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녹차하임
퇴원하고 루한이 데려다주어 집에 무사히 도착한 민석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루한을 집으로 초대할까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루한을 편히 볼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돌려보냈다.
민석을 보내는 루한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싼채 깊은 한숨을 내쉰 민석은 아까 루한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널... 다시 만나서 참 다행이야.
-예전이랑 변한게 하나도 없는데... 왜 잊어버렸던걸까...
-다신 잊어버리지 않아. 잃어버리지 않아... 넌 날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널 기억할테니까...
루한은 마치 자신을 다시 만난 듯이 말했다.
하지만 민석의 기억 속에 있는 첫만남은 카페에서 피아노치던 루한이었다.
혹시 어디선가 루한과 마주쳤었나 고민해봐도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참을 소파에 앉아서 생각하던 민석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하면 상쾌해질까 싶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민석은 어리석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 것을 붙잡고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는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일 있을 공연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일찍 자야했다.
침대에 누운 민석은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아까 먹은 약기운때문인지 눈을 감으니 잠은 금새 찾아왔다.
민석은 뺨을 스치는 기분 좋은 바람에 상쾌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바람이 모든 감촉을 감싸안고 간질인다.
누군가 옆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온몸의 신경세포를 자극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 조금은 앳되보이지만 너무나도 마음 편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오직 시각만은 새카맣게 어둠으로 가득하다.
눈을 뜨고 앞에 가득 펼쳐질 풍경을 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이 기분이 깨져버릴까 뜨고싶지 않다가도 가득한 어둠에 저절로 눈에 힘이 들어간다.
겨우 힘을 주어 눈을 뜬 순간 역시 눈을 뜨지 말걸... 민석은 후회했다.
한순간에 주위가 붉게 번지더니 살랑이던 바람은 한순간에 열기를 가득 머금고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민석은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깨진 유리사이로 뻗은 작은 손을 붙잡으려 민석도 최대한 손을 뻗어보았지만 그 거리가 너무 멀었다.
"우... ㅇ민... 우민!!! 시우민!!!"
점점 초점이 흐려지는 중 창문에 매달려 악을 쓰는 외침이 귓가를 강타했다.
순간 아주 잠깐 맞춰진 초점에는 가끔 꿈에 나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그 얼굴이었다.
항상 기억날 듯 말 듯 흐릿하게 떠올리던 그 얼굴이 드디어 완전한 모습으로 보였다.
"... 루... 한..."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대로 시야가 어지럽게 흐트러지더니 다시 눈을 떴을 땐 온몸이 식은 땀으로 젖어있었고 민석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헉.. 허억..."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겨우 힘을 주고 침대시트를 움켜쥐었다.
민석은 짙은 어둠 속에서 차분히 숨을 고르고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본 그 얼굴... 그건 분명 루한의 얼굴이었다.
크면서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기본적인 윤곽이나 이목구비가 한눈에 루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렸을적 사고현장에 루한이 있었고 루한은 이미 나를 알고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럼 사고 전에도 루한을 만난적이 있던 것일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민석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드디어 공연 당일, 연습실에 모인 다섯명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였다.
종대는 설레임에 금방이라도 광대가 승천할 듯이 입꼬리가 올라가 웃고있었다.
찬열은 공연 직전엔 항상 극도로 예민해져 조용하고 차분해졌고
백현은 예민해지는건 같지만 찬열과 반대로 더욱 까칠하고 성질이 드러워졌다.
전에 그런 찬백을 멋모르고 건드렸다가 크게 낭패보았던 경험이 있는 종대는 쫄아 슬쩍 민석의 옆으로 붙었다.
민석이 그나마 공연 직전에도 평소처럼 부드럽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민석도 달라보였다.
옆에 서자 물씬 느껴지는 민석의 그늘이 종대까지 시무룩해지게 만든다.
"미니형, 아직도 아파?"
종대의 물음에 키보드를 두드리던 루한의 손이 멈추고 시선이 민석에게 향했다.
느껴지는 루한의 시선에 민석이 약간 움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종대와 얘기를 나누었다.
루한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민석은 고개를 빳빳하게 고정시켜 일부러 루한쪽을 바라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