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기에 딱 적당한 정도의 평수에 남자 혼자 사는집 치고도 보기 좋은 집이었다. 부엌에선 쓴 커피향이 돌았다. 크리스는 어제 읽던 하루키의 책을 펼쳤다. 근 일년동안 있던 아침의 풍경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크리스에게 연관되는 일이 없었다. 수도권에서 약간 떨어진 지방의 P시로 이사를 온 후 크리스는 야구에 관한것에 일체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소식은 자신의 은퇴에 관한 것이었다.크리스씨 은퇴를 결심하신 이유가 뭐죠? 단순한 성적 부진 때문입니까?영웅은 추억일때 가장 아름답습니다.지금도 기자들의 끄덕이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루한은 가끔 휴가가 있을때마다 집에 놀러왔다. 그때마다 루한은 크리스가 일어섰네 침대에 있었네 화장실을 갔네하며 괜한 띄워주기를 했다. 그야말로 헛웃음 나는 짓이었다. 그나마 심심한 생활에 활력소였던 루한도 요즘들어 다시 야구시즌에 접어들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크리스는 오히려 야구가 아닌 축구에 관심을 두려고 했다. 가까우면서도 먼 두 운동 사이를 크리스는 그렇게 구렁이처럼 넘나들었다. 평생 구기종목과의 연을 끊기는 어려울것이라고 크리스는 생각했다. 몇번씩이나 방송 해주는 지난 월드컵 경기는 크리스를 지루하게 만들기에 딱이었다. 평생 야구만 하다가 축구를 보려니 공을 잡아다 던지고픈 욕구가 샘솟았다. 오늘도 역시나 손을 의미없이 쥐었다 피었다. 영 할일이 없어진 크리스는 반찬거리를 사러가기 위해 옷을 챙겼다.-밤늦게나 돼서야 루한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구를 보았냐는 통화였다. 당연히 크리스는 아니라고 대답했고 몇마디 타박을 받은뒤 안고있던 강아지를 내려놓았다.「내가 나오는건 봐야지 안그래?」"알았어 알았어. 쉬어. 축하해."「너 다음 경기는 꼭 봐라! 너 티켓 줄꺼야」"응."강아지는 내려놓기가 무섭게 거실쪽으로 달려가더니 쇼파 아래로 금새 숨어들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크리스는 강아지쪽으로 다가갔다. 매끄러운 타일과 발톱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멍멍아."당연한 일이지만 강아지는 답이 없었다. 빛이 조금은 차단된 쇼파 밑에서 하얗고 작은 강아지는 유일한 밝은 물체였다. 크리스가 가만히 손을 뻗고 어르는 소리를 내자 강아지는 슬그머니 경계를 풀었다. 아마 어린 녀석이라 그만큼 유대감을 쌓는게 쉬운듯 했다. 커다란 단추 같은 눈을 깜빡이며 강아지는 크리스의 품에 안겼다."...뭘 봐."강아지는 새까만 눈으로 크리스를 쳐다봤다. 가슴 한켠이 괜스레 뜨끔거렸다."불쌍한것."크리스가 한손으로 강아지를 뒤집자 강아지는 불편한듯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애처로운 목소리에 얼른 바닥에 내려놓자 강아지는 다시 뽈뽈거리며 쇼파 아래로 들어갔다. 작은 솜뭉치를 집에 데려오게 된건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때는 약 한시간전쯤 집 주변 마트에 갔다가 돌아올때 였다. 추위에 조금 약한 편이라 얼른 집에 가려는 맘에 크리스는 골목길을 선택했다. 이 길엔 주택가와 작은 가게들이 즐비했다. 한참 골목을 빠져나가다 크리스는 슈퍼앞 전봇대 아래에 있는 상자에서부터 솜뭉치를 만났다. 흔한 쪽지도 없이 상자 안에서 꿈틀거리던 하얀 강아지는 그렇게 크리스의 품안까지 들어왔다. 유년시절부터 야구에 푹 빠져있느라 차마 다른데 신경을 쓰지 못했던 크리스는 당연히 무언갈 길러본적도 없었다. 크리스에게 이 작은 생명은 그야말로 부담과 책임의 덩어리 그 자체였다. 보고만 있어도 멍해지는 강아지를 보다 문득 크리스는 발이 따끔한것을 느꼈다. 크리스는 시선을 돌려 저 아래 강아지가 발을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는것을 보았다.작은 강아지를 보고있자니 크리스는 어딘가에 콕 박혀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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