 말마따나 친구라는 새끼가 사랑에 눈멀어가지고는 한달 내내 없는 사람 취급해온 주제에. 아 미친, 죽을뻔했다. 어쨌든 너, 친구 운운하지마 재수없으니까."
성열이 널브러져있는 우현 쪽을 향해 가운데손가락을 날린 뒤 재빨리 다시 키보드에 손을 가져갔다. 눈을 감고 있느라 성열의 손가락 욕은 미처 보지 못한 우현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소파 위로 오른쪽 뺨을 기댔다. 저 말에 딱히 반박할 생각도 없고, 사랑에 눈 먼 건 사실이니까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지금,
거기까지 생각한 우현이 복잡해진 머리를 더욱 헝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성열과 우현이 공존하는 거실에는 뿅뿅거리는 기계음만 정신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현의 입에서 난데없이 야,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사랑에 자격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냐."
"날 오징어로 만들 셈이냐?"
"나 진지해 새끼야."
"…자격?"
여전히 시선은 모니터로 향한채로, 뜨악하는 말투와 함께 혀를 내두르던 성열이 종래엔 어이없어 뵈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자격같은 건 당연히 있어야 하는거야."
"……."
"예를 들면 어? 아들이니까 엄마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거야. 당연한 얘기기도 하고.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부모님을 공경해야 씨발 소외된 노인 문제나 이런 게 안 생기지. 안그래?"
성열의 자격 얘기에 죽어있던 신경을 깨워 귀를 기울이려던 우현의 눈이 단번에 성열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야, 생각해봐. 나중에 니 새끼들이 너 막 공원같은 데에 버리, 아, 뒤질 뻔 했네. 게임을 하던 성열의 몸이 잠시 기우뚱하더니 제자리로 돌아왔다. 컨트롤이 잘 안 되는 모양인지 키보드를 놀리던 손가락이 아까보다 더욱 현란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이번만큼은 꽤나 제대로 된 얘기를 뱉을 줄 알았던 성열에 혀를 찬 우현이 다시금 소파 위로 힘없는 머리를 기대었다. 저런 새끼한테 조언을 바란 내가 잘못이지. 우현은 소파 위에서 뒤집어진 채 진동음을 울려대는 휴대폰을 슬금슬금 가져와 만지작대면서 손장난을 했다. 이성열한테 묻느니 차라리 지식인에 물어보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전주에 다녀온 뒤 눈물을 쏟아낸 것은 오히려 저 뿐이었다. 김성규는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일에 무표정으로 일관했으며 펑펑 울어제끼는 저의 눈을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 니가 왜 울어. 그 때의 그 잔잔했던 목소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현의 귓가를 아프도록 간지럽히고 있었다. 정말로 왜 우는 것인지를 묻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가, 눈물 같은 건 말라버린 지 오래라는 말이 겹겹이 쌓여있던 것만 같은 목소리가 아픈 날 피워나던 열병처럼 우현의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저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몸을 팔며 살아왔고ㅡ그 탓에 조금은 어둡게 자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사람에게 받아온 상처쯤은 앞으로 제가 말끔히 치유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했던 것이 지금은 부메랑처럼 독한 상처가 되어 되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픈 사람이기도 했으며, 오히려 슬픔에게서 완벽하게 등을 돌린 채 왜 우는 것이냐며 되물어오던 사람. 우현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이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이틀 정도 옥탑방에 발길을 끊어오니 정리될 줄만 알았던 머릿속은 더욱 더 무거워져만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에 불은 솜처럼 우현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자격'이라는 단어는, 그가 내릴 결정을 하루 빨리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끊임없이 우현을 괴롭혀오고만 있었다. 멍하니 티비를 보고 있을 때에도, 성열과의 장난에서 꽤나 아픈 발길질에 걷어 차이던 순간까지도.
아무런 생각없이 밥 숟가락을 퍼올릴 때에도. 베개 위에 머리를 파묻다가 어느새 몽롱해지던 와중에도 번뜩번뜩 머릿속을 찾아오던 천사의 얼굴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자격 운운하는 말로 우현의 마음속을 헤집어대고있었다.
"선생님이 학생들을 사랑할 자격, 엄마가 아빠를 사랑할 자격. 또,"
우현의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말거나,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주제에 가벼운 성열의 입은 우현이 물었던 '자격'에 대한 열띤 생각을 줄줄이 읊어대고 있었다.
"남우현이라는 새끼가 이성열이라는 친구한테 치킨같은 걸 사주는 게 또, 친구로써 사랑하는 자격이라고 볼 수 있지."
"게임을 하던지, 말을 하던지 하나만 해라. 언어장애같아."
친구로써 사랑하는 자격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우현이 소파에 기대었던 머리를 떼어내고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만 말해도 되는데 저 입은 멈추지를 않고 있다. 우현은 아까부터 자꾸 반짝거리며 울고 있는 제 핸드폰을 집어들어 다시 한 번 액정을 켰다. 그새 호원에게서 온 카톡은 28개. 분명히 야,야,하는 쓸데없는 말들로 도배되어 있을거라 생각하고 터치한 채팅창에는 역시나 알 수 없는 모음과 자음들이 섞여있었다.
「읽고도 씹어?」오전 7:43
「니 성을 우리들이 지배했다니까 지금」오전 7:43
「야」오전 7:51
「ㅑ」오전 7:51
「ㅑ야야야ㅑ야」오전 7:52
「여기 좋네」오전 7:52
「우리 방금 결심했어」오전 7:53
「여기서 살거야」오전 7:53
「야」오전 7:53
우현의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채팅창을 주욱 읽어내렸다. 이성열이든 이호원이든 누구 하나 알아듣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진지하게 던졌던 물음에 나사빠진 대답만 읊어대고 있질 않나, 누구는 뜬금없이 성을 함락했다는 소리나 해대고 있질 않나, 왠지 모르게 지쳐오는 기분에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우현이 나중에는 제대로 읽지도 않고 'ㅗ'라고 답장을 보내려 채팅창을 아래로 쭈욱 내리려고 했을 때였다.
"또, 강아지가 주인을 사랑하는 것도 그렇지. 왜냐면,"
성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귓가에 마악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에, 제 눈 안에 들어온 호원의 카톡으로 인해
「성규형이 떡볶이 해줬다」오전 8:13
"나만 사랑해주세요. 멍멍. 이런거지."
우현은 성열의 집에 들어설 때 입고 왔던 겉옷마저 챙겨들지 못하고 현관문을 뛰쳐나갔다. 나만 아는 옥탑방 안에 이호원과 장동우.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도 싫은 상황들이 떠올라 사실은 행동이 먼저 앞선 것이었다.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성열의 자취방을 뛰쳐나간 우현이 입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에 마지막 예시로 강아지와 주인의 사랑 자격에 대해 설명하던 성열은 귀여운 포즈까지 겸해서 멍멍,하고 소리를 내자마자 제 옆으로 스치듯이 달려나간 우현의 등에 대고 야!하는 악을 내질렀다. 깜짝 놀랐잖아, 새꺄 말은 하고 나가야지!
문 닫고 나가! 추워! 하지만 이미, 우현에겐 들릴 새도 없는 그런 처량한 명령이었지만서도.
* * * * *
"우하핳,성규형 짱 못해. 형 파산나겠어요!"
옥탑방 거실 한가운데.
언젠가 우현이 가지고 왔던 두툼한 이불을 폭 뒤집어 쓴 채 동우가 성규를 가리키며 배를 잡고 웃어댔다. 호원도 그런 동우의 웃음소리 따라 호탕하게 웃으면서 성규의 앞에 놓인 가짜 돈들을 제 앞으로 싸악 쓸어왔다.
삼십분쯤 전, 기다리기 지루할 것 같다며 바깥으로 나가더니 동우가 가져온 것은 브루마블 세트였다. 브루마블이 뭔데? 신나게 판을 벌리려는 호원과 동우의 어깨 너머로 새침하게 물어왔던 성규는ㅡ 어느새 누구보다 열정적인 자세로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판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잃어가는 지폐들에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잡은 성규가 그 여느때보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형, 빨리 해요! 형 차례에요."
"잠깐만."
"형. 이건 머리써봤자 소용 없어요. 운빨인 게임이니까."
빨리. 성규를 재촉하며 주사위를 쥔 성규의 손을 흔든 호원이 성규의 손에서 일부러 주사위가 굴러떨어지게끔 만들었다. 아,하고 탄식을 내뱉은 성규는 어느새 제 앞에 멈춰진 주사위의 숫자를 쳐다보다가 신나게 저의 패를 옮기고 있는 동우의 손을 쳐다보았다.
"우학핳하! 또 내 땅에 걸렸어!"
결국에 성규의 패가 멈춰선 곳은 동우의 영역이었다. 그에 옥탑방이 떠나가라 웃어제낀 동우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성규를 비웃어댔다. 형!우학학, 80만원 줘야돼요! 호원이 신나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성규의 앞에 놓인 돈에 다시 한 번 손을 갖다 댔다. 원체 표정변화를 찾아볼 수 없던 성규의 표정이 이제는 조금 구겨져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성규가 둘 모르게 입 안쪽 살을 지긋이 깨물었다. 어느새 얄팍하게 줄어있는 저의 지폐들과 호원과 동우 앞에 수북히 쌓여 있는 지폐들을 번갈아보자 울컥하는 마음이 살짝은 치밀어오는 것도 같았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위장하며 브루마블 판 옆에 놓인 떡볶이를 하나 집어먹은 성규가 제 손바닥 위로 얼마 남지 않은 지폐들을 꼬옥 쥐었을 때였다. 그럼 이제 나 던질게요. 호원이 가져갔던 주사위를 던지려는 시늉을 하려고 함과 동시에 쾅쾅쾅,하고 철문을 치는 소리가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를 잠재웠다.
호원과 동우, 성규의 고개가 일제히 현관에 달린 철문을 향해 돌아갔다. 세 번씩이나 세게 문을 걷어찼던 것으로는 모자라는 모양인지, 연달아 주먹과 발을 이용해 철문을 때려 치고 있는 문 밖의 실루엣은 다소 화가 나 있는 것도 같았다. 성규는 입 안에서 오물거리고 있던 떡볶이를 천천히 곱씹으며 실루엣을 살펴보았다.
"형. 누구예요?"
옥탑방이 떠나가라 웃어대던 동우가 웃음을 뚝 멈추고는 동그란 눈을 한 채 성규에게 물었다. 물론 호원만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문 밖의 손님과 성규를 번갈아보고만 있었지만.
성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게 여러번 더 철문을 쳐대던 남자가 갑자기 문 밖에서 조용히 그를 기다리던 순간까지도 모두의 고개는 문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성규가 아무렇지도 않은 눈을 하고서는 한 치의 경계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누구냐고 묻는 물음조차 생략한 채 끼익,하고 쇠가 갈리는 소리가 옥탑방을 울렸다.
"김성규"
호원과 동우를 맞이했을 때처럼, 바깥의 찬바람이 훅 하고 성규를 덮쳐왔다. 얇은 티 하나만 걸쳐입고 있던 성규의 몸을 순간 덮쳐온 것은 비단 바람 뿐만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잔뜩 집 안을 노려보고 있던 눈이 성규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안 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옮겨 들어왔다. 생각보다 센 바람에 쾅,하는 굉음을 내며 등 뒤에서 닫힌 문이 옥탑방 안으로 이상한 기류를 한 층 더해주고 있었다.
성규가 제 얼굴 위로 드리워진 얼굴을 초점 없이 올려다보았다.
"왔네."
남우현. 그렇게 말해오는 입술에선 그토록 기다렸던 제 이름이 뱉어졌다. 무언가 울컥 하고 치미는 마음에 성규가 버티고 섰던 벽으로 그 몸을 몰아넣은 우현이 마음속에 산더미처럼 쌓이 묻고싶었던 말들을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몰라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고 있을 때였다. 성규가 우현의 몸에 스민 한기가 제 티를 파고드는 것만 같아 몸을 움츠렸다. 그 바람에 손에 들려 있던 브루마블 지폐들이 팔랑거리며 현관 위로 떨어져 내렸다.
늦게 와서 미안해, 자격 운운하는 생각들로 차마 너를 찾아오지 못했던 것도, 분명 그날 이후로 힘들었다면 더 힘들었지 덜 힘들진 않았을 넌데ㅡ 나보다 쟤네를 더 먼저 만나게 한 것도. 잠시라도 너한테서 떨어져 있었던 것도 전부 다. 온통 미안하다는 생각들로 쌓여있는 머릿속에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를 고민하며 성규의 얼굴 쪽으로 제 머리를 가까이 가져오려고 했을 때였다.
"전단지 뿌리기 전에 와서,"
"……."
"다행인 줄 알아. 니 이름 팔릴 뻔 했으니까."
며칠 전 들었던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는 잔잔한 목소리가, 아니 조금은 웃고 있었던 것도 같다.
"잃어버린 개새끼 찾아요,하는 전단지 만들려고 했다."
이렇게 농담도 할 줄 아는 걸 보면. 우현이 왈칵 하고 뜨거워지려는 눈을 질끈 감아 성규의 머리통을 제 품안으로 끌어당겼다.
* * * * *
우현에 의해 오후 즈음에 옥탑방에서 쫓겨나듯이 나간 호원과 동우는 우현에게 왜 자신들의 게임을 방해하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먼저 온 건 우리인데 왜 우리가 나가야 하는거냐며 툴툴대던 호원이 '내일 다시 찾아와 이어서 시작하겠다'며 브루마블 판을 건드리지 말 것을 충고하고 나섰다. 우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거실 한 가운데에 놓여있던 브루마블 판을 발로 밀어 구석 언저리로 처박아두었다.
"다신 저새끼들 들이지 마."
"왜."
"뭐가 왜야, 이 집엔 나만 들여."
우현이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내가 먼저 찾았고, 너는 내가 먼저 찜했으니까. 우현은 입 밖으로 뱉었다간 등짝을 얻어 맞을 것만 같아 위험한 발언만큼은 속으로 꾹꾹 삭혔다. 김명수라고 했던 그 사람도 들이지 마, 물론 이 말도 덧붙이고 싶었지만 우선은 보류. 우현이 성규의 어깨 맡으로 흘러내리려는 이불을 당겨 꼭 덮어주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낮부터 심심찮게 불어왔던 바람은 저녁이 되니 더욱 거세져 있는 모양이었다. 약한 창문 틀을 부술 듯이 불어대는 바람은 급기야 위험천만하게 유리창을 흔들어대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현과 성규는 흔히 보던 티비마저 켜지 않고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따뜻한 이불로 온 몸을 꽁꽁 덮고 있었다.
따뜻한 거실 안에, 라이터 불이 만들어 내는 따닥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골목 어귀에서 팔던 밤을 한 봉지씩이나 사온 우현은 성규에게 먹이겠다며 라이터로 한알 한알 손수 뜨겁게 구워주고 있는 중이었다. 딱딱한 밤 껍질이 불을 만나 따닥거리며 타오르는 소리가 둘 사이의 공기 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성규가 배를 깔고 드러누워 봉지 안에 들어있는 밤알들을 하나하나 헤집으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시 찾아오긴 했네."
이 집에는 저만 들이라는 우현의 고집어린 떼를 건성으로 받아 들은 성규가 바람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젠 나한테 질려서 떨어져나갔나보다 했지."
"뭐?"
가만히 성규의 말을 들어주려던 우현이 그 대목에서는, 밤을 이리저리 굴리며 불에 그슬리던 손길을 뚝 멈추고는 짐짓 인상을 썼다.
"무슨 근거로?"
"그럴 수도 있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떡볶이 만들어준다고 해서 졸졸졸 따라갔을지 누가 알아."
성규가 장난식으로 주워든 밤알을 바닥 위로 톡 굴리면서 말했다.
"너 떡볶이라면 환장하잖아."
"누가 그래? 너한테 환장해서 따라온거였는데."
떡볶이가 아니거든. 우현이 잔뜩 짜증이 오른 어투로 반박했다. 내가 널 배반할 것을 가정하기보단, 네가 날 배신했던 게 사실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을 꾸욱 참은 것이었다. 따라가긴 누가, 오히려 새로운 놈들한테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떡볶이를 대접했던 것은 제 쪽이었으면서. 우현은 잔뜩 심통이 난 입술을 삐죽거렸다.
성규는 제 팔을 베고 누워 바닥에서 밤알을 가지고 장난을 쳐대던 눈을 들어올려 우현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조용한 거실 위로는 바람이 흔들어대는 창문틀 소리와, 따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슬려지고 있는 밤 껍질 소리가 기분 좋은 조화를 이루며 성규의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성규가 그렇게 한참을 부루퉁하게 내밀어진 우현의 입술에 눈을 고정했다.
라이터에서 내비친 불빛 덕분에 발갛게 비춰진 우현의 얼굴이 따뜻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잘 짓지 않는 웃음마저 터뜨려버렸다. 성규가 한 손으로 빙글빙글 돌려대던 밤을 멈추고는 야,하고 우현을 불렀다.
"이제보니까 너는 씨발놈은 아니야. 개새끼일 뿐이지."
"…뭐가 다른데?"
우현이 심통이 난 입술로 비죽거렸다. 밤을 골고루 태우고 있던 눈을 잠시 흘겨 성규를 쳐다보던 우현이 다시금 밤알에 집중을 하려 했을 때였다.
"달라. 씨발놈은 욕이고, 개새끼는 아니야. 적어도 후자는 충성심이 강하니까."
"그러니까, 니 딴엔 좋은 뜻이라고?
"응. 좋은 거."
성규가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넌 특히 진돗개야."
"디테일하구만."
"걔가 충성심이 제일 강하다더라."
도대체 이건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장난이야? 조곤조곤히 들려오는 성규의 말에 픽 하고 웃은 우현이 제 앞에 드러누운 채로 꿋꿋히 말을 이어가는 성규의 입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은 제가 아닌 밤알을 향하고 있는 주제에 오물거리며 말을 늘어놓는 입은 예쁘게도 움직인다. 우현이 제가 내고 있는 불빛 따라 다홍색으로 물든 성규의 머리맡에 한참이나 시선을 고정했다.
"진돗개는 집같은 거 안 나가. 알았어?"
그렇게, 계속.
한참동안 정말이지ㅡ보고만 있어도 김성규는 질리지가 않는다. 우현이 마침내 내린 결정은 그것이었다.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저 묘한 얼굴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아마 행복할 거라고. 좁은 거실 안에서 둘이 누워, 거창한 야식거리가 아닌 작은 밤알들만 구워먹으며 산다 해도 김성규랑 같이니까 어찌됐든 좋을거라고. 우현은 한참 후에 응,하는 대답을 뱉었다.
안 나갈게. 그렇게 말해오는 우현의 목소리에 성규의 입에서는 답지 않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독 바람이 추운 날이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바람이 흔들어대고 있는 창문소리와는 다르게 제가 누워있는 곳은 세상 어느 곳보다도 따뜻하고, 따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