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윤기를 좋아하게 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정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부풀어간다는 것도 간과한 채. 여주는 주말 내내 별다른 소식이 없는 윤기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봤다. 프로필 사진은 설탕이가 자고 있는 사진, 배경 사진은 윤기가 설탕이를 안고 있는 모습. 윤기의 설탕사랑이 여실히 드러나는 프로필 상태였다. 그 사진을 보고 또 보고 혼자 속앓이를 시작한 여주다.
"사진을 왜 안바꾸냐.."
윤기의 가까운 지인들은 윤기의 프로필에 윤기의 얼굴이 있는 것 만으로도 식겁하며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윤기의 생각은 그저 설탕이가 잘 나온 사진에 자신이 나왔을 뿐이었다. 여주는 한참을 고민했다. 윤기와 알바생과 고용주의 사이로 지내기엔 뭔가 많이 아쉬웠다. 몇 주 동안 지켜본 결과, 윤기에게도 만나는 사람이 없어 보였고 자신의 마음을 잘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다른 이유보다도 윤기와 연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 제일 컸다.
"슈가야. 나 어떡하지?"
"애옹"
"무턱대고 들이대면 부담스럽잖아."
여주는 답답한 마음에 옆에 한가로이 누워있던 슈가를 번쩍 들어 눈을 맞추었다. 갑자기 높게 들어올려진 슈가는 귀찮다는 듯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여주는 아랑곳 하지않고 이것저것 묻는다. 하얗기만 한 고양이 슈가에게 대답을 들을리가. 내려달라고 버둥대는 슈가를 내려놓은 여주가 침대에 풀썩 엎드렸다. 멍하게 있으면 자꾸만 후드티를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며 머쓱한 듯 웃던 윤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꾸만 붕 뜨는 기분에,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여주가 오랜만에 카페에 출근하니, 알바생들이 오 사장님! 하며 과한 관심을 보인다. 귀찮아진 여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알바생들을 물렀다. 주말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꽉 찬 카페를 둘러보며 앞치마를 단단히 매듭지었다. 빈 테이블이 없어 새로 들어오는 주문도 없었기에 그저 멍하게 있는데, 누군가 카운터로 다가오더니 반가운 목소리를 낸다.
"누나!"
1년 가까이 되는 기간동안 자주 오는 손님 중 한명, 정국이었다. 근처 대학교에 다니는 정국은, 친구를 따라 우연히 온 카페에서 여주를 본 후 단골이 되었다. 주문을 받으며 환하게 웃는 여주의 모습에, 뻔한 말이지만 반해버렸단다. 자주 오다보니 여주와도 친해졌고 어느샌가부터 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한 정국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여주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요즘 왜 출근 안해요? 얼굴 보기 너-무 힘들다."
"능글거리는 것 좀 봐. 너 24살 아니지."
"아니면, 말 놓아도 돼요?"
"까분다."
정국이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다며 눈썹을 모으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장난스러운 행동에 여주도 웃음을 매달고 받아쳤다. 그러다 나온 반말 소리에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는 여주였다. 비록 세 살 차이지만, 정국의 마음을 알고 있는 여주는 딱 이 정도의 관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정국이 아 맞다. 하며 자켓 안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이거요."
"이건 왜?"
"저번에 나 빌려줬잖아요."
정국이 내민 건 대일밴드 한 통과 마데카솔 연고였다. 한 달 전인가, 정국이 놀러와 유리잔을 깬 적이 있었다. 놀라서 급히 줍다 손이 베여버린 정국에게 여주가 밴드와 연고를 건넸었는데, 드디어 갚는다며 뿌듯해했다. 기억하고 있었네? 기특하게 바라보는 여주에 콧대가 높아진 정국이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체를 해 댄다. 제가 또 이렇게 섬세합니다. 하는 말과 함께. 밴드 통에 검정 네임펜으로 하트가 예쁘게도 그려져있다. 정국답다, 라고 생각한 여주다.
"누나 이제 주말에 나오는 거에요?"
"글쎄, 원래 주말에 안 나오는 날인데 요즘 평일에 아예 안나와서 가끔은 나와야 될 것 같기도 하고."
"평일에 뭐 하는데요?"
"고양이 돌보는 거 해!"
"슈가요?"
"아니! 설탕이!"
설탕이를 생각하자 저절로 윤기가 떠오른다. 또 방싯 방싯 터지는 웃음과 함께 광대가 쑥 올라가는 여주다. 설탕이? 처음 들어보는데. 정국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인지 여주는 윤기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영문을 모르는 정국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주에게는 길고 길었던 주말이 지나고, 드디어 월요일이 되었다. 일부러 서둘러서 아홉시 반에 갔는데, 윤기는 이미 출근하고 난 후였다. 아쉽다. 괜히 입을 비죽이다, 설탕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것을 보자마자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설탕아- 하고 달려가 품에 안았다. 오랜만이야, 하고 부비적거리자 귀찮다는 듯 솜방망이 같은 발로 여주를 밀어낸다.
"잘 지냈어 주말동안?"
주말에 조금 다듬은 것인지 털이 조금 짧아져 있었다. 그 덕에 더욱 귀여움을 뽐내는 설탕이를 머리부터 등까지 살살 쓰다듬었다. 금세 나른한 표정을 짓는 설탕이를 흐뭇하게 보다, 오늘도 깔끔한 윤기의 집을 둘러보았다. 주방에 있는 식탁 한 켠에 조금 큰 플라스틱 용기가 놓여져 있었다. 뭔가, 하고 다가가 보니 포스트잇과 함께 츄르를 비롯한 고양이 간식이 여러개 채워져 있다.
[민설탕이 다 먹은 츄르 값입니다.]
간결하게 적힌 한 마디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아, 진짜 귀엽다 민윤기. 어떻게 서른 살이지? 포스트잇을 보며 혼자 발을 동동 구르는데,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뿅 하고 생겨났다. 이거다! 하는 생각. 계획은 이러했다. 6시를 조금 넘어서까지 설탕이를 돌보다, 윤기가 들어오면 저 츄르 대신 밥을 사달라고 하는 것. 생각이 마무리되자, 윤기와 함께 밥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붕 하고 들떴다.
"어, 안 가셨네요."
"네. 설탕이 심심한 것 같아서요!"
아쉽게도 단정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인 윤기가 여주에게 인사했다. 반가움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띄운 여주는 설탕이를 안아들어 윤기에게 다가갔다. 소파 위를 뒹굴거리다 안아들린 설탕이는 특유의 표정으로 윤기를 바라보았다. 그런 설탕이를 보자마자 입동굴을 훤히 보이며 밝게 웃는 윤기다. 설탕이를 보고 웃는 것인데, 그 표정에 심장이 벌렁거리는 건 여주였다.
"아. 저기 저거 가져가시면 돼요."
"..저 저거말고 다른 걸로 받아도 돼요?"
여주의 제안은 생각하지 못했는지 윤기가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받고싶은 게 무엇인지 눈으로 물었다. 그 와중에 또 난리난 마음을 숨기며, 밥 같이 먹어요! 하고 패기넘치게 말하는 여주. 윤기는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아..네. 하고 긍정을 표한다. 속으로는 기뻐서 날뛰는 중인 여주는 그렇지 않은 척,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요?"
"네. 되게 바빠 보여서요."
"바쁘다기 보다는, 머리를 많이 써야해서."
윤기의 집 근처 닭갈비 식당에 온 여주는 야무지게 빨간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윤기에게도 하나 건네자, 머뭇거리더니 픽 하고 웃으며 받아든다. 닭갈비가 철판에 올려지고, 아주머니께서 큰 주걱으로 맛깔나게 볶아주신다. 가만히 기다리는데, 건너편에 앉은 윤기가 입까지 살짝 벌리고 멍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여주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마치 찹쌀떡 같아서 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다행히 윤기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진짜 짱이에요."
"..갑자기?"
"이번에도 고기잖아요."
"아."
갑자기 짱이라는 소리를 들은 윤기가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주를 의아하게 쳐다보자, 당당히 들어보였던 엄지를 내리며 손가락으로 닭갈비를 가리켰다. 그제서야 알아들은 윤기가 아. 하며 또 작게 웃는다. 윤기는 여주와 있으면 스스로가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닭갈비집에 와서 빨갛고 조그만 앞치마를 한 것도, 가까운 사이도 아닌 여주와 편하게 식사를 하는 것도. 여주와 있는 시간은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근데, 여자친구는 안 사귀세요?"
"뭐.. 귀찮기도 하고. 설탕이랑 있는 게 아직은 더 좋아서요."
"여자친구 생겨도 설탕이 질투할 것 같아요. 너무 잘해줘서."
윤기는 의외로 사적인 질문에도 잘 대답해 주었다. 여주가 농담을 건네자 윤기는 그런가요, 하며 웃었다. 처음으로 밥을 함께 먹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이 웃는 윤기의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은 여주였다. 이것저것 묻고싶은 것은 엄청나게 많았지만, 윤기가 부담스러워할까봐 함부로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여주다. 그래서 윤기와 마주보고 있는 이 상황이 좋으면서도 아쉬웠다.
"마음에 걸려서 안 되겠어요."
"네?"
"츄르랑 간식 사놓은 거 가져가서 슈가 주세요."
식당을 나오면서 윤기가 말했다. 그와중에 또 그게 신경쓰였는지, 여주를 자신의 차에 다시 채우고 집으로 향하는 윤기다. 여주는 윤기와 더 있을 수 있어서 땡큐였지만, 한편으로는 밥까지 얻어먹고 또 받아가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 진짜 괜찮은데, 하고 운을 띄우니 윤기는 설탕이가 다 먹으면 돼지 될까봐 그래요. 하고 여주의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준다.
"설탕-"
윤기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설탕이에게 다가갔다. 윤기가 주방으로 가 통을 가져오는 사이 아까 설탕이가 좋아했던 마사지를 잠깐 해주었다. 윤기가 여주에게 다가오자 설탕이를 안고서 현관으로 향했다. 진짜 아쉽지만, 집에 가야할 시간이었다. 설탕이를 윤기에게 넘겨주려는데, 답지않게 윤기의 팔을 밀어내며 여주에게 몸을 붙인다. 마치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얘가 왜 이러지?"
"그러게요.."
다시 설탕이를 안정적으로 안고, 아까 했던 마사지를 해주니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낸다. 처음 들어보는 그르릉 소리에 여주와 윤기 모두 놀랐다. 정말 기분이 좋을 때만 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말랑한 설탕이의 몸을 살살 눌러가며 마사지를 이어가자, 나른한 듯 눈을 감다시피 한 설탕이가 여주의 품 속에서 늘어진다. 윤기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여주는 뿌듯한 얼굴로 손을 계속 움직였다.
"마사지가 좋은가봐요."
"배우신 거에요?"
"아뇨. 그냥 동영상 보고 따라해본건데.."
그렇게 5분 쯤 지났을까, 이제는 정말 가야할 것 같아 윤기에게 설탕이를 넘기려는데 또 거부하며 아예 여주의 어깨 위에 거의 올라타려는 설탕이다. 윤기가 강제로라도 떼어내려하자 설탕이가 발톱을 세워 여주가 아, 하고 작게 신음을 한다. 어깨가 따끔거렸다. 당황한 윤기가 괜찮으세요? 하고 입술을 꾹 깨문다.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괜찮다 대답한 여주가 어떻게 해야하지..하고 고민하는데 윤기가 놀랄만한 말을 꺼낸다.
"괜찮으시면,"
"..."
"자고 가실래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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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초록글 영광입니다 ㅠㅠ
게다가 6따봉이라니..♥
정말 감사합니다..!
암호닉은 다음 화부터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