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한 이유없이 하루가 짧게 느껴지는 날에도, 반대로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날에도 시간은 항상 째깍째깍 흐르고 있었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끔 일정한 속도로.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도 조급했는지 무의식적으로 그 뒤꽁무니만을 쫓다 보니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한사코 뒤를 돌아봐주지 않는 '시간'에게, 그것도 아주 정신없이 말이다.
기동대에서 배치 받은 말썽꾸러기 의경들의 등장, 순경에서 경장으로 진급하여 월급이 오른 해맑은 동우, 갈팡질팡하던 본인의 마음에 확신이 들자 그 마음을 용기 있게 표현한 호원, 그리고 인자하신 지구대장 오원준 경사님의 은퇴, 평화로웠던 지구대를 지옥의 불구덩이로 만든 살벌한 성규의 등장, 액운이 또 다른 액운을 부르듯 넝쿨째 굴러온 우현, 한때는 오원준 경사님의 귀염둥이였지만 현재는 근무태만으로 찍혀버린 성열, 모두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던 인피니트팰리스 사건 등 어지간해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한 해가 저물고 어느덧 새로운 해가 밝았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와서 되짚어보니 작년의 무한지구대는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하지만 무한지구대의 다사다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우당탕탕!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일곱 명의 무한지구대 이야기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예, 곧 출동하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호원이가 차가워진 손을 싹싹 비비면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지난해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2013년이 시작됐다는 새로운 느낌 때문인지, 오늘따라 눈에 담기는 모든 사물들이 조금씩 달라 보인다. 음…, 어디 보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출근차부터 시작해서 벽 한 켠에 걸려있는 시계, 물이 반쯤 담겨있는 정수기와 그 옆에 조그맣게 마련된 티테이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 볼펜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사무용 책상들, 그리고 툭하면 취객들의 침대가 되기 일쑤인 소파 등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보던 것들인데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게만 느껴진다. 아마도 지구대 식구들의 2013년도 손길이 아직 닿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 조금 이따가 모두들 출근해서 이 물건 저 물건 만지다 보면, 그런 느낌 또한 곧 사라질 것이다.
잠시 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호원이는 열심히 비비고 있던 두 손을 자연스레 코에다가 갖다 대면서 출동하기 위해 움직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흔히들 말하는 '닭똥 냄새'가 수많은 코털들을 이리저리 파헤치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대체 이 냄새는 뭐지? 코흘리개 시절부터 겨울이 될 때마다 꾸준히 맡아왔지만 스물다섯 먹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게 정말로 닭똥 냄새가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의심쩍긴 하지만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선구자가 닭똥 냄새를 맡아봤으니 이런 이름으로 명명한 거겠지. 본 적도 없고 직접 맡아본 적은 없지만, '닭똥'이란 것은 이런 요상한 냄새를 풍기나 보다.
호원이는 손 냄새를 킁킁 되맡으면서 차키가 걸려있는 곳으로 향하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를 발걸음을 멈췄다.
"아참, 한순경님! 같이 출동 나가실래요?"
"그래요~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잘됐네요. 그럽시다!"
어쩌면 달갑지 않을 법도 한 호원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한재호 순경은 주인 없는 성규의 책상으로 가서 출동일지가 빼곡히 쓰여 있는 장부를 쫙 펼쳤다. 그리고 책상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볼펜을 손에 꼭 쥐더니 뒤꽁무니를 꾹 눌렀다. 딸칵. 볼펜심은 마치 '재호야, 안녕?'이라면서 살가운 아침인사를 건네는 것 마냥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한순경은 자신과 호원이의 이름, 또 출동하는 시간과 장소까지 정갈한 글씨로 한 자 한 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코코아를 휘젓고 있던 동우는 호원과 한순경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에 티스푼을 빼서 테이블에다가 내려놓았다.
"대애~바악~! 출근한지 얼마나 됐다고 새해 첫 날부터 출동?"
동우는 웃음기가 풀풀 묻어나는 특유의 말투로 큰 반응을 보이더니, 한순경에게 다가가 방금 탄 코코아를 건넸다.
"날도 추운데 이거 마시면서 나가세요~"
그러자 장부를 쓰다 말고 왕에게 은혜를 입는 신하처럼 넙죽 받는 한순경이었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고맙습니다, 장경장님! 역시 천사가 따로 없으십니다? 아하하하~"
"그죠? 흐하하하하하하~"
엄지를 치켜세우며 천사라고 칭찬해주는 한순경과 마주보고 크게 웃고 있는 동우. 호원이는 이 둘을 곁눈질로 힐끔 보면서 벽에 걸려있는 차키를 뺐다. 뭐? 역시 천사가 따로 없으십니다? 아하하하? 저런 장면이 내심 탐탁지 않게 느껴진 호원이는 혼자 뻐끔거리면서 한순경의 대사를 따라하더니, 도저히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는 식으로 윗입술을 삐죽였다. 참나…. 아주 그냥 둘이서 하!하!호!호! 잘들 놀고 계시네!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눈이 뒤집힌 호원이는 차키를 손에 꽉 쥐어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자 깜짝 놀라서 힘을 푼다. 뭐가 뭔지는 자세히 몰라도, 새해를 맞이하여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은 뒤 손을 쫙 펼친 호원이는 차키 모양으로 빨갛게 자국이 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랬을까…. 동우가 다른 남자와 대화를 나누든 말든 그 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눈웃음을 지으며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니 '질투'라는 몹쓸 것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바글바글 끓어오른다. 게다가 질투의 화신이 미움미움 열매를 먹이고 홀라당 도망갔는지 갑자기 한순경이 미워 보이기까지 한다. 안 돼, 이호원!!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이러면 안 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아아…, 만세로다, 만세…. 중얼중얼 염불을 외는 스님처럼, 목사님의 말끝마다 아멘, 이라고 말하는 신앙심 깊은 신도처럼, 호원이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를 악물고 애국가를 절박하게 읊었다. 그것은 마치, 송곳니를 번쩍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드라큘라를 멀리 쫓아내기 위해 십자가 목걸이에 간단한 입맞춤을 하고 마늘을 붕붕 휘두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질투심이여, 썩 물렀거라!
"어이, 이순경! 비 맞은 중처럼 뭐해?"
깜짝 놀래키기 위해 호원이의 어깨를 잡아 빙글 돌려세운 동우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살피면서 시선을 맞췄다. 새해부터 애국심이 바글바글 끓어 넘치시나 봐, 응~? 그러고는 대답을 종용하는 장난꾸러기처럼 양쪽 눈썹을 불끈 들어올렸다. 동우의 그런 귀여운 모습에 눈 녹듯이 질투가 사그라진 호원이는 슬쩍 웃어 보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하자마자 출동할 생각에 애국심이 펄펄 끓어 넘치네요."
말을 하면서 동우의 눈앞에다가 차키를 흔들어 보이자, 눈동자로 몇 번 쫓더니 잽싸게 낚아채는 동우였다. 그러더니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코코아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오늘 날씨 춥대애~"
말끝을 늘리며 약 올리듯이 말하는 동우가 또 한 번 귀엽게만 느껴진 호원이는, '앙!'하고 깨물어주고 싶다는 충동에 잠깐 휩싸였다. 아주 그냥 바지를 홀라당 벗겨서 엉덩이를 깨물어주고 싶…. 아, 이건 너무 위험한 상상인가? 나 왜 이러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입가에 헛웃음이 번지려고 한다.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호원이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마음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면서 차가운 손으로 코코아를 건네받았다.
"코코아큐 땡큐!"
호드립이 섞인 간단한 인사를 뒤로 하고 시선을 내리깔아 종이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호원이었다. 그 안에서 찰랑이고 있는 코코아가 달짝지근한 내음을 솔솔 풍기고 있었다. 으하하하!!!!! 코코아큐 땡큐래!!!!!! 차마 큰소리로 웃을 수 없어 음소거로 한바탕 웃은 동우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으면서 물음을 던졌다.
"근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래?"
"별 거 아니야. 눈 때문에 차량 두 대가 충돌해서 운전자들끼리 싸움이 났대. 그러니까 와서 해결해달라고 그러네."
어찌된 건지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관할 지역 주민들의 다툼이 사그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빙판길 접촉사고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지구대에 걸려오는 전화 내용들은 언제나 늘 그랬듯이 여전했다. 다들 연초부터 뭘 그리 싸워대는지, 원…. 세상이 두 쪽 나거나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이상, 새해를 맞이한 경찰관의 일상이 달라지는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음…. 새해랍시고 괜히 일찍 출근했나?
오만가지로 복잡한 호원이의 생각을 읽었는지 동우는 힘을 실어주기 위해 어깨를 팡팡 두들겨 주었다. 화이팅!
"그래, 화이팅. 와달라고 부르는데 어쩌겠어…. 얼른 달려가야지."
말을 마친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탄을 길게 내뱉은 호원이가 그 순간 아차 싶었는지 자신의 입을 텁, 하고 막았다. 1층으로 내려왔다가 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명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기억을 되짚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를 본 호원이의 머릿속에는 '망했다'라는 세 글자가 TV 프로그램 자막처럼 휘리릭 스쳐 지나갔다. 대체 언제 내려온 거지? 걱정되어 옆을 슬쩍 바라본 호원이는 자신처럼 얼어붙은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 동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명수는 의경 시험에 통과한 똑똑한 머리로, 저장 되어있던 기억들을 그 빠른 시간 안에 모두 훑었는지 고개를 들어 호원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검지와 중지만 V자로 쭉 뻗더니 긴장으로 침만 꿀꺽 삼키고 있는 그와 재빠르게 상황 파악 중인 동우를 동시에 가리켰다.
"두 분…. 서로 반말하는 사이셨어요?"
탕!!!! 어디선가 권총 쏘는 소리와 함께 해골폭탄 그림이 호원이의 왼쪽 심장에 떡 하니 박히는 기분이었다. 윽…, 눈치 빠른 놈.
'내 이름은 명수. 탐정이죠.'
마치 알이 큰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똑똑한 척 말하는 만화 주인공처럼, 명탐정 뺨치는 그의 기억력에 더 놀랄 틈도 없이 별안간 '딱'하고 호원이 머리에 꿀밤이 떨어졌다. 으악!!! 어찌나 세게 쥐어 박혔는지, 샛노란 별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쏟아지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픈 곳을 싹싹 매만지며 옆을 돌아보니 동우가 한 손에 주먹을 쥔 채 서있었다. 사실 말이 좋아서 '주먹'이지, 가운데 손가락 마디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걸 보니 '흉기'라고 인식해도 무방했다.
그동안 온순한 모습만을 보여 왔던 장경장이었기에, 그가 폭력 행사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명수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띠용, 하고 튀어나올 듯이 휘둥그레지고야 말았다. 그 틈을 타서 명수의 표정을 힐끔 살핀 동우는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호원이에게 꿀밤을 세게 먹였다.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르게 해줬더니, 공과 사를 구분 못하네.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딱!!
"으악!"
"당장 출동이나 나가!!"
동우가 웃음기 쫙 뺀 얼굴로 출입문을 가리키자,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고 말하는 호원이었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코코아를 한 입에 싹 털어 넣은 뒤 동우가 쥐고 있는 차키를 건네받았다. 한순경님, 우리 이제 나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출동장부를 쓰고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재호 순경이 모자를 고쳐 썼다.
"예, 그럽시다."
출동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정녕 무엇을 본 건가?' 싶어 잠시 얼어있던 명수는 도리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와…. 장경장님도 화내실 때가 다 있네. 애당초 그럴 생각도 없었다지만, 만에 하나 장경장님한테 개겼다간…. 으…. 세상만사 때 묻지 않은 천사처럼 마냥 해맑게 웃던 그가 난데없이 엄한 빛을 띤 얼굴로 말하던 걸 떠올리니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역시 조용한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란 걸 다시금 절실히 깨달은 명수였다.
*
"장경장님께 맞은 곳은 괜찮아요?"
"예, 괜찮아요. 머리통이 함몰된 것 같은 느낌만 빼면요."
아직도 욱신거리는지 호원이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빡빡 문지르면서 피식 웃어보였다. 이를 보고 똑같이 웃은 한순경은 키를 꽂아 순찰차 시동을 켰다. 아니, 그러길래 반말을 왜 했어요? 웃음기가 풀풀 묻어나는 질문을 받자, 호원이는 괜스레 애드리브를 치고 싶은 욕구가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그러게요. 장경장님 손이 '드릴'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아, 네."
호원이의 난데없는 드릴드립에 웃음기를 싹 거둔 한순경이 무표정으로 기어를 넣었다. 그러자 스트레칭을 하다가 뼈에서 나는 소리처럼 뚜둑거리며 기어가 들어갔다. 그 소리를 들은 호원이는 정면을 빳빳하게 응시하며 꼴깍, 하고 침을 삼켰다. 왜냐하면 그의 귓가에 파고드는 기어 소리는 마치 '그딴 드립은 용서 못해.'라고 한순경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 같다.) 그의 생각을 알 턱이 없는 한순경은 차도로 빠지기 위해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면서 핸들을 한쪽으로 돌렸다.
하…. 호드립 실패!
*
☜ 「으미... 어떡하지... 아까 때려서 미안ㅠ! 진심 아닌 거 알지요~.~?」
☞ 「알아ㅋㅋㅋ 근데 인간적으로 너무 셌잖아^^..」
☜ 「으흐흐~ 대신 내가 위기에서 구해줬자나아~.~!!!」
☞ 「ㅋㅋㅋㅋ맞아. 너 아니면 나 진짜 간 떨어질 뻔 했다ㅋㅋ 우리 동느님 최고!!! 동지지~」
☜ 「호~~지지~.~」
☞ 「아 근데 나 어떡하지? 이제야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섰는데 벌써부터 니가 보고 싶네..」
☜ 「나도ㅠ... 이상하게 오늘따라 보고 싶어도 너~~~무 끌리네~ 차안에서 따숩게 몸 녹이다가 내령ㅋㅋㅋㅋㅋ」
☞ 「이미 다 녹였으니깐 내 걱정은 말고. 이제 일 처리해야 돼서 답장 못해ㅠㅠ 미안해~ 30분 뒤에 보자!! 사랑해」
☜ 「~♥~」
☞ 「아!!! 그리고 딴 남자 앞에서 그렇게 웃지마. 나 질투나 죽음!!!!!」
☜ 「~3~」
흐뭇한 미소로 화면을 끈 동우는 책상 위에 휴대폰을 올려놓은 뒤 머리 위로 두 팔을 쭉쭉 뻗으면서 기분 좋은 기지개를 켰다. 찌푸둥한 2012년의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새로운 기운이 온몸 여기저기 스며드는 것 같다. 그리고 감히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새해 첫날부터 사랑이 으쌰으쌰 샘솟는다. 뭔가 거창하지는 않아도 호원이만의 진심이 느껴져서 너무나도 행복하다.
이때 마침 지구대의 유리문이 벌컥 열리면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나 죽네, 나 죽어!!!"
"흐어억…. 아이고, 나 죽네, 나 죽어!!!"
상체를 숙이고 숨을 잠시 고르다가 동시에 똑같은 말을 외친 성규와 성열이는 서로를 아니꼽게 째려보았다.
"아, 나…. 새해부터 진-"
또 다시 같은 말을 내뱉자, 둘은 짜증난다는 듯이 고개를 서로 반대편으로 돌리고 중얼거렸다.
"재수가 없-"
아……. 본의 아니게 3콤보를 달성했다. 평소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견원지간 사이인 두 사람을 잠자코 지켜보던 동료들은 낄낄거리며 얇실하게 웃었다. 작년에는 두 분이서 죽어라 티격태격하더니 올해는 좋은 조짐이 있으려나 봐요. 누군가 농담을 던지자 동의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 사이에서 함께 웃고 있던 김승수 순경은 시선을 돌리다가 우연찮게 벽시계를 보고 궁금증이 떠올랐다.
"시계 보니까 출근시간이 10분이나 남았는데,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오셨어요?"
그러자 헥헥거리며 서로를 마주보는 성규와 성열이었다. 그들의 뺨은 주머니괴물이라는 만화 속 주인공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
"……."
"……."
'출근길'이라 쓰고 '지옥행'이라고 읽는 버스에서 사람들 사이에 푹 파묻힌 성규와 성열이. 그 둘은 서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침묵을 유지하며 뒷문에 얌전히 서있었다.
새해 첫날부터 쏟아진 폭설 때문에 성규는 또 한 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교통 이용은 이번이 세 번째였지만, 인파가 많은 무한역에서 빠져나와 버스를 탄다는 것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례를 지키며 간신히 버스에 올라탄 성규는 버스카드를 찍자마자 뒷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 얼떨결에 뒷문 한 가운데에 도착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어차피 한 정거장 뒤에 내리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림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 숙지해 놓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한 '것'은 바로 이성열! 언제 탔는지, 그는 성규의 바로 옆에서 버스 봉을 붙잡고 서있었다. 아…. 성열이란 것을 확실히 인지한 성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탄식을 내뱉은 건 성열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한역에서 간신히 나온 뒤 뒷문으로 버스를 탔는데 하필 옆에 선 사람이 김경위라니…. 아…. 다른 자리도 많은데 왜 여기 와서 서고 난리람? 머릿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성열이의 반쪽짜리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성규가 말을 걸어온 건 그 때였다.
"이순경. 원래 이 버스 타고 다녀요?"
"네. 근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성열이가 마구 싫은 티를 내면서 건성으로 대답하자 성규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이 버스 안타고 다니게요."
그 말에 발끈한 성열이는 '참나~ 그래요, 타지 마세요~ 제가 타는 거 타지 마세요!!'라며 책상에 선을 긋는 초등학생처럼 유치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버스가 다음 정거장에서 잠시 멈췄다가 출발하여도 두 사람은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슉슉 스쳐가는 창밖의 하얀 풍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 정류소는 '무한 몽료리움'입니다. 다음 정류소는 '무한고 몽료리움 아파트 입구'입니다.]
슬슬 내릴 때가 되었는지 성열이가 잡고 있는 봉에 붙은 버튼으로 손을 뻗는 성규였다. 그 순간 성열이가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띵-동, 띵-동. 빨간불이 들어오며 하차를 알리는 낭랑한 소리가 버스 내에 울려 퍼졌다. 기가 막힌 환상의 블로킹이었다. 놈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든 성규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눈빛으로 태워 죽일 듯이 째려보았다.
잠시 후 내릴 때가 임박해 오자 성열이는 주머니에 넣어둔 교통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단말기에 찍기 위해 성규가 서있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좀 전에 당해서 단단히 벼르고 있던 그가 매의 눈을 번뜩이며 재빠르게 본인의 카드를 찍었다. 띠-딕. 성규의 교통카드 잔액이 단말기 화면에 빨간 숫자로 떴다. 기가 막힌 환상의 블로킹2였다. 성열이 또한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눈이 까지도록 그를 노려보기에만 바빴다.
이윽고 버스 문이 열리고, 성규는 세상에서 가장 도도한 표정으로 먼저 내렸다.
*
"……거기까진 잘 알겠는데 왜 헐레벌떡 들어온 건데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동료들 중 하나가 물음을 던졌다. 버스에서 신경전을 벌인 것과 헐떡이며 지구대에 들어선 게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동우도 공감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러니까…. 자세한 설명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 성열이는 다시 생각해봐도 뚜껑이 벌컥 열리는지 깊은 한숨을 뱉으면서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보며 이 때다 싶었는지 성규가 발언권을 가로챘다.
"버스에서 내린 뒤, 지구대를 향해 걷고 있는데 저놈의 이순경이 경보 하듯이 앞질러 가더라니까요?!"
다소 격앙된 성규가 억울하다는 말투로 옆에 있는 성열이를 가리키며 말하자, 성열이의 눈에서 뜨거운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저놈의 손가락을 확 그냥 부러뜨려버릴라…. 표정, 행동, 말투 등 3박자를 고루 갖춘 성규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성열이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들기더니 졸지에 배심원들이 된 동료들에게 하소연 하듯이 말했다.
"김경위님 뒷모습이 얄미워서 제가 앞질러 간 건 사실이에요! 근데 김경위님도 저를 앞질러 가더라고요!!"
엥?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어리둥절해진 배심원들은 성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맞아요. 저 또한 이순경의 뒷모습이 얄미워서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갔을 뿐이에요. 더 웃긴 건, 그걸 또 이 악물고 제친 이순경이죠!"
하하! 악마에 홀린 듯 사악한 눈빛으로 성열이를 지목하면서 웃는 성규였다. 성열이 또한 지고 싶지 않았는지 성규가 했던 말을 비슷하게 했다. 둘이서 1:1 탁구를 하듯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같은 유형이었다. 상대방의 뒷모습이 얄미워서 더 빠른 발걸음으로 상대방을 제쳤다는 것. 그러다보니 지구대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달리기 경주를 하는 것 마냥 우사인 볼트처럼 죽어라 뛰었던 모양이다. 사실을 알게 된 배심원들은 한심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혀를 끌끌 차면서 본인이 있던 자리로 하나 둘 흩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성규와 성열이는 새해 첫 날부터 서로를 마주보며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 거렸다.
*
에라이, 썩을 놈의 새끼…. 보는 눈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성규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성열'이란 인물은 백 번 갈아 마셔도 백 번 시원찮은 그런 존재였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눈을 번뜩이면서 속을 박박 긁고, 처절하게 응징하면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후련하지가 않은, 딱 그런 존재. 다음번에 또 한 번 걸리기만 해봐라. 그땐 계급장 떼고 백병전투다! 아주 그냥 거시기에다가 정권을 팍 찔러줄 테다!! 팍!!!
강력한 정권 찌르기 한방으로 맥없이 나가떨어진 성열이가 거시기를 부여잡으면서 바닥을 이리저리 나뒹구는 상상을 하니 내심 짜릿하면서 행복하다. 빨리 그런 날이 오거라…! 성규는 마치 피에 굶주린 전설의 파이터처럼 끓어오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뜬금없이 질투심에 사로잡혔던 호원이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의자에 삐딱하게 앉은 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무협영화를 한 편 찍고 있던 성규는 패딩점퍼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걸 느꼈다. 휴대폰을 후다닥 꺼내어 확인해보니 모바일 메신저가 와있다.
「새로운 메시지가 있습니다. (2)」
뭐지? 누나가 돈 빌려달라고 보냈나?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확인 버튼을 누르자 대화창이 펼쳐졌다.
「김경위님 ~! 남우현이에요=_=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반드시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_=!!!」
응? 뭔가를 잘못 읽었거니 싶었는지 성규는 왼눈을 비비고 화면을 바라봤다. 다시 읽고 또 읽어봐도 보이는 건 '반드시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_=!!!'라는 문장…. 왠지 모르게 허탈해진 성규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의 나이를 곱씹어 보았다.
어느덧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요, 조금 있으면 서른이었다.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아직 좋은 여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통장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월급으로 신혼집 한 채를 사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집은 대출 받아서 구입하면 된다지만, 일단은 직업이 경찰인지라 한가하게 여자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함정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여자가 있어야 집을 사고 그러는 거지, 집을 마련해놓고 여자를 사귀는 건 아니지 않는가?
아…. 어쨌든 3년 안에 장가가기는 글렀단 거네. 암울한 미래에 대해 결론이 나자 성규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여간 이놈의 '남봉꾼'이 오래오래 살란 말만 안했어도 지금처럼 기분이 축 쳐질 일이 없었을 텐데….
*
주변을 싹 훑은 뒤 휴게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성열이는 남은 팔을 야상에서 빼내며 패기 넘치게 외쳤다.
"에~라이, 썩을 놈의 김경위!!!"
그러고는 락커 안에서 옷걸이를 하나 집더니 신경질적으로 빨간 야상을 걸었다. 주인님이 진노하신 걸 눈치 채고 기가 죽었는지 야상의 한쪽 어깨가 옷걸이에서 미끄러졌다. 애지중지하는 외투가 삐딱하게 걸린 것을 확인한 성열이는, 얘는 또 왜 이러는 거냐고 툴툴대면서 똑바로 고쳐 걸었다.
그나저나 오늘 일을 계기로 크나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는데, 그건 바로 '같은 하늘 아래 초딩이 둘일 순 없다.'는 것이다. 유치함으로 흥한 자는 유치함으로 무너지는 법…. 내 기필코 반드시 김경위를 무너뜨리리! 주먹을 꽉 쥐고 굳건한 다짐을 한 성열이는 경찰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입고 있던 베이지색 니트를 훌러덩 벗었다. 하악…, 대박 춥다!!!! 찬 기운이 온몸을 휘감자 코를 찡그리더니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그만큼 추워 죽겠으면 옷을 얼른 갈아입으면 되는데 바보같이 방방 뛰느라 정신없는 성열이었다. 얼마나 추운지 괴상한 소리까지 내지른다. 우갸! 우갸!! 우갸갸갸!!!
한참이나 오두방정을 떨던 그는 락커 안에서 연회색빛이 감도는 셔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전증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덜덜덜 떨면서 셔츠를 벗겨내더니 팔을 껴서 입었다. 단추를 잠그면서도 손이 덜덜덜…. 누가 보면 어디 아픈 줄 알겠다. 셔츠를 간신히 입은 그는 사선 무늬가 있는 넥타이까지 맸다. 여기까지 하고 락커 문짝에 붙어있는 거울을 들여다보니, 궁서체로 '이성열 LEE'라는 이름표를 달고 계신 훈훈한 남정네 하나가 담겨있다.
"크…! 절세미남!!"
거울 속 자신에게 찡긋, 윙크를 한 성열이는 동복 점퍼를 입기 위해 락커 내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대충 집어넣은 바지와 모자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로 증발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1층에 있는 본인 의자에다가 걸어놓고 퇴근한 게 떠올랐다. 아이고~ 망했다~ 추워서 점퍼 좀 걸치고 바지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1층에 있다니~~ 나는 망했다~~ 자신을 탓하며 신세타령을 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바지를 꺼내들었다. 확 그냥 마음 같아서는 청바지 위에 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 성열이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청바지를 벗었다. 하악…, 다리 시려워!!!! 사각팬티 안에 봉인된 채 모나리자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종대왕과 그의 극세사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어? 이순경님, 여기 계-"
때마침 휴게실로 들어온 명수는 성열이의 중심부 근처에서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세종대왕을 보고 깜짝 놀랐는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건 성열이 또한 마찬가지. 둘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휴게실이 떠나갈 정도로 동시에 소리 질렀다.
"끼야아아ㅏ아아아아아앙아아ㅏ아악!!!!!!!!!!!!!!!!!"
"으아아아아아아ㅏ아아앙아앙ㅇ아아악!!!!!!!!!!!!!!!!!"
"낑야야야아아아, 이 변태 자식아!!!!!!!!!!!!!!!"
성열이는 바닥에 있는 자신의 청바지를 주워들더니 명수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나guy새끼야!!!!!!!!!! 직선으로 날아온 청바지에 얼굴을 정확히 맞은 명수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얼굴에 붙은 것을 떼어냈다. 그렇게 떼어 내고 보니 청바지에는 주인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이게 뭐야!!!
"으아아아아아아ㅏ아아앙아앙ㅇ아아악!!!!!!!!!!!!!!!!!"
징그러운 벌레를 본 것 마냥 눈이 휘둥그레진 명수는 바닥에 바지를 내리꽂더니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갔다.
*
새해 첫 날을 맞이하여 일찍 일어나 침대에서 뒹굴 거리던 우현이는 곧바로 온 성규의 답장을 받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오래오래 살어리랏다」
「나이랑 복 먹고 오래오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와…. 역시 서울대랑 견준다는 경찰대 출신이라서 그런가? 말하는 품격이 남다르네. 우현이는 성규의 고상한 답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더니 휴대폰을 껴안은 채 허공에다가 대고 발을 버둥버둥 거렸다. 아~ 완전 좋아!!!!!! 김경위님은 뭘 먹고 자랐기에 답장도 어쩜 그리 귀엽게 할까? 아이고, 귀여우셔라~ 깊은 행복감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방문이 느닷없이 벌컥 열렸다.
"남우현. 기상 완료?"
우현이의 형인 부현이었다. 하늘 자전거를 타는 듯한 모양새로 누워있는 동생을 확인한 그는 진한 한숨을 쉬더니 방 문고리를 잡은 채 짝다리를 짚었다.
"쇼를 해라, 쇼를 해…."
쯧쯧쯧…. 정말 한심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형의 냉담한 반응에 잔뜩 무안해진 우현이는 잠긴 목을 에헴, 하면서 풀더니 잠깐 멈췄던 하늘 자전거를 이어서 타는 척 했다. 이제 계사년이라고 새로운 마음으로 운동하는 거 안보여? 근데 다짜고짜 쇼라니…. 형님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아우님은 섭섭해~ 능청스레 맞받아친 그는 노크도 없이 들어온 형을 죄인 취급하며 이유를 물었다.
"왜 들어오긴…. 떡국 먹으라고, 떡.국."
떡국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강조한 형은 얼른 나오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폭풍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우현이었다. 부현이가 해준 떡국 이즈 쏘~오 딜리셔스!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은 부현이는, 대체 너한테 있어서 맛없는 게 뭐냐고 하더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추고는 한 가지 사실을 덧붙였다. '근데…, 엄마가 요리한 거야.'라고 말이다.
"아, 그럼 안 먹을래."
"엄마가 오랜만에 솜씨 발휘한 건데, 왜?"
딱 잘라 말하는 동생을 여차하면 강제 연행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온 부현이는 엉덩이를 반쯤 걸쳐 침대에 앉았다. 이렇게 특별한 날 아니면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언제 아침 식사를 하겠어, 안 그래?
"아니, 인간적으로…. 엄마 요리 솜씨는 형이 더 잘 알잖아."
그 말을 들은 부현이는 흠흠, 하고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아, 뭐…. 그건 잘 알긴 하지. 그래도 눈 한 번 딱 감고 맛있게 먹어주자. 떡국 한 그릇 먹는다고 장이 베베 꼬여서 죽는 것도 아니고, 식중독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우현이를 식탁 앞에 앉히기 위해 살살 달래던 그는 침대에 놓인 채 화면이 켜져 있는 동생의 휴대폰을 보았다. '김경위님'이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흔적이 있는 모바일 메신저가 켜져 있었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얄라?"
성규가 보낸 내용을 형이 한 소절 읊자, 재빨리 휴대폰을 주워들어 화면을 끄는 우현이었다. 그러고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강아지처럼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동안 함께한 가족한테는 그런 개수작이 먹히지 않는 법. 그의 행동이 오히려 의심을 부추길 뿐이었다.
"참나~ 야, 뭔데 그렇게 숨기고 난리냐? '김경위님'이라는 사람이 누구길-"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부현이는 동생이 방심한 틈을 타서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더니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휴대폰을 휙 잡아챘다. 아싸뵤!!!!!!!!!! 날아갈듯이 기쁜지, 휴대폰을 쥔 채 머리 위로 만세를 하면서 승리의 쾌재를 부르짖는다. 아, 형!!! 내놔!!!!!! 우현이는 휴대폰을 되찾기 위해 형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다급하게 달려들어 보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이놈의 남씨들은 굼벵이를 삶아 먹었는지, 밥 차려 놓으면 꼬~~옥 제때 제때 안 나와요~]
바깥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나가요~'라고 크게 대답한 부현이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주방으로 뛰쳐나갔다. 아이씨…. 혼잣말로 궁시렁거린 우현이가 그의 뒤를 따라 마지못해 주방으로 나갔다.
"아, 남부현!!!!!!!"
미운 일곱 살처럼 금방이라도 바닥에 드러누워 땡깡 부릴 기세로 투덜거린 그는 주방으로 나오자마자 아빠에게 혼이 나고 말았다.
"형한테 남부현이 뭐냐, '남부현'이…. 응? 너보다 나이도 많은데 그런 식으로 형 대접할 거야?"
"억울해! 형이 내 휴대폰 뺏어갔단 말이야…. 아빠, 형 좀 혼내줘!!"
약이 바짝 오른 아이처럼 유치하게만 구는 동생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부현이는 휴대폰을 돌려줬다. 나오라고 할 때는 죽어라 안 나오더니, 이거 뺏으니까 바로 나오고 효과 좋네! 옜다, 받아라. 그리고 나온 김에 얌전히 앉아서 떡국이나 먹어. 휴대폰을 받아든 우현이는 식탁 의자를 빼더니 형을 흘겨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 모든 게 식탁으로 인도하기 위해 꾸민 형의 계략이었나 보다. 덕분에 꼼짝없이 엄마표 떡국을 먹게 됐다. 숟가락을 들며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씩씩하게 인사하는 부현이와는 달리, '잘 먹겠습니다.'라고 우중충하게 말하는 우현이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엄마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자신이 없는 모양이다.
의연하게 떡국을 제일 먼저 한 숟갈 뜨신 아빠는 꿀꺽 삼키자마자 피를 토하는 사람처럼 쿨럭 거리셨다.
"여…여보…. 물 좀…! 쿨럭, 쿨럭…."
엄마가 물을 가지러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식탁을 두고 마주 앉은 남씨 형제는 불안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빠의 장렬한 전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라고 말이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포커카드처럼 여러 개의 선택지가 있지만 아마도 가장 유력한 답은 '엄청 짜다.'일 것이다. 아아…, 아직 숟가락도 쥐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먹기가 두려워진다.
"아! 하마터면 까먹을 뻔 했네. '김경위님'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야?"
간신히 숟가락을 쥐고 떡국에 둥둥 떠 있는 떡들을 뒤적거리던 우현이는 갑자기 날아든 형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하하, 형드 참~ 그른 글 왜 여기스 묻그 그래…. 상황을 대충 넘기기 위해 이를 악 물고 애써 웃으면서 말하자, 식탁에다가 빈 컵을 내려놓으신 아빠가 한 몫 거들었다.
"경위? 경위라면 경찰대 출신 경찰이 아니냐?"
그러자 화들짝 놀란 부현이가 아빠를 바라봤다. 뭐? 경위가 경찰이야?
"그래. 경찰 간부들 중에서 계급이 제일 낮은 경찰이지. 근데 경찰공무원시험으로 경찰이 된 사람들은 평생을 바쳐 일해도 결코 경위가 될 수 없어. 현직에 오래 있어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경사들이라도 경위 앞에서는 꿈쩍도 못하니…."
"우와~ 그럼 내 동생이 그런 사람이랑 카톡하고 그러는 거야?"
"어머, 카톡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래? 우현이 친구들 중에서 경찰대 들어갔단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가족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리자 우현이는 뒷목을 긁적였다.
"아, 그런 게 있어요~ 작년 여름방학에 알게 된 경찰이…."
그 말을 듣자마자 떡국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숟가락으로 곧장 동생을 지목하는 부현이었다. 야, 뭐야…. 혹시 네가 저번에 말했던 전여친 닮았다는 사람이야?
끄덕끄덕. 순순히 대답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지난번에 우연히 엿들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쫙 펼쳐진다.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김성규씨?'
*
성열이의 명령으로 인해 벽을 바라보면서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 있던 명수는, 슬슬 지루함을 느꼈는지 곁눈질로 뒤를 슬쩍 쳐다봤다. 다 입었어요?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야, 눈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생각하는 벽에 시선 고정한다, 실시."
옙! 잠깐 곁눈질을 했을 뿐인데도 귀신같이 집어내는 성열이 때문에 흠칫하고 놀란 명수는 뚫어져라 벽을 쳐다봤다. 이순경이 팬티 쪼가리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는 모습을 두 번 다시 기억에 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순경은 얼마나 말랐는지, 보는 사람의 하체마저 휑한 느낌이 들 정도라서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아! 혹시나 독자들이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뭐 그렇다고 휑한 느낌이 안 나면 보고 싶다는 그런 변태적인 뜻은 결코 아니었다! 나 김명수를 대체 뭐로 보고…. 그나저나 내 눈은 무슨 죄람? 못 볼 걸 담아낸 안구에게 작게나마 보상을 해주고 싶었는지 손으로 비비적거리는 걸로 대신한다.
"근데 이순경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이호원 순경님이랑 장동우 경장님은 원래 친한 사이에요?"
그러자 거울을 보며 모자를 눌러쓰던 성열이가 동작을 멈추더니 벽을 보고 있는 명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난 잘 모르겠는데, 왜? 뭐 본 거라도 있어?"
"아까 아침에 볼펜 가지러 1층으로 내려갔다가 두 분이서 반말로 스스럼없이 대화하시길래…. 아님 말고요. 그냥 한 번 물어봤어요."
"둘이서 반말을 했다고?"
멈췄던 동작을 푼 성열이는 명수에게 이제 뒤돌아봐도 좋다고 했다. 오케이.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돈 명수는 성열이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이 아침에 본 장면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 반말했다니까요? 장경장님만 말 놓으시면 상관없는데, 이호원 순경님도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죠. 그러다가 제가 두 분이서 서로 반말하는 사이냐고 물어보니까 갑자기 장경장님이 표정을 싹 굳히시면서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르게 해줬더니, 공과 사를 구분 못하네.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라는 말과 함께 이순경님 머리에 꿀밤을 딱!!!!!"
명수가 성열이의 머리에 꿀밤을 딱! 때렸다. 집중해서 듣고 있다가 엉겁결에 얻어맞은 성열이는 똑같이 복수해주기 위해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러자 '어어? 때리면 뒷이야기 말 안 해줘요!'로 영리하게 협박하는 명수였다. 끙…. 그래, 안 때릴 테니까 계속 말해 봐. 주먹을 내린 성열이는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러고 나서 이순경님은 출동하러 나가시고 장경장님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상황 끝."
"…끝?"
"끝."
"하, 참나…. 야, 겨우 이딴 게 '뒷이야기'라는 거냐? 너 죽을래?"
이번에는 진짜로 때릴 것처럼 다시 한 번 주먹을 높이 들자, 기겁한 명수가 그의 양손목을 꽉 붙들고 저지했다. 아, 경찰이 선량한 시민 잡네!!!
"네가 시민이냐, 이 자식아? 너 군인이잖아!!!!!!!!"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안 좋았는데 마침 자~알 걸렸다. 너 죽고 나 죽자!!!! 180cm가 넘는 큰 키를 가진 성열이가 명수의 머리채를 잡는 걸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성열이에 비해 신체적으로 불리한 명수는 서울구경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빨간 천을 보고 흥분에서 달려드는 투우 소처럼, 눈에 불을 켜고 득달같이 덤비는 성열이에게서 벗어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리조리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 정신없이 티격태격하다가 더는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명수는 성열이의 손목을 있는 힘껏 붙들고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쿵! 그 바람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성열이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셋 셀 때까지 이거 놓으라면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명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디 쏴붙였다.
"제 말 똑바로 못 들었어요?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르게 해줬대잖아요!"
"그게 뭐 어쨌다고! 하나…."
"아, 진짜…. 대체 머리는 뒀다가 어디에 써먹는 거예요? 장식품인가?"
"둘…."
"'사석'이래잖아요. 사.석!"
그 말을 들은 성열이는 카운트다운을 세다가 멈췄다. 그리고 인피니트팰리스 사건 때 보았던 한 장면이 기억 저편에서 스쳐지나갔다. 허리를 숙인 채 빗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장경장님을 발견한 호원이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가던 것을…. '장경장님!'도 아닌 '동우야!'라면서….
"…사석?"
"그래요, 사석. 여기가 지구대라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회사나 마찬가지에요. 근데 직장 동료를 사석에서 따로 만난다는 건 무슨 의미인데요."
명수의 말이 이해가지 않은 성열이는, '직장 동료를 사석에서 따로 만난다는 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 그에게 시선을 맞춰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명수도 시선을 똑바로 맞췄다.
"이순경님은 다른 동료 분들과 사석에서 따로 만난 적, 있어요?"
"아…아니."
"근데 어떻게 이호원 순경님과 반말하세요?"
"그야…, 내가 먼저 말 놓자고 했으니까. 동갑이잖아."
"동갑도 아니고 선후배 관계 사이인 장경장님과 이호원 순경님이 서로 말을 놓을 정도라면, 대체 사석에서 몇 번이나 만난 걸까요?"
명수의 그윽한 눈빛을 바라보던 성열이는 이상하리만큼 점점 콩닥거려오는 마음을 좀체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시선을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이 야릇한 상황을 접기 위해 마무리성이 짙은 말을 했다.
"너…너, 장경장님이랑 호원이를 그런 식으로 몰고 가는 것 자체가 너무 축약한 것 같다. 일을 가르쳐 주다보니 친해진 걸 수도 있잖아? 이제 그만 하자."
그 말을 들은 명수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성열이와 눈을 맞췄다.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내가 뭘…."
"남자와 남자끼리 그런 게 가능하다 생각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지진지 열매를 먹은 듯한 성열이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슬며시 웃은 명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두 분이 친한지 궁금해서 정말 순수하게 물어본 건데 이순경님이 '뒷이야기'라는 것을 하도 궁금해 하시길래, 맞장구 쳐주는 식으로 그냥 장난 한 번 쳐본 거예요."
"아오, 씨…."
괜히 쫄았네! 긴장이 풀린 성열이는 또 장난친 거냐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목을 버둥거렸다. 백 날 그래봤자 놓아줄 리 없는 명수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벽에다가 갖다 붙였다.
"이런 뒷이야기를 원한 거 아니었어요? 남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성열이를 가만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명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성열이는 그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이를 악 물었다. 벌레가 온몸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듯, 이 상황이 간질간질해서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와, 나…. 돌아버리겠네….
이 때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순경은 옷 하나 갈아입는데 뭐 그리 오래 걸-"
말을 하던 남자는 다름 아닌 성규. 명수와 성열이가 벽에 달라붙어서 밀착한 상태를 보고 꽤나 당황했는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
이른 아침부터 낯 뜨거운 장면을 목격한 성규는 계단을 부랴부랴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쟤네 둘이 뭐하는 거야?!"
다 큰 사내 둘이서 왜 저러고 있는 거래? 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귀신에게 쫓기는 것 마냥 후다닥 내려가던 성규는 제 발에 걸려 철퍼덕 넘어졌다. 끄앙!!!!
*
지구대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버스가 지나가는 소음과 함께 앳된 얼굴의 두 사람이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근무가 시작되자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던 무한지구대 식구들은, 일에만 시선을 주면서 인기척이 들리는 곳을 향하여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무한지구대입니다~"
"저…, 교통 실습하러 온 경찰대생들인데요…."
경찰대생 중 유난히 귀엽게 생긴 학생이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모두들 손을 멈추고 일제히 그 곳을 쳐다봤다. 지구대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신기한 듯 지구대를 한 바퀴 둘러보고 있었다. 호원이 또한 팩스기 근처에서 하던 일을 멈추고 소리 나는 곳으로 돌아봤다가 깜짝 놀랐는지, 재빨리 주저앉아 팩스기 뒤에 안전하게 몸을 숨겼다.
'아참,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겨울방학에 형이 근무하는 파출소로 실습 나갈 거야!'
'되도 않는 농담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진짠데!!!!!'
'야, 이성종. 시끄러.'
아, 이성종…! 저게 진짜로 왔네? 내가 미쳐…! 골치 아픈 일이 생기자 호원이는 자학하는 것처럼 팩스기에다가 이마를 연신 쿵쿵 박아댔다.
"어? 너 세용이 아니냐?"
듣도 보도 못한 실습생들의 출현에 다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몇몇 경장들이 귀엽게 생긴 학생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거나 껴안아주며 반가워했다.
"잘 지냈어? 아버지는 잘 계시고?"
"네, 음식점 하나 개업하려고 준비 중이세요. 형들도 잘 지냈어요?"
"음, 뭐…. 너희 아버지께서 은퇴하시고 나서, 음…, 음…."
차마 말을 잇기 어려운지 뜸을 들이고 있는데, 위층에 올라갔다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굴러 내려온 성규가 불쑥 끼어들었다.
"왜요? 저 때문에 지내기 힘들었어요?"
"예? 어휴~ 아니요~? 더 편하게 지낸다고요~"
능청스럽게 상황을 모면한 경장들은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갑다.'란 말을 뒤로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나마 그들의 뒷모습을 아니꼽게 바라보던 성규는 표정을 싹 뒤바꾸더니 최대한 상냥한 미소로 경찰대생들을 바라보았다. 명찰을 보니 왼쪽에 서있는 학생의 이름은 '이성종'이었고, 오른쪽에 서있는 학생은 '오세용'이었다.
"둘 다 몇 학년이라고 했죠?"
"이제 2학년 올라가요."
"그럼 스물한 살?"
"아니요, 저희는 1학년 1학기 마치고 군대를 다녀와서 올해 스물 셋이에요."
"오~ 그러면 말썽 같은 건 안 부리겠네요."
군대까지 다녀온 실습생들이란 걸 알게 된 성규는 상당히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기동대에서 간부급으로 지내다 온 녀석들인데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여기서 말썽부리지는 않겠지…. 뒤를 돈 성규는 박수를 두어 번 치면서 동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여러분, 잠깐 주목해주세요! 그러자 모두들 그를 쳐다봤다.
"미리 말 안했는데,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여기서 실습을 하게 된 경찰대생들입니다. 이 학생은 이성종, 그리고 이쪽에 있는 학생은 오세용."
성규가 이름을 가르쳐주는 걸로 간단하게 끝내자 뒤이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세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실습생 오세용입니다.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려요."
여기저기서 박수가 짝짝짝 터져 나오고, 이번에는 잠자코 세용이 옆에 서있던 고양이상 얼굴의 학생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성종입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실습하겠습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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