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내가,"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자신을 거부하는 엔을 보던 홍빈이 입술을 깨물었다. 밤이 오고 있었다. 제가, 라비를 보내고 엔의 방에서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밤이 오고 있었다. 홍빈은 어둠을 싫어했다. 무서워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라비를 그렇게 보낸 오늘은, 정말. 홍빈에겐 쥐약인 밤이였다. 사실 홍빈은 엔을 간호하겠다는 핑계로 다가오는 밤을 혼자 맞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엔은 이미 모든 기력을 다 회복했지만. 같이 있어달라고 하기엔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 홍빈의 이런 약한 곳을 아는 자는 2명 밖에 없었다. 라비와, ..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좀 피곤하네요."
웃는 엔의 얼굴은 전혀 피곤해보이지 않았지만, 홍빈은 딱히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말을 할까. 홍빈이 저를 바라보는 엔의 눈과 마주했다. 엔의 눈동자는 항상 신비했다. 오묘했다. 그냥 보면 금색인 홍채는 자세히 보면 옅은 여러가지의 색이 공존해 있었다. 그런데도 항상 아름다운 금색이 탁해지지 않고 영롱하게 빛나곤 했었다. 홍빈이 엔의 눈을 피했다. 제 몸 속 곳곳을 파헤치는 듯한 눈빛이였다. 이런 눈빛 하나도 피하는 걸 보면 아마 자신은 제 약점을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 할 것이다. 한숨을 쉬며 홍빈이 엔의 방을 빠져나왔다. 밝게 불이 켜져있는 복도를 지나 제 방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문고리에서 온기가 느껴진 것 같기도 했다. 홍빈이 눈을 질끈 감고 문을 열었다. 홍빈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지않았다. 밤이 찾아와있었다. 어둠이 홍빈의 방을 잠식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방 문을 닫은 홍빈이 제 방에 구비되어 있는 침대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침대 옆에 마련되어 있는 큰 창에는 달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잠식한 홍빈의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주고 있는 존재였다. 홍빈이 달을 쳐다보았다. 빛나는 달빛은, 엔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어쩐지 조금. 서글펐다.
엔의 방에서 홍빈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비가 엔의 방을 찾아왔다. 멍하게 창 밖을 보고있던 엔이 웃으며 라비를 맞아주었다. 라비는 웃지 않았다.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홍빈씨 지금,"
"내 앞에서 미카엘 얘기 하지마."
엔이 웃음을 터트렸다. 라비의 말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했지만 엔은 라비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제 친구를 새로운 친구에게 뺐긴 듯한 심술궂은 아이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라비는. 아, 혁도 저런 표정을 지을 떄가 있었는데. 문득 떠오른 혁의 모습에 엔의 웃음이 희미해졌다. 항상 바보처럼 웃고 다니던 혁과, 저를 진심으로 아껴주던 켄. 저를 매번 지켜봐주던 마왕까지. 애써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스스로 깨어나 엔을 괴롭혔다. 잊혀지고 싶지 않다는 발버둥 같기도 했다. 엔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아마 다시는 진심으로 그들을 대하지 못 할 것이다. 다시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웃어줄 수 없을 것이다. 엔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왜, 저에요. 하필이면 왜.. 저에요? 엔이 속마음을 꾹꾹 눌러담았다.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일이였다. 엔이 흐를려고 하는 제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다시 웃어보였다.
"같이 있을 때 잘 해줘야 하는거에요."
"..."
"모든 일이 끝나면,"
울먹거리던 엔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엔이 제 손으로 얼굴을 감싸 고개를 숙였다.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었다. 제 추한 모습을 누구라면 알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엔의 바람과는 다르게 라비는 울고있는 엔을 모른체 하지 않았다. 라비가 손을 들어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엔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해주고 싶은 위로의 말은 많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라비가 저를 달래는 손길에 서서히 엔이 숨을 진정시켜 갔다.
"홍빈씨 지금 혼자 있을거에요."
"..알아."
"라비씨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그것도 알아. 하지만 라비는 엔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 시라도 아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듯. 라비는 이럴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홍빈을 다시 마주하기는 싫었다. 울음을 그치고 흐른 눈물을 벅벅 손으로 훔쳐낸 엔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올랐다. 엔이 자신의 말에 대답을 않는 라비를 보고 한 번 더 웃어보였다. 제가 아무리 말을 해 봤자 결국 라비는 라비만의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나만의 선택을 했듯이.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체 헤헤 웃는 엔을 보던 라비가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아 창 밖을 쳐다보았다. 달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올거야."
"알고 있어요."
"어쩔 생각이야."
라비가 창 밖을 보던 눈을 돌려 엔을 쳐다보았다. 엔은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순간 사라질듯 위태로워 보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괜찮겠어?"
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부탁 좀 할게요. 엔이 고개를 돌려 라비를 바라보았다. 한참 엔의 눈을 쳐다보던 라비가 이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렸다.
"이제 그만 가보세요. 홍빈씨가 기다려요."
엔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던 라비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머리를 흐트렸다. 갈게, 쉬어라. 라비를 웃으며 배웅해준 엔이 라비가 나가자 다시 몸을 침대에 늬였다. 은은한 달빛이 엔을 비춰주고 있었다. 엔이 눈을 감았다. ㅡㅡㅡㅡㅡ.
엔의 방을 나선 라비가 복도 끝에 마련되어 있는 홍빈의 방을 쳐다보았다. 11시가 되면 자동으로 꺼지는 불빛 덕분에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라비는 한참을 서서 홍빈의 방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점점 다가오는 어두운 기운에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홍빈의 방과 정 반대 쪽인 신전의 입구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신전의 큰 입구에는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인지 켄과 혁이 저들의 크고 까만 기괴한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라비가 흐트러져 있는 제 머리를 정리했다. 어디 손님 마중 좀 해 보실까? 라비는 웃고 있었다.
별 무리 없이 천계로 넘어와 미카엘의 신전까지 들어온 혁과 켄이 신전 입구의 발을 내딛으며 큰 날개를 서서히 접어보였다. 평소 장난끼가 많았던 혁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혁은 진지했다. 엔이 이 곳에 있다. 그 이유만으로 혁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런 혁을 지켜보던 켄이 혁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진정하라는 뜻이였다. 화가나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이성을 놓아버리는 혁을 알기에. 아마 혁이 폭발한다면.. 켄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멈추었다.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어였다, 그건. 고개를 돌린 켄이 신전 외부 곳곳을 살펴보았다. 원래 이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에는 이상하리만큼 천사 조무래기들이 없었다.
"들어가자, 켄."
"아니. 잠시만."
아무리해도 신전에 천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켄이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혁을 붙잡고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평소 같았으면 이깟 신전이 뭐가 문제냐며 성큼성큼 들어갔을 혁도 고분고분 켄의 말을 따랐다.
"미카엘의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대천사 라지엘, 인사드립니다."
신전의 입구로 통하는 복도에서 라비가 걸어나와 켄과 혁에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혁과 켄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라비를 쳐다보았다.
라비가 엔이 제게 부탁한 말들을 떠올렸다. 막아주세요 그들을. 아직은 보고싶지 않아요.
눈물이 났다.
유후! 하루에 두편 바람직해요 바람직해ㅎㅎㅎㅎㅎ 빨리 칭찬ㄱㄱ! 얼릉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