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장동우 ! "
" 어 ?! "
생수박스를 옮기던 동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며 생수박스를 떨어트렸다. 우현과 명수,그리고 성규와 성열까지 4명이 우르르 동우에게 다가오고있었다.
" 너네..."
" 야,서운하게 전화도 안 받고. "
" 어,어.미안...근데 성규형까지 오셨네요...그리고... "
동우가 성열을 보며 묻자 옆에 있던 명수가 간단히 '이성열.우리랑 대충...동갑'이라고 소개했다. 바닥에 흩어진 생수들을 주어담은 우현이 박스를 번쩍 안아들었다.
" 이거 어디다가 놓으면 돼 ? "
" 저기 냉장고앞에.. "
" 우린 뭐 할 꺼 없어 ? "
" 괜찮은데... "
" 자꾸 서운하게 할래?그냥 가기전에 얼른 부려먹어.성규형이든 성열이든."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명수가 동우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그제서야 밝게 웃는다.
*
우현과 성규는 무거운 음료수 병과 그릇들을 나르고 있었고 명수와 성열이는 음식 준비를 돕고 있었다. 다만 자꾸만 성열이가...
" 야,이성열.그만 좀 줏어먹어. "
" 이거 먹으면 안돼 ? "
" 아니..그건 아닌데...내가 나가서 더 맛있는 거 사줄께.지금은 먹지마."
" 알았어... "
말은 그렇게 하면서 땅콩 몇 개를 입안으로 털어넣는다. 진짜 못말려. 도우미 아주머니가 아직 오시지않은 상태라서 동우네 가족 몇 명이 이 드넓은 장례식장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4명이 몰려오자 눈에 띄게 속도가 빨라졌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 8시를 넘어갔고 서서히 출출해질때쯤 동우의 고모가 조용히 동우를 불렀다.
" 이거 받아."
" 이게 뭐에요 ? "
고모가 건넨건 오만원짜리 두 장이였다. 심부름인줄만 알고 동우가 돈을 받아들자 고모가 친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 친구들 출출할텐데 나가서 뭐 사먹고 와. "
" 아니에요 ! 괜찮아요. "
" 너는 괜찮을지몰라도 친구들 맘은 모르는거야. 친구들 덕분에 일찍 마무리됐으니깐 얼른 가봐. 고모가 미안해서 그래. "
" 그래도 십만원씩은 필요없는데... "
" 얼른."
돈을 주머니에 넣은 동우가 테이블 정리를 마치고 구석에서 티격태격하고 있는 성열과 명수에게 향했다.
" 너네들 출출하지 ? 대충 정리도 다 끝났으니깐 뭐 먹으러가자. 나도 저녁 안 먹었거든."
" 그래 ! 좋아 ! "
" 아오...식충이."
명수와 성열이 투닥거리며 병원을 나섰고 동우는 성규와 우현을 찾아나섰다.
*
" 아,무거워.계단 어떻게 내려가냐."
" 그거 이리줘봐. 끄응차."
무거운 음료수 박스를 들고 우현이 끙끙대자 박스를 뺏어들은 성규가 대충 주위를 살피고 두둥실 날아올라 계단 밑으로 시원하게 박스를 옮겼다.
" 오,김성규 ! 힘 좀 쓴..."
성규에게 칭찬을 하려고 다가가던 우현의 표정이 똥을 한 숟갈 퍼먹은 것 마냥 굳어졌다.
" 바,방금..."
눈을 꿈벅꿈벅거리는 동우가 방금전까지 날라다녔던 성규를 가리켰다.
*
보글보글감자탕~지글지글감자탕~보글보글감자탕~지글지글감자탕~김명수~멍청이~멍청이~
성열이 앞치마를 메고 젓가락을 든 채 반찬그릇을 두드리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명수는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성열의 손을 잡아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테이블위에 얹어진 감자탕은 맛깔나게 보글거리고 있었다.성열이가 부르는 노래 가사를 대충 들어보니 제목은 아마 '감자탕song(feat.김명수멍청이)'인 것 같았다.
이제 동우도 성규와 성열의 정체를 아는 관계자가 됐다.
처음부터 불신하며 또라이 취급을 한 우현과 명수와는 달리 아직 동심이 때묻지않고 살아있는 동우는 짧고도 긴 이야기를 듣는 내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우현이 이야기 끝에 자신과 성규의 관계를 말했고 그 역시 동우는 축하한다며 흐헝헝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 그럼 진짜 나이는 몇 살이에요 ? 500살 ? "
" 아니. 우린 나이의 개념은 없어.그냥 너네들 편하게 인간세상으로 따지는거지.동우, 니 말대로 우리가 몇 백살이 될 수도 있고 몇 천살이나 될 수도 있어. 근데 인간세상으로 따지자면 24살이고 성열이는 18살."
" 그럼 성열이는 우리보다 동생이에요 ? 아...아닌가 ? "
" 야,얘가 우리나라 전국민이랑 동갑먹는애야."
명수가 뼈를 가지고 씨름을 하는 성열을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동우가 대충 이해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아이씨,이거 어떻게 먹는거야. 왜 어디서 먹다남은 개뼉다구만 준건데."
" 이건 개뼉다구가 아니라 돼지 뼉다구거든 ? 기다려봐."
뼈를 건져 자신의 그릇에 놓은뒤 살을 쏙쏙 발라낸 뒤 성열에게 건네자 성열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우현도 성규에게 살을 골라 줬지만 입맛에 안 맞는지 감자탕집 입구에 있는 아이스크림통에서 아이스크림만 잔뜩 퍼와서 먹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성규의 머리를 쓰담쓰담하자 양 쪽을 번갈아보던 동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을 들이켰다.
*
" 후아. 잘 먹었다. "
5명이 우루루 감자탕집에서 나왔다. 서울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보기란 드문 일인데 오늘은 밤하늘이 온통 별천지다.
나란히 감자탕집 앞에 서서 밤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었다.
" 같이 있어주고 싶은데 학교때문에 어쩔 수가 없네. 미안하다."
" 됐어. 그래도 덕분에 훨씬 수월해졌는데,뭘."
" 학교는 다음주에 나오는 거야 ? "
" 응. 어차피 내일모레면 주말이잖아."
" 오케이.그럼 내일 학교끝나고 다시 올께."
" 안 와도 되거든~ "
" 오늘은 도와주러온거고 내일은 인사하러 올꺼거든 ? "
" 알았어.그럼 내일봐.오늘 고마웠어! 성규형도요 ! 성열이도 ! "
서로 손을 흔들며 헤어지고 동우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어느새 오후 10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감자탕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걸 보자마자 서둘러 길은 건넜다. 횡단보도 중간쯤 왔을때, '야식배달'이라고 쓰여진 오토바이가 코너를 돌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신호를 무시하고 동우에게 들이닥쳤다.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에 동우가 주춤거릴때 누군가가 갑자기 동우를 감싸고 얼른 인도로 몸을 피했다.
" 치이고 싶어서 용을 쓰는구나."
" 가,감사합니...어,형 ! "
동우가 호원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 요즘에 겁나 자주 만나는 것 같아요 ! 근데 언제부터 내 뒤에 있었어요 ? 안 보였는데..."
" 안 보인게 아니라 못 본 거겠지."
" 그게 그거죠,뭐."
호탕하게 웃는 동우를 보며 호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 근데 형 이름은 뭐에요 ? 저번에 이상한 말만 하더니 먼저 슥 가버리고..."
" 내...이름 ? "
" 네. 형은 내 이름 아는데 나만 형 이름 모르잖아요. 불공평하게."
" 내 이름... "
이름을 말해줘도 될까 ?
" 내 이름은 말이야... "
얘는 인간인데...
" 이호원.내 이름. "
얘한테는 괜찮겠지.
*
우현과 성규가 손을 잡고 나란히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찌르륵거리는 풀벌레소리가 뭔가 야릇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 ...야."
" 응 ? "
" 뽀뽀."
" 어,어 ? "
'쪽'짧지만 우현의 입술이 성규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실 아까부터 하고 싶은걸 꾹 참아왔었다.입술을 몇 번 만지작거린 성규가 부끄러운듯이 괜히 딴청을 피우자 또 그 모습이 그렇게 이뻐보인 우현이 한번 더 입술에 뽀뽀를 했다.
" 아이..하지마.."
" ...싫냐 ? "
" 아니..싫은 건 아닌데.."
'거리에서 이러면 좀...'하며 성규가 볼을 붉히자 그게 괘씸했던지 '야,됐어'하며 갑자기 먼저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우현아,화났어 ? "
" 아니.별로."
" 화 안 났다면서 갑자기 왜 그래... "
저렇게 인상을 퍽퍽 쓰고 있으면서 고릴라같은 말투로 ' 아니,별로'라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성규가 우현의 팔에 흔들흔들거리며 매달렸다. 우현의 콧구멍이 실룩실룩거렸다.
" 싫은 게 아니라 쑥쓰러워서 그런거야..."
" 알았어,이거 놔. "
" 아아...앙."
...앙 ? 앙 !? Ang !?!
자신의 팔을 잡고 흔들며 앙~을 외치는 모습에 결국 우현이 성규의 말랑몰랑말랑한 하얀 볼을 두 손으로 잡고 오동통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덥석 집어삼켰다.이번에는 별다른 반항없이 다소곳하게 우현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찐득한 입술이 떨어지고 잠시 어색하고 부끄러운 정적이 흐를때,대문을 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온 한 아주머니가 남의 전봇대에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몰래 버리려다가 이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손으로 눈을 가리며 소리쳤다.
" 어머 !!!! 뭐하는 거야,사내들끼리 !!!!! "
우현과 성규가 손을 잡고 후다다닥 달리기시작했다.
*
" 이호원...이호원...뭔가 형이랑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 "
" 별로."
" ...쳇. "
단골 장소인 공원 벤치에 앉은 둘의 대화는 간단했다. 동우가 조잘조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호원이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는 형식이였다.
" 근데 생각해보니깐 나이도 모르면서 형이라 불렀네... 난 열아홉살인데 형은 몇 살이에요 ? "
" 몰라도 돼."
" ...설마 나보다 아래 ? "
'그럼 이제부터 호원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동우가 고민을 하자 호원이 피식 비웃으며 대충 머릿속으로 숫자를 생각했다. 스무살과 스물한살은 애매하고 스물두살은 어감이 맘에 들지않는다.결국 아무 숫자나 내뱉었다.
" 스물네살."
" 헤에 ?! 완전 동안이네요잉. "
" 동안 ? 뭐 따지자면. "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존재해온 호원이에게 스무네살이라는 나이는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 근데 왜 맨날 검은 옷만 입어요 ? 안 더워요 ? 무속인이라서 그런가..."
" 뭐 ? 무속인 ? 나 무속인 아니야,인마."
" 저번에 형이 무속인 비슷한거랬잖아요. "
" 야. 비슷하다고 했지,내가 무속인이라고 한 적은 없다 ? "
" 아무튼 왜 검은 거만 입어요 ? 무슨 피부병이 있나 ? 아니면 저승사자 ? "
" 무,무슨 소리야 . "
동우의 말에 호원이 말을 더듬으며 뜨끔해했다. 이상하게 얘랑만 대화하면 안 해도 될 말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호원이 벤치에서 일어나자 동우도 얼른 따라일어섰다.
" 형 가시게요 ? "
" 그래. 가려고,이제."
" 아무튼 고마워요,형. "
" ...뭐가 ? "
" 우연인지는 모르겠는데 꼭 형은 내가 힘들고 지칠때만 나타나더라구요. 그리고 형이랑 얘기하다보면 좀 나아지구요. 진짜 무속인 맞죠,형 ? "
" 무속인 아니라니깐...암튼 다음에 또 보자. "
" 네 ! 나 힘들때나 지칠때 그때 꼭 또 봐요 ! "
호원이 동우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고 유유히 공원을 빠져나갔다. 지치고 힘들때라...
*
" 뭐라고 ? 체육대회 ? "
" 그래. 우현이 넌 500미터 주자야. "
" 뭐 ?! 내가 왜 ? "
" 너가 우리반에서 제일 잘 달리잖어. 암튼 됐어.이미 결정났어."
" 아오 ! 시발 ! 싫어. 땀나. 바꿔. 그리고 뭔 체육대회여. 오늘 처음 듣는 구만. "
" 너 우리 회의할때 잠만 자서 그래. "
" 아아 ! 귀찮게... "
" 야 ! 축구팀 빨리 만들어봐 ! 농구팀도 ! "
반장이 교탁앞에 서서 칠판에 쓰여진 종목 이름 옆에 반 아이들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달리기 종목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본 우현이 짜증을 냈다. 달리기 귀찮은데...숨도 차고 발도 뜨거워지고 땀까지 뻘뻘 나는 최악의 종목.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우현은 달리기 종목에서 알아주는 우사인볼트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학교 내에선.
" 야,축구에 내 이름 넣어.시발."
그러나 어느새 짜증도 잊은 우현이 교탁에 달려가 축구종목에 자신의 이름을 넣으라며 바락바락 떼를 썼다.
" 아,참. 그리고 장동우도 축구에 넣고 농구에는...농구에도 장동우 넣어. 오키 ? "
" 아,맞다! 동우를 깜빡했네. 그럼 축구에 너랑 동우 넣고...농구에 동우..."
자신의 이름과 동우의 이름이 칠판에 적히는 걸 만족스럽게 보던 우현이 문득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담임쌤 수업을 빼서 체육대회 반티와 종목을 상의중이였는데 어느새 저 빙구같이 웃고있는 3반 명수새끼가 찾아와 창가에 바짝 기대 칠판에 적힌 종목선수들을 염탐하고 있었다. 우현이 서둘러 복도로 나가 명수를 창문에서 떼어냈다.
" 김멍수. 염탐꺼져라. "
" 오호. 축구에 너랑 장동우가 나간다니 이번 체육대회 일등은 우리껀가 ? "
" 지랄똥을 싸네.너 왜 삼학년 이반이 3 - 2 라고 쓰여진지 아냐 ? 삼 빼기 이는 일등이라서 이렇게 쓰여진거야,인마. "
" 억지 쩌네요."
" 저리꺼지세요. "
보니깐 달리기는 당연히 너가 나가는 것 같네.
명수가 비웃듯이 말하자 우현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우리 학교에선 내가 제일 잘 달리니깐,뭐. "
" 나보다 다리도 짧은게."
" 너도 긴 건 아닐텐데. "
" ...시발,인정. 사실 나도 달리기랑 축구 선수로 나가 . "
" 푸훕 !!! 축구는 그렇다쳐도 니가 달리기를 나간다고 ? 치와와 다리 김멍수님이 ? "
" 닥쳐. 연습쩔게했거든. 긴장타라,아무튼. 너넨 응원점수을 노리는게 더 빠를꺼야. 그럼 빠이. "
명수가 씨익 웃으며 혓바닥을 내민 뒤 유유히 3반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우현이 콧방귀를 뀌며 다시 자신의 반으로 들어가 체육대회 준비로 후끈 달아오른 교탁으로 향했다. 사실 달리기 실력은 확실히 자신이 좀 더 뛰어나긴 했지만 축구는 명수도 꽤 못하는 쪽은 아니였다. 작년 체육대회에 같은반이였던 명수가 전반전에 두 골씩이나 터트리며 반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아, 오늘부터 축구 연습에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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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몽은 매일 8~10시사이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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