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XX월 XX일 날씨 따뜻함
또 늦잠을 잤다. 예전엔 아무리 늦어도 엄마가 깨우는 탓에 11시에는 일어나서 밥을 먹었는데, 지금은 일어나면 오후다.
어제 핫초코를 너무 맛있게 마셔서 그런지 또 마시고 싶은 마음에 용돈을 탈탈 털어 핫초코를 통으로 샀다.
우유도 같이 사서 따뜻하게 뎁힌 뒤에 가루를 넣고 휘휘 저었는데 모양도 이상하고 맛도 이상했다. 달고 쓰고 퍽퍽했다.
마지막엔 채 녹지 않은 초코가루 덩어리가 입에서 퍼석-하며 터지는 바람에 화장실로 달려가 전부 뱉어버렸다.
변기 커버를 잡고 몇 번을 토악질을 하다가 찬 물에 입을 헹궈냈다. 어제는 맛있었는데, 왜 내가 만든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가서 물어봐야겠다. 핫초코 타는 방법 좀 알려달라고.
20XX년 XX월 XX일 날씨 비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문구점에 가려고 준비하는 도중에, 엄마가 밖에 나가서 쓸대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서 공부나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서 혀를 낼름 내뱉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추웠지만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터덜터덜 나왔다. 누가 보면 백수인줄 알았겠지만 만약 그렇다 해도 난 그냥 백수가 아니다. 이쁜 백수일거다.
걸어서 가고 싶었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달리다보니 물 웅덩이를 제대로 밟고 말았다. 아끼는 신발을 신고 나온게 잘못이였다.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어짜피 핫초코 타는 방법만 묻고 돌아갈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해 걸음을 재촉했다.
문구점에 들어가니 사람이 더럽게 많았다. 대부분 여자애들이여서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거슬렸다. 계산대를 바라보니 역시 그가 있었다. 박찬열.
나만큼이나 여자 손님을 반기진 않는 것 같아보였다. 줄이 너무 길어 앞으로 척척 걸어간 뒤 왜 새치기냐고 짜증나는 말투로 말하는 여자애를 밀어버렸다.
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지려 했지만 뒤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그걸 막았다.
다시 그를 바라보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며 날 내려보는게 키만 컸지 딱 도경수다.
눈쌀을 찌푸리며 계산대에 손을 얹고 말했다. 핫초코 타는 법을 알려달라고. 그는 한동안 멀뚱히 날 바라보다가 풋-하고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아마 손님을 다 받고 나서 알려주려는 듯 했다. 어짜피 오늘 시간도 많으니 여기서 때우자 하는 생각으로 이쁜이 옆에 앉아있었다.
발이 시려워 무릎을 굽혀 다리를 들어올리자 이상한 자세가 되긴 했지만 발바닥이 따뜻했기에 끙끙 거리면서도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그 많은 손님들을 돌려 보낸 후에야 박찬열은 나를 바라봤다.
도경수 빼고 안넘어가는 사람이 없는 특급 눈빛을 보내며 조용히 핫초코를 중얼거리자 잠시 어디론가 가더니 핫초코가 가득 담긴 머그컵을 들고왔다.
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그랬는데, 어쨌든 핫초코는 또 맛있었다. 아마 한동안 내 위에서는 위액 냄새 대신 초코 냄새가 폴폴 풍길 듯 싶다.
입가에 묻은 핫초코를 혀로 핥으며 그를 바라보자 또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방긋 웃으니 또 와-라는 말과 함께 이쁜 핑크색 하트가 그려진 볼펜을 손에 쥐어줬다.
그리고 지금 그 펜으로 일기를 쓰는 중이다. 원래 선물 받은건 아끼면 안된다고 그랬다.
열심히 쓰고 다 쓴 펜을 보여주면 또 새로운 펜을 줄까?
20XX년 XX월 XX일 날씨 흐림
날씨가 꾸룩꾸룩하다. 그리고 내 기분도 꾸룩꾸룩하다.
오늘은 문구점을 가지 못했다. 도경수가 우리 집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남자가 남의 집에 들렸으면 밥 한끼 정도는 얻어 먹고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며 엄마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며 나를 괴롭혔다.
숨겨둔 야한 사진을 찾는 게임을 하는 중이라며 방 안을 샅샅이 살펴보고, 컴퓨터에 야동이 있나 없나 확인해보고, 아! 이 일기장을 들킬 뻔했다.
도경수한테 들키면 분명히 나를 놀려먹을게 틀림없기 때문에 난 일기장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화장실 수건을 놓는 장 안에 수건처럼 껴놨었다. 조금 눅눅해진 것은 기분탓이겠지.
...갑자기 지금 핫초코를 먹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다. 죽을 것이다. 혼자 꽥꽥 거리고 있으니 엄마가 달려와서 또 등짝을 후려쳤다.
방학이 끝날 때 즈음이면 내 등은 손바닥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도경수한테 자랑해야지.
그는 오늘 내가 안와서 궁금해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난 누구나 좋아하는 변백현이니까. 당연히 그도 나를 좋아해야 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폭포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 만큼 당연한 것이다.
20XX년 XX월 XX일 날씨 맑음
오늘은 아이라인을 그렸다. 내 화장대에는 아이라인 종류가 정말 많다.
며칠 전에 도경수가 전부 쓰잘때기 없는 것이라고 한움큼 잡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탓에 전부 다 새로 사느라 고생했다.
날씨가 맑아서 그런지 오늘은 안그래도 이쁜 눈이 더 이뻤다. 눈꼬리를 쭉 그어 올리니 순한 강아지는 사라지고 섹시한 고양이만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고양이가 문구점에 가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야옹.
이제는 문구점이 가깝게 느껴진다. 내린 빗물은 이미 말랐고, 젖은 내 신발도 깨끗하게 원상복귀 되었다.
문구점에 들어갔더니 그는 없고 다시 싸가지 여자가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나를 흘끗 쳐다보다가 아이라인이 그려진 내 눈을 보고 눈이 커졌다.
다른 남자들이 보면 귀여웠을 표정이였겠지만 나한테는 그저 성형에 화장을 덧칠한 마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아닌 사람이 계산대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안들어 눈썹을 쳐들자 아무 말이 없는 날 째려보다가 뒤를 보고 싱긋 웃는다. 돌아보니 그가 있었다.
여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인 뒤에 나를 보며 숨을 급하게 들이키는 상황을 봤다. 박찬열-하고 말하려고 그랬는데 여자가 그에게 달려가서 팔짱을 꼈다.
보란듯이 꼬리를 흔드는 여시년이 보기싫어 그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걸고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내가 더 이뻐.라고 말한 뒤에 문구점을 나왔다.
안봐도 야동이다. 내가 승리다. 내일은 문구점에 가지 말아야겠다.
시간 있을 때 얼른얼른 올리는게 좋겠죠? D.O.는 계속 쓰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