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 좀 하자. "
아이들 틈을 가르고 내 앞에 나타난 도경수가 차가운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몇 일만에 도경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할지는 뻔했지만 흔쾌히 도경수의 뒤를 따라 나섰다. 말 없이 도경수와 나는 학교 뒷편에 아무도 오지 않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우릴 쳐다보고 있는 것이라고는 CCTV 한 대 뿐이었다. 빨간 빛이 반짝이며 지금의 이 상황들을 녹화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침묵을 깨고 도경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현이 건드리지 마."
역시나다, 역시나…. 도경수 나름의 단호한 듯한 어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씨-발, 너네 아주 영화를 찍어라?"
도경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멍하니 그런 도경수의 뒷통수를 보고 있는데 도경수의 신발 발치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 눈물 한 방울은 어느새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이 되어 신발 앞코를 축축히 젖히고 있었다.
"김종인…."
눈물 젖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도경수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마주했다. 눈가가 빨개지고 코 끝도 빨개져 있었다. 입술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경수가 내 손을 붙잡았다.
"……."
"나 부탁이 있어…."
"……."
"제발."
그 표정을 마주한 나조차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다.
* * *
재수가 없었다. 처음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나에게 의사까지 붙여놓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충분히 건강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부모님이 나에게 붙여놓은 의사는 다름 아닌 정신과 의사였다.
"나가!"
매번 필요 없다며 쫓아내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에게 소리치자 굳게 닫혀 있던 내 방 문이 열리고 놀란 표정의 어머니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종인아! 뭐하는 짓이니, 의사선생님께…!"
"씨발! 내가 정신병자 같아? 왜, 아예 정신병원에 쳐 넣지 그래?"
"종인아, 엄마 말 좀 듣고…!"
책상에 올려져있던 액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가 깨지고 그 안에 있던 유리조각을 손에 쥐고 다른 쪽 손목에 가져다 댔다.
"눈 앞에서 다시 한 번 그어줘…? 씨발, 진짜 나 뒤지는 꼴 보고싶어!?"
그러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만을 연신 반복했다. '미안해, 종인아. 미안해….' 쓰러지려고 하는 엄마를 지탱한 의사는 내게 진정하라며 소리쳤다. 그 때 방 문이 열렸다. 굳은 표정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에 등장에 시끄럽던 방 안이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거 내려놔라, 김종인. "
특유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조각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살갗 깊숙히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똑똑히 그 눈을 쳐다 보았다. 나를 보는 그 눈빛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디 한 번 제대로 그어봐. 저번처럼 빗나가게 긋지 말고, 네 뜻대로 죽어보라고."
심장이 마구 고동쳤다. 죽어, 죽어…? 죽는다는 것. 그래, 나는. 나는 용기가 없었다. 유리를 쥐고 있는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손에 힘을 빼자 손에 들려 있던 유리 조각이 발치로 떨어졌다. 무서워…. 사실 무서워….
"여보! 그게 대체 무슨…! "
"어차피 회사를 이어가지도 못할 놈이야! 필요도 없는 자식 새끼 키워서 뭐하겠어! 개만도 못한 쓰레기 같은 새끼를…! "
모든 말이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항상 더럽다고 습관처럼 말을 내뱉었던 것들이 나와 비슷한 상처와 아픔을 가진 너를 보며 나를 위로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너가 스스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너가 절망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적어도 저 정도만큼은 아니지 않냐고 내 자신에게 되물어왔었다.
그러나 너가 내게 그 부탁을 해오던 날…. 그 날 이후로 나는 내가 너에게 지금껏 무슨 짓을 해 왔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리가 풀렸다.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119, 어서 119를 불러요! "
"종인아, 김종인…!"
어떻게, 어떻게 너가 나에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너는…? 눈이 저절로 감겼다. 몸이 이리 저리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원한다면 해 줄께. 너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줄 수 있어….
* * *
그냥 눈에 거슬렸다고 표현하는게 맞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학교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문들에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 장난감을 누가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이후로 그 둘을 주시하게 되었다. 분명 도경수가 오세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저 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오세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얼마나 잘난 새끼이길래 도경수가 그리 좋아 죽으려 하는지…. 나는 꼭 알아야만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끝에 어느 날 오세훈이 우리 반의 반장인 오지훈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오지훈은 나를 따르다 못해 신봉하는 무리의 녀석들 중 하난데, 공부나 하고 먹기 좋아하는 찌질한 새끼였다.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탓에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지훈의 동생이 세훈이라는 그 사실을 알게된 날부터 조금씩 지훈에게 살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찬찬히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나는 지훈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넸다.
"지훈아. "
"으.,응? 종인아."
"나 모르는 문제가 있는데…. 오늘 너희 집에서 좀 가르쳐 주면 안될까? "
그러자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만 그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내가 생긋 웃어보이자 그 녀석이 여드름 가득한 볼을 불리며 뭘. 하며 따라 웃어보였다. 더러운 새끼….
"여, 여기야…."
지훈의 집은 생각보다 좁지 않았다. 아니, 우리 집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지만 일반 집들 보다는 넓은 편이었다. 내가 오자 부엌에 있던 한 아줌마-지훈의 엄마로 추정되는 여자였다.-가 반갑게 웃으며 뛰쳐 나와 나를 반겼다. '어머,너가 종인이구나…!' 내 가방을 들어다 놓는 아줌마는 그야말로 오지훈의 판박이었다. 그런 아줌마를 지나쳐 지훈의 안내를 받고 지훈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거실에서 쭈뼛대고 있는 오세훈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고 내가 웃어보이자 얼어있던 세훈도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예쁜 얼굴이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대 된다….
1시간 가량을 지훈에게 수학 문제에 대한 설명-다 아는 내용이었지만-을 듣고 나서 지훈의 방을 나왔다. 맞은편에 위치한 방에 붙어있는 팻말이 보였다. '세훈이 방'. 그걸 계속해서 보고 있자 지훈이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너 동생도 있어? "
"어?아ㄴ…응. 있긴, 있어…. "
지훈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본인도 당황한 듯 뒷 머리를 만졌다. 왜 세훈을 숨기려 하는 걸까.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 액자에도 세훈은 없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세훈이 이 집에서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일 뒤, 나는 지훈의 엄마가 세훈의 엄마와 자매사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세훈은 맡겨져 키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웠다. 어쩌면 또 다른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