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19.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위해 둘은 잠시 휴게실로 나왔다. 깜깜한 창 밖에는 별대신 차의 전조등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들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종인은 잠시 창 밖을 바라보는 찬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는 쓸쓸한 뒷모습. 헐렁한 환자복 차림에 검정색 삼선 슬리퍼를 신은 맨발이 지금이 비록 여름임에도 추워보였다. 종인이 자신을 바라보고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찬열이 조용히 말했다. " 밤이 예쁘네. " " 박찬열. " " 응? " " …미안해. " 찬열의 고개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담담한 표정뒤에 대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 경수가… 널 좋아했었어. 그것도 아주 많이. " 홀로 독백하듯 모든 걸 털어놓는 종인의 말을 찬열은 조용히 듣고있었다. " 너희 둘이 같이 있는걸 보면 볼 수록 질투가 났어. 사실 꽤 오래전부터 나는 경수를 좋아했으니까. 예전에 옥상에서 네가 나한테 말했을때, 그때도 나는 그애를 좋아하고 있었어. " " ……. " " 솔직하게 말할게. 그 애를 갖고 싶었어.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만 알고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비밀은 언젠간 알려지게 되있던 거야. " " ……. " " 이렇게 널 볼 면목이 없지만 얼굴보고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어." " ..." " 네가 경수를 얼마만큼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나 경수 아주 많이 좋아해. " 가만히 종인을 바라보고있던 찬열의 눈이 커졌다 다시 돌아왔다.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새삼 놀라웠다. 찬열은 입을 꾹 다물고 어떤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아마 그도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물론이고 혼란스러운 정신을 정리하느라 바쁜건 당연할 것이다. 자판기에서 나오는 불빛에 의지해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끊겼던 목소리가 선율처럼 다시 이어졌다. " 5년전 교통사고. 모두 나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가장 큰 원인이였으니까. 그런 나를 네가 용서해준거야. 기억나? 병원에서 네가 손가락 마비 판정을 받고 펑펑 울면서 나한테 말해줬잖아. 그래도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난 아직도 그 날을 잊지 못해. 그 날부터 겉으로는 아닌척해도 나는 너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졌다고 여기며 살아왔어. " 눈이 퉁퉁 부을정도로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있는데 찬열은 웃었다. 그리고 제 손을 붙잡으면서 네가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말했다. 그 순간 종인은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가슴께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와 목울대를 꽉 막아버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알 수없는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커다랗게 소용돌이 침과 동시에 눈물이 뚝뚝 흘렀다. 멍청한 놈. 진짜 멍청해…. 어린 종인으로써는 처음으로 느낀 감동이였다. " 그런데 정신차려보니까 그런 너한테 내가 몹쓸 짓을 하고있더라. 이게 말이 되는건가 싶었어. 네가 다시 한번 교통사고가 났을 때 수술실 보면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또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되었구나. 너는 내 생명의 은인이고 평생의 친군데, 응원해주지는 못할 망정 너를 방해하고 망가뜨리고 있다니. 나는 정말 개새끼구나, 미친놈이구나. 그래서 경수를 포기하려고했어. 그게 당연한 거잖아. " " ……. " " 막상 얼굴보니까 또 그게 안돼는거야. 놓아주려고 하는데 정말 붙잡고 싶어 미칠 것 같아서 눈 딱 감고 말했어.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싶었는데… 도경수가 내가 좋대. 나를 좋아한대. " " ……. " " 그말에 멍청하게도 핀트가 나갔지. 사실은 내가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말일지도 몰라. 속물적이지. 도경수를 붙잡으면서 생각했어. 나는 역시 도경수가 아니면 안되는구나, 아무리 마음을 고쳐 먹어도 밀어낼 수가 없구나. 걔는 말이지 날 정말 아무것도 볼 수없게 만들거든. 너를 생각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자꾸 움직여. " " ……. " " 그래서 결론은, 이거야. " " ……. " " 미안해, 나 용서하지마 찬열아. 난 더이상 네 친구로 남을 자격이 없어. " 병신이지. 그렇게 말하며 종인은 쓰라린 웃음을 지었다. 어느 순간부터 한 몸처럼 같이 붙어 지내왔던 나날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니 새삼스레 미칠듯이 그리웠다. 이젠 다시 그 소소하고도 즐거웠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종인은 마음이 파랗게 물들어 무거워지는 느낌을 느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는 종인이 푹 고개를 숙이고 있자 찬열이 어둠을 등진채 천천히 종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종인이 살며시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입을 일자로 꾹다문 찬열의 얼굴이 있었다. " 일단 한 대만 맞고 말하자. 어금니 꽉 물어. " " .....!" 종인이 찬열의 말을 이해할 틈도 없이 찬열은 거침없이 종인의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퍽,둔탁한.소리와 함께. 본능적으로 종인은 잇새를 꽉 깨물고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전력이 담긴 센 주먹에 얼굴 가득히 화끈거리며 마구 욱신거리는 아픔이 몰려왔다. 맞은 뺨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 종인을 잠자코 서서 내려다보던 찬열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너.. 참 웃기다. 우리 친구 아니였어? " " ...미안. " " 왜 내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니 맘대로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 없다,라고 정하는건데? " " 뭐..? " " 물론 네가 한 행동들 모두 화가 나긴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 " ......" " 니가 먼저 나한테 네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는게 더 서운해..." "그래... 알아." 찬열의 얼굴은 조금 흥분한듯 상기되어있었다. 꾹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다 힘이 빠져 축 펴졌다. " 종인아, 5년전 그 날 내가 왜 너대신 차에 뛰어들었는지 알아? 너는 아마 모르겠지만 넌 나한테 정말 절대적인 존재였어. 마치 신처럼. " 뜬금없는 찬열의 말에 종인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이 모든 얘기들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이야기들이였다. 찬열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 말은 못했지만 전학오기 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어. 그래서 사람이 무서웠고 모든 것이 두려웠고 낯설게만 보이고 그랬지. " 한때는 친구, 아니 그냥 옆에 있는 아이와 눈만 마주쳤을뿐인데도 시선이 땅으로 푹 꺼지고 어깨가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재수 없어. 꺼져. 싸늘한 시선들과 거친 말들이 온 몸을 할퀴는 아픔들이 두려워 어느 순간부터 찬열은 홀로 벽을 쌓고 고립되어갔다. 그리고 그게 당연한줄만 알았었는데. " 너 좀 잘생겼다. 이름이 뭐냐? " "......" "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걸어준 말이였는데 기억나려나. 나 그때 완전 감동받아서 울뻔했는데. 와, 처음으로 나한테 말을 걸어준 사람이 있구나, 다가와준 사람이 있구나. 너는 나에게 언제나 친구 이상의 무언가였어. 그 날 찬열은 처음으로 종인에게서 어둠속의 한줄기 빛을 보았다. 종인은 구원자였다. 희망이라는 빛은 찬열에게 미소를, 밝은 성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항상 종인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언제까지라도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그런 너에게로 차가 달려오는데, 어쩌면 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어. 네가 없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나를 위해서라도 너를 구해야했어. 본능적으로 몸이 나가버린건데 오히려 너는 나한테 미안해하더라. 손.. 피아노를 더이상 못치게된건 안타까운 일이였지만 네가 떠나가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였다고 믿는데. " 두꺼운 깁스를 한 손. 유리조각이 박혀있던 그 손을 찬열이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그 날의 기억을 되새겨보듯. 아마 다시 그날로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찬열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 그러니까 이제는 네 위에 올려진 짐을 좀 덜어도 좋다는 소리야. 완전히는 지우지 못해도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아." " ……. " " 나는 너를 모두 이해하고 있어. " 멍한 표정을 한 종인의 앞에 서서 두 손을 뻗어 찬열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찬열의 손이 닿자 종인은 떨리는 시선으로 고갤들어 찬열을 바라보았다. 예상과 전혀 달리 화난 표정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모든 것을 감싸안아줄 것만 같은 겨울 햇빛처럼 따듯한 눈길이 종인을 향했다. 정말로 찬열이 어깨위에 올려진 짐을 내려놓아주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치 5년전 병원에서 느꼈던 것과 아주 흡사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 종인아, 난 아직까진 사랑보단 우정이 더 좋나보다. 난 겁쟁이라서 너랑 경수, 둘다 잃을 수도 있는 그런 욕심은 안부릴래. " 그러고보니 넌 참 대단해. 사랑도 얻고 우정도 지켰어. 처음 찬열의 말이 종인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다 머릿속에서 그 말의 뜻이 팟, 하고 떠올랐다. 이미 찬열은 저를 용서하고 있던 거였다. " 일어나. 죗값은 아까 죽빵으로 퉁치자. " " 찬열아," " 우리 경수, 잘부탁해. 남은 내 마음까지 모두 다 줄테니까 울리면 진짜 죽어. " " ...... " " 그렇게 감동먹은 얼굴 하지마. 못생겼어. " 그렇게 말하며 찬열은 이가 살짝 보이도록 씨익 웃었다. 목울대가 먹먹해지도록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미소였다. 이 바보는 용서받지 못할 나의 온갖 몹쓸짓에도 항상 웃어버리고 만다. 한심스러울 정도로 착한 이 바보는 정말... 그 모습을 보던 종인이 다리를 접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문채 무릎위에 올려논 두 주먹을 손톱자국이 날정도록 꽉쥐었다. 나지막히 미안해,라고 말하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찬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는 여전히 내 친구로 남아있는데, 넌 어때? " 나는, 영원히 네 친구야? 그순간 종인의 주먹쥔 손등위로 투명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 한마디에 잘 참아왔던 감정들이 몇방울의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미안하고, 한편으론 고맙고, 또는 화가나거나 후회가되고, 그리고, 기뻤다. 종인은 눈물을 감추려 고갤푹 숙인채 빠르게 위아래로 끄덕였다. 좀처럼 눈물이 나지 않는 편이였는데 자꾸만 손등 떨어지는 물방울 갯수가 셀 수없이 늘어났다. 쓸데없이 푸른 새벽은 메말라있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 ..당연하지." 누군가가 더 괴로워하고, 누군가가 덜 아파하고는 물과 불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비교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존재 가치없는 일이였다. 아직 다 자라지못한 우리는 충분히 아파했고 갈등했고 정직하게 감정에 충실했다. 그 어떤 누구의 잘못도 아니였다. 그저 지나가는 장마처럼 누구에게나 언젠가 한번쯤 찾아오는 작은 문턱일 뿐이였다. 그리고 그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온몸으로 느끼며 깨닫는다. 우정에 대해, 사랑에 대해, 직접 느끼지 못하고선 알 수없는 아주 고차원적인 감정들에 대해. 울지마 찌질아. 종인의 앞에 같이 쪼그리고 앉은 찬열이 그의 손등위로 손을 겹쳐 잡았다.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손을 타고 몸속으로 진심이 유유히 흘러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들이 어느 한곳에서 만났을 때, 소년들은 비로소 한뼘 더 자라났다. * 찬열이 퇴원을 했다. 매일 병실에 앉아만 있어 지겹다고 느꼈던 시간들은 놀랄정도로 벌써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직 뼈가 붙지 않은 왼팔의 깁스를 제외하고 다친 몸은 이제 멀쩡하게 회복되었다. 깁스를 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찬열은 그동안 썼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입원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던 터라 가져온 짐을 챙기기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후줄근한 환자복을 벗고 집에서 가져온 반팔티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름 정이 들었던 흰 환자복을 정성스레 개어 침대위에 올려두고 짐가방을 들고 문쪽으로 향했다. 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작은 뒷통수가 왔다갔다하는게 보였다. 호기심에 찬열은 문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익숙한 뒷통수의 정체는 바로 경수였다. 그는 손에 작은 미니 화환을 든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경수는 아직 찬열이 자신을 발견한지도 모르고 계속 고민하고있었다. 그런 경수를 보고 픽 웃은 찬열이 경수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 거기서 뭐하고 있어? " " 어, 어? " 아, 깜짝아. 갑자기 뒤에서 찬열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란 경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홱 뒤를 돌아보았다. 경수의 바로 앞에 선 찬열은 더이상 힘없는 환자복 차림이 아닌 센스있는 사복을 입고있었다. 그제서야 경수는 그가 퇴원을 한다는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찬열의 시선에 경수가 손에 들고있던 화환을 불쑥 내밀었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경수는 괜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 퇴원 선물이야. 축하해. " " 고마워. 예쁘다. " 찬열이 화환을 받아들고 한번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아보았다. 살아있는 향긋한 꽃의 냄새가 코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함께 침묵도 같이 찾아왔다. 그 날 이후로 한번도 만난적이 없고, 대화를 나눈 것도 없어 서로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 날, 얽히고 설킨 셋이 한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던 날 이후로 경수는 제 입장을 분명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서로 오해하지 않고 더이상 다치지 않을 것이였다. 경수가 잠시 바닥을 쳐다보다 용길내어 고갤들어 입을 열었다. " 저기 너도 모두 알고 있지? " " 뭐를? " " 내가… 너를 좋아했었다는거. " 한때 열렬하게 타올랐던 경수의 감정은 이미 끝나 과거완료형이 되었다. 과거에 시작해서 과거로 끝나버린 감정. 경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분명 사실이였으니까. 찬열은 잠시 경수가 준 꽃을 힐끔 내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는 담담했다. 오히려 마치 예상이라도 하고있었던 듯 옅은 미소까지 짓고있었다. " 근데 이제는 아니야. 미안. " " ……. " " 나 지금 너 고백 거절하고 있는거야. 그때 정신없어서 흐지부지 넘어갔잖아. " 경수의 말에 찬열이 꽃에서 시선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경수의 얼굴이 편치않은 마음에 구겨진 표정이였다. 나 차인건가? 그렇다고 볼 수있는 상황이지만 찬열은 막 비참하거나 슬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싹 비워져 가벼워진 느낌이였다. 되려 차인 저보다 경수의 얼굴이 울상이다. 평상시처럼 내뱉는 가벼운 어투로 찬열이 물었다. " 너도 알고 있지? 내가 너 좋아했던거. " " 응. " " 나도 너 이제 안 좋아할거야. " 찬열을 바라보던 경수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이렇게 담담한 반응일 줄은, 경수는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경수를 보고 찬열이 픽 웃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에 훤해 자꾸 웃음이 나왔다. " 왜냐면 종인이는 내 친구거든. 그리고 너는 종인이 애인이고, 또… 너는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 " 친구…? " " 응, 친구. " 서로 좋아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해서 영원히 안 볼 사이 아니잖아? 나는 너랑 친구하고 싶은데. 찬열의 말에 경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씩 웃었다. 처음 찬열과 만났던 추운 겨울날, 그 날처럼. 친구, 참 좋은 단어였다. " 찬열아, 그래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었어. " "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 " 맞아. " " 참나, 나도거든? " " …그리고 그게 내 첫사랑이였어. " 아……. 갑자기 나온 첫사랑이란 세글자에 가슴께가 꽉 쥐어잡혀지는 기분이였다. 잠시 놀란 얼굴을 한 찬열이 이내 얼굴을 풀었다. 그리고 눈을 접어가며 밝게 웃었다. " 고마워, 네 첫사랑 자리 되어서. 영광이다. " " 영광은 무슨… " " 근데 말야, 내가 용기가 많아서 너한테 좀더 일찍 고백했었다면… " " ……. " " 그땐 지금보다는 달라졌을까? "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는 찬열에게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생각하고있었다. 경수는 상상해보았다. 서로를 보기만 해도 설렜었던 많은 나날들 중에 만약 네가 먼저 나에게 다가왔었다면, 내가 먼저 너에게 다가갔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달라졌을까. " 어쩌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 " 그런가? " " 그런데 그건 모두 지나간 시간이고, 후회고, 미련이고. 이제와서 바뀌는 건 없어. " " ……. " " 우리는 앞을 향해 걷는 사람들이지 뒤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가끔 뒤를 돌아볼 순 있어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순 없어. " 후회하지 말라는 뜻이였다. 미련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는 귀찮은 장애물이니까. 그런 쓸데없는 미련들을 훌훌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였다. 내가,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느낄만큼. 경수의 뜻을 이해했는지 조금은 씁쓸하게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말이야, " " 응. " " … 키스해도 돼? " 어느샌가 훌쩍 찬열이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경수는 잠시 고민했다. 어떡하지, 마지막까지 찬열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니까 한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경수가 위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의 동의를 구하자마자 찬열이 들고있던 화환을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중이였다. " 종인이한테는 비밀이야. 걔가 이런데 되게 질투 많이 하거든. " " 응. " " 그럼 앞으로 종인이 잘 부탁해. " " 응. " " 그동안 고마웠어. " " 나도. " 찬열이 깁스를 하지 않은 손으로 경수의 볼을 한번 쓸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경수의 시야가 온통 찬열의 얼굴로 가득 차버렸다. 경수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따듯하고 말랑한 입술표면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키스처럼 입술을 열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입술을 대고있기만 했다. 말 그대로 '입맞춤'이였다. 더이상 예전처럼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거나, 설렌다거나 얼굴이 소녀처럼 붉어지지는 않았다. 그 대신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기도 하면서 감은 눈 사이로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한순간 뻥 뚫리는 기분이기도 한 이 순간, 무어라 정의 내릴 수가 없었다. 어지러운 마음 속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을 담았던 흔적을 천천히 돌아본다. 그리고 흩어지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순간을, 이 느낌을, 이 감정을 잊지 않고 몸속에 꼭꼭 기억해놓는다. 먼훗날 언젠가는 추억으로 다시 돌아볼 수 있도록. 짧지 않았던 시간동안 붙어있던 두 입술이 자연스레 떼어졌다. 아주 깔끔하고 담백한 키스가 끝이 났다. 아쉬움도 후회도 없이 후련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서로를 보냈다. 영원히 내 기억속에 오래오래 남아주길 바래. 굿바이, 나의 첫사랑. *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교무실은 타자 두들기는 소리와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릴뿐 조용했다. 머리가 반쯤 까진 2학년 2반 담임은 듀오백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대고 앉아 학생 정보가 담긴 서류철을 대충 쓱 훑었다. 그리고 그 앞에 새로 맞춘 교복을 입은 훤칠한 키의 소년이 목석처럼 꼿꼿이 서있었다. " 그래, 네가 세훈이지? " " 예. " " 대구에서 올라왔다고? " " 예. " " 근데 사투리 별로 안쓰네? " " 고쳤는데요. " " 아 그르냐? 신기하네. " 그 순간 세훈의 얼굴이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구려진 표정으로 변했다. 매번 어디서 왔냐고 묻고, 대구에서 왔다고 하면 백이면 백 사투리에 대해서 말했다. 세훈은 그런 류의 쪽팔림이 정말로 싫었다. 그래서 서울로 전학오기 전 4개월 동안 표준어를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 결과 억양이나 발음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나름 양호하게 표준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게 세훈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담임은 습관처럼 사투리 얘길 꺼냈다. 이쯤되니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했다. 진짜 서울 사람들 오지랖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세훈의 속생각을 전혀 모르는 담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세훈의 학생기록부가 꽂힌 서류철을 덮었다. 그리고 책상위에 올려진 매 하나를 들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 따라와, 오늘부터 방학 보충한다고 했지? " " 예. " 일어서니 자기보다 키가 작아 까진 숱없는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진짜 대머리 독수리다. 대독. 세훈은 속으로 킥킥 비웃으면서 담임을 따라 익숙하지 않은 복도를 지나 반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조심스레 교실에 들어서니 세훈에게로 모두 이목이 집중되었다. 세훈은 책상에 앉아있는 반 애들을 한번 대충 훑어보았다. 서울 애들이라고 대구 애들이랑 별반 다를게 없었다. 서울에 오면 온통 예쁜 애들 투성이랬는데 다 거짓말이였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 담임이 교탁을 두번 탁탁 내리친 후 전학온 세훈을 소개했다. " 원래 방학식 전에 전학 올 예정이였는데 미뤄져서 방학 기간중에 오게되었다. 이름은 오세훈이고 대구에서 살다가 서울로 오게되었다고 한다. 한마디 해봐. " 담임이 세훈의 어깨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귀찮은데 이런걸 왜시켜. 세훈은 짜증을 눌러 참으며 입을 열었다. " 안녕. 나는 오세훈이고, 대구에서 왔어. 잘 부탁해. " " 그래, 이제부터 앞으로 같이 보충 들을 반친구이니 친하게 지내고. 이상! 수업 열심히 들어라. " 담임이 교실을 나가버리고 세훈은 빈자리를 찾아 그자리에 앉았다. 뒷자리로 걸어가는데 주위에서 자꾸만 웅성웅성 거렸다. 야, 쟤 대구에서 왔대. 신기하다. 사투리 안쓰나? 조금 말투가 어색한거 같긴 한데…. 야 근데 좀 잘생겼다. 그치, 진짜 잘생겼어. 여기저기서 파리 소리처럼 웅성대는 소리들이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고 엎어져 잠이나 자고 싶었다. 책상 의자에 걸터 앉은 세훈이 가방을 책상 위로 턱하고 올려놓았다. 가방에 들은 책을 꺼내려 지퍼를 여는데 모두들 자기를 보고있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 싶었지만 신경쓰지 않고 책을 쌓아놓고 엎드릴 준비를 했다. 다 저한테는 쓸데없고 부질없는 관심들이였다. 대체 지방에서 올라온게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호들갑인지 원. 그때 한 조금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성큼성큼 세훈에게로 다가왔다. 여자애는 학교에서 나름 예쁘고 인기많기로 유명한 여학생이였다. 그런 여자애가 한낯 전학생인 세훈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세훈은 무표정으로 그 여자애들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서울 사람답게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자연스러운 표준어를 구사했다. " 너 대구에서 왔다며? 근데 사투리 안쓰네? " " 어. " " 고친거야? " " 어. " " 대구 사투리 한번만 해주면 안돼? 그거 진짜 멋있던데 " 왠 이상한 여자애가 다가와서 다짜고짜 요구를 한다. 세훈의 한쪽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첫날부터 귀찮은 일의 연속이였다. 여자애는 싫다고 해도 자꾸만 귀찮은 파리처럼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었다. " 싫은데. " " 아, 한번만 응? 한번만 들으면 더이상 부탁 안할게. " " ……. " " 세훈? 이름 세훈이라고 했지? 세훈아, 한번만 해줘라 듣고싶……." " 야, " 듣기싫은 여자애의 말을 턱하니 중간에 끊어버렸다. 잔뜩 짜증나는 표정으로 세훈이 여자애와 눈을 마주치자 여자애는 흠칫 놀랐다. " 니 이 망할 가쓰나가 어따대고 자꼬 처앵기나, 시끄럽다. " " ……. " " 됐나? " " …어? " " 들었으면 그만 좀 앵기고 절로 좀 꺼지라. " 그 순간 교실에 얼음보다 싸한 정적이 흘렀다. 그의 입에서 아주 찰진 사투리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모두들 생각도 못했다. 그것도 학교 퀸카급 여자애에게 대놓고 욕이라니. 예쁜 여자애는 충격에 입을 쩍 벌리고 그 자리에 굳고, 모두들 세훈을 바라보며 경악에 차있었다. 한순간 아이들의 이목의 중심이 되버린 세훈은 저를 보는 주변의 반애들을 대충 훑어보며 말했다. 서울애들이 듣기에는 약간은 어색한 표준어로. " 뭘 쳐다봐, 너네도 다 들었으니까 관심 끄지. " 여자애는 금방이라도 그 큰 눈을 부라리며 잔뜩 굳은 얼굴로 교실을 뛰쳐나갔고 반 아이들도 놀라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제자리로 찾아갔다. 세훈은 머리 높이에 맞춰 쌓아놓은 책위로 털썩 엎드렸다. 저도 모르게 막 진심에서 우러나온 18년간 갈고 닦은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이렇게 많은 애들 앞에서 홧김에 사투리를 쓰다니 정말 쪽팔렸다. 서울 올라와서는 정말 안쓰려고 했는데… 다음부터는 정말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첫날부터 반애들에게 아주 강렬한 첫인상을 남겨주고 세훈은 밀려오는 나른함에 눈을 감았다. 그나저나 경수 형은 수업하고 있으려나…. |
잡담 |
제가 좋아서 쓰는 글이니까 스트레스 안받고 부담없이 쓰고있어요 그러다보니 되게 끈질기게 오래오래 갑니다..ㅜㅜ 댓글 수나 관심에 그런거에 연연하지 않으려구요 그냥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ㅛ^.. 대체 완결은 언ㅈ 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