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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이준혁 몬스타엑스 샤이니 온앤오프
곰곰이 전체글ll조회 3053l 1





느릿하게 하품을 찍, 내뱉은 학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제 막 눈을 떠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거뭇거뭇한 천장에 한 번,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원식의 얼굴에 두 번 ‘에이 씨발.’하고 중얼거린 학연이 떡진 제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끔뻑였다. 아침부터 웬일이냐. 하고 묻자, 난데없는 육두문자에 입을 비죽이 내밀고 있던 원식이 너 먹을 거 없다메. 하며 던지듯 마트 봉투를 내민다. 그러면 학연은 이럴 때만 흥분해서, 


“오 미친, 먹을 거 사왔냐?”


하며 달겨들기 일쑤였고, 원식은 그런 학연의 머리를 쭈욱 밀어내며, ‘밥 좀 잘 챙겨 먹고 다녀라.’라며 봉투에서 음식 하나를 꺼내 개밥주듯 학연에게 건네었다. 오늘은 소시지. 싱글벙글 웃으며 소시지 껍질을 깐 학연이 그 하얗고 길쭉한 물체 하나를 제 입에 쑥, 털어 넣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웃어 보였다. 하여튼, 김원식 넌 진짜 착한 새끼야. 투박한 손길이 연신 원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근데 이거 꼭 남자 좆같이 생기지 않았냐.”


미친놈. 학연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갈기며 원식은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튼 너는 생각 자체가 음탕해 아주. 제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면서 그러한 말을 건네는 원식이 우스워 학연은 픽, 콧방귀를 뀌며 ‘너는 어떻고.’하며 대꾸했고, 결국 뒤통수를 한 대 더 맞았다. 아오씨, 아프잖아! 얼얼한 제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학연이 말했다.


“야 근데 진짜 남자 거기 같지 않냐고. 아닌가?”

 
“너는 그냥 뭐든 길쭉한 것만 보면 부랄 같다 그러잖아.”


그건 그렇지. 헤죽헤죽 웃으며 수긍하는 학연의 모습을 바라보다, 원식은 그 모양새가 한심하기 그지없이 느껴져 팩, 고개를 돌리었다. 이제는 철 좀 들 때가 됐건 만은, 여전히도 저런 음탕한 말을 내뱉으며 낄낄댄다. 쟤는 언제쯤 철이 들까. 축 처진 눈꼬리가 다시금 세모꼴이 되어 학연을 흘겼다. 물론 학연 본인은 개의치 않는 듯, 덜 까진 소시지 껍질을 벗기며 헤죽헤죽 웃을 뿐이었지만. 야, 이것 봐 발기한다. 킥킥거리며 음탕한 농을 건네는 학연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제 큰 손으로 때리며 털썩, 원식은 바닥에 누워 학연이 그러했듯, 거뭇거뭇하게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더럽다. 나중에 학연이 소설가로 대박 나면 천장 도배부터 다시 하라고 말해야겠다고- 원식은 생각했다. 아니다. 그때쯤이면 이미 더 큰 집으로 이사 갔으려나. 그런 생각이 든 건 몇 초 후의 일이었다.


“야, 너 근데 그 소설 원고는 언제쯤 내는 건데?”


“아직 덜 적었는데 어떻게 내냐 병신아.”


학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틀어진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원식이 답답함에 인상을 찡그리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학연에게 말했다. 이 새끼야. 취업도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면 얼른 원고 완성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래야 먹고 살지. 쩝, 입맛을 다시는 행위가 이 상황이 썩 달갑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야, 너 소나기 적은 작가 알지”


“황순원?”


“그래 그분. 그분은 열일곱때 등단하셨어. 니가 지금 등단한대도 그분보다 십 년은 늦어 임마.”


…어쩌라고. 작게 대꾸한다. 소시지를 다 먹은 건지 주황빛 껍질을 팩, 쓰레기통으로 단번에 던져 놓고서 원식의 곁에 누운 학연이 천장 대신 천장 중앙의 백열등을 바라보며 흡, 하고 숨을 들이 마셨다가, 이내 푸하-하고 뱉어냈다. 병신같이 뭐하는 짓이야. 흘리듯 건네는 핀잔에 뭐. 어쩌라고. 하며 원식을 주욱 밀어내고서 학연은 몸을 뒤척여 원식에게 등을 내보였다. 삐졌냐? 묻는 목소리가 여간 얄미운 게 아니라, 학연은 조용히 세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이고서 눈을 감았다.


“뭐야, 또 자게?”


“이재환 올 때까지 잘 거야. 건드리지 마.”


“기껏 먹을 거 사왔더니 한다는 대접이 이따위냐?”


부루퉁한 표정으로 원식은 학연의 몸을 흔들었다. 아 그러지 말고 밖에 나가자, 어? 말이 많다. 귀찮은 마음에 ‘아 쫌! 가만히 좀 있어!’하고 말한 학연이 연신 저를 흔들어 대는 손길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결국에는 에이씨. 하고 중얼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치 올림픽같은 새끼야. 마트로고가 찍힌 봉투에서 음료수 하나를 꺼내 거칠게 따서 들이킨 학연이 곧 텅텅 빈 음료수 캔을 훽, 원식의 머리로 던지고서는 방음이 되지도 않는 것을 알면서 꽥꽥 큰 소리로 제 목청을 드높였다. 잠을 못 자게하네 진짜. 그런데도 뭐가 좋은건지 헤실헤실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원식이 그다지도 짜증날 수가 없다. 여전히 그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띄우며 원식이 말하기를,


“아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자지마. 응?”


“염병. 소설 원고 하나 못 써서 졸지에 백수 된 나는 잘 거니까, 혼자 놀아라, 어?”


단단히 삐졌다. 킬킬거리며 원식이 학연의 머리를 제 큰 손으로 헤집고선, 우리 작가님. 많이 삐졌나보네. 하며 예의 그 살가운 목소리로 살살 학연을 달래었다. 소설가님, 우리 소설가님,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 어? ‘소설가님’이라는, 그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에 그제서야 한 풀 꺾인 학연이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고선 무슨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양, ‘너는 나 아니였음 누구랑 놀래?’하며 슬며시 원식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렇게 나와야 차학연이지. 원식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학연의 떡 진 머리를 헤집었다.


“야 잠시만. 누구 오는 소리 안들리냐?”


“어?…이재환 오나보네 ”


분위기 좋았는데. 눈치 없네 이재환. 미간을 찌푸리며 재환의 방문에 대해 신랄하게 욕을 하다, 결국 학연에게 한 대 맞고서야 원식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금씩 마트 봉투에 부닥쳐 바스락거리는 소리라도 날라치면 아 쫌! 하고 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는 학연의 머리를 후려갈기며, ‘에라 이 돈에 미친 새끼야.’하고서 오매불망 재환을 기다리는 학연을 욕하고서 원식이 성큼성큼, 신발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만큼 좁은-에 다가가 제 낡은 운동화에 발을 꿰어맞추고서는, 학연에게 ‘나 간다.’하고 한마디를 건네었다.  어. 그래. 잘 가라. 무심한 한 마디를 끝으로 원식은 학연의 집에서 쓰윽, 제 몸을 빼내었다.


원식이 간 지 몇분쯤 지났을까, 푸른색 빗을 들고서 제 머리를 가지런히 다듬던 학연이 별안간 들려오는 쿵쿵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을 향해 조심히 다가갔다. 뿌옇게 비춰오는 실루엣이 익숙하다. 이미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으나, 혹 벌컥 문이라도 열었다가는 제가 경망스러워 보일까, 부러 누구세요? 하고 확인 사살의 질문을 던지고서 학연은 바깥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 재환의 목소리다. 환하게 웃은 학연이 벌컥, 낡은 현관문을 열고서 제 앞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재환을 향해 환히 웃어보였다. 재환아. 부르는 목소리가 방금 전 원식을 부르던 그것과는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재환아. 오랜만이다. 그치?”


아양 어린 목소리가 이다지도 간드러질 수가 있을까.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저를 맞이하고선 익숙하게 제 목을 감싸오는 학연의 두 손을 바라보다, 재환은 무심히 그 손을 제 목에서 떨구어내고선 털썩, 그 좁디 좁은 방 안에 들어가 정자세로 가만히 앉았다. 우리 재환이, 요즘 많이 피곤해? 평소와 다른 퉁명스러운 반응이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 학연이 원식이 두고간 마트 봉투 안에서 어렵지 않게 박카스 하나를 꺼내어서는, 조심스레 재환에게 내밀었다. 우리 재환이 피곤하면 안되는데. 그치? 그러나 재환은 걱정 어린 목소리가 무색하게 제 앞에 놓인 박카스 병을 아무렇게나 치워놓고서 입을 열었다.


“차학연.”


응? 여전히도 웃는다. 재환은 딱딱히 얼굴을 굳혔다. 빙글빙글 웃어보이는 학연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애정보다는 혐오감, 혹은 분노에 가까운 감정들이 치솟았다. 여전히 그 서늘한 목소리로 재환은 말했다.


“얼마 필요해?”


얼마 필요해. 늘상 같은 질문을 받아왔음에도 학연은 그 질문에서 낯선 감각을 느꼈다. 또렷이 저에게 맞춰오는 눈이 유난히 매섭다. 얼마 있는데? 학연은 애써 빙글빙글 웃으며, 속에도 없는 말을 꺼내며 재환의 가슴팍을 살살, 유약하게 쓸어내렸다.


“좋게 말할 때 빨리 끝내자. 얼마 필요해.”


“에이, 재환아 나 한두번 봐? 내가 너한테 돈이나 뜯어 먹으려고 너 좋아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야살스레 웃어뵈는 그 입꼬리가 가슴 속 깊숙한 곳부터 재환의 속내를 뒤틀고 있었다. 슬그머니 목언저리를 감아 오는 손길을 가만히 받들고만 있다, 마지막으로 학연의 입술이 재환의 입가에 닿았을 즈음에, 재환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차학연. 언제까지 등쳐먹고 살래?”


그게 무슨…. 학연은 놀란 눈을 치켜뜨며 재환을 바라보았다. 제가 재환을 등쳐먹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비록 제가 재환에게 꼬박꼬박 돈을 받으며 근근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맞는 말이었으나, 그것이‘등쳐먹었다’라는 범주에 들어가기엔 그 돈의 액수가 재환의 수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적었고, 무엇보다 평범히 살던 학연을 이 곳으로 끌어 온 장본인이 다름 아닌 재환이었다. 그런데 학연이 재환의 등에 붙어 벼룩 마냥 재환의 고혈을 뜯어먹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으며, 사실 또한 아니었다. 학연은 입을 꾹 다물고서 재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게 무슨 얘기야, 재환아? 묻는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등쳐먹었다니. 나 너때문에 집 나와서 지금 여기서 겨우 살고 있는데 그게 무슨….”


"알잖아. 너 내가 많이 봐준 거."


톡. 톡. 손가락 끝으로 불안정하게 손장난을 치고있는 재환의 손이 보였으나, 학연은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간 닿았던 재환의 눈길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별안간 재환이 제 지갑을 꺼내더니, 익숙하게 수표 두 장을 꺼내어 학연에게 내밀었다. 학연아. 부르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 진 듯 했다.


"나, 이정도면 너 많이 봐줬다."


"재환아."


"글쓰라니까 글도 안 써, 일하라니까 일도 안 해. 언제까지 내가 니 밥줄이나 하고 있어야 돼. 응?"


자신의 연인에게 밥줄이라 칭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학연은 생각했다. 아마, 아무도 없지 않을까. 허탈한 표정으로 재환을 바라보면서, 학연은 애써 차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분노에 가까운 슬픔이 치밀어올랐다. 나 간다. 그렇게 말하는 재환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나, 학연은 차마 붙잡지 못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재환을 바라볼 뿐이었다. 재환아. 설운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재환의 이름을 되뇌었으나, 재환은 그저 흘끗, 주저앉아 저를 올려다 보고있는 학연을 바라볼 뿐, 그 어떠한 말도, 그 어떠한 표정도 지어보이지 않았다. 재환아. 재환아. 어디선가 연이어 재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학연, 나 이제 여기 안 와.”


“…….”


“그 5년 동안, 니가 받아 먹은 걸 생각해.”


문이 닫겼고, 재환은, 사라졌다.







멍한 눈으로 학연은 제 앞에 떨어진 수표 두 장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종이. 이까짓 종이가 뭐라고.더듬거리는 손짓으로 수표를 주워든 학연이 곧 찢어버릴듯, 수표를 제 두 손으로 쥐고 바르르 떨다가, 결국에는 차마 찢지 못하고서 설운 울음을 내뱉았다. 이까짓 돈이 뭐라고 제 연인을 갈라놓는건지. 마음같아선 이까짓 놈의 돈, 그저 없애버리고 싶었으나, 저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고, 차마 종잇장 하나를 찢어버리지 못하고 울음만 뱉어내는 제 자신이 그렇게도 한심해 보일 수 없었다. 못되쳐먹은 놈. 개같은 놈. 입술 새로 우물거리는 욕지기가 나왔으나, 그 욕의 어떠한 부분도 재환을, 그리고 학연을 가리키지 않고 있었다. 공허하게 빈 공간에 주어 없는 욕설들만이 서럽게 일렁거렸다.


텅 빈 눈으로 겨우 울음을 그쳤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을 적이었다.  텅 빈 눈이 꼭 동태의 눈알마냥 초점 없이 주위를 훑다가, 이내 조용히 눈꺼풀로 제 존재를 가렸다. 담배나 필까. 근데 담배가 없을텐데.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면서 생각하던 학연이 답답한 마음에 원식이 두고 간 마트 봉투를 뒤적였다. 있다. 제 오랜 친구는 학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기 젖은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어색하게 웃은 학연이 담배 한개피를 들고서 재환이 그랬듯, 느린 걸음으로 현관으로 다가갔다. 낡은 쇳소리. 문에서 나는 그 낡은 쇳소리가 꼭 저의 처지와 같아보여 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비참하다. 하얀 잇새로 하얀 담배를 끼워물며 학연은 생각했다.


“이재환 일찍 갔네?”


계단 아래로 굵은 목소리가 학연을 불러왔다. 굳이 보지 않아도 원식임을 알 수 있었으나, 굳이 내려다 보며 원식임을 확인한 학연이 고개를 떨구며 차마 불을 붙이지 못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느새 원식은 학연의 곁으로 다가와 저도 담배 하나를 꺼내들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학연은 옥탑방 아래의 동네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자고 가는 거 아니였냐?”


“…안온댄다.”


어? 듣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듣지 못한것만 못해서, 원식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재환이 안온다니. 되묻는 목소리에 가만히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더니, 담배가 절반이 타들어 갔을 즈음에야 학연은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를 띠우고서 말했다. 이재환이 나 다신 안보겠대. 순간, 원식은 제 귀를 의심했다.


“왜, 너한테 화난 거 있대?”

        
“아니.”


“그럼?”


“질렸대.”


예상 외로 너무나 담담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학연은 저도 은근히 놀라는 눈치였다. 아까 전엔 그렇게나 울음이 나오더니, 이제는 이야기를 읊조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 놀란 눈을 끔뻑이며 저를 바라보는 원식에게 ‘뭐.’하고 대꾸한 학연이 이윽고 채 다 피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선, 비비적비비적 제 낡은 운동화로 비벼 담배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발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원식의 목소리가 다급히 학연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내가 일도 안하고 글도 안써서 싫댄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바닥에 드러누워 손장난이나 치고있는 학연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원식이 미끄러지듯 학연의 곁으로 다가와 앉아 물었다. 너 그러면 이제 생활은 어떻게 해? 이재환이 돈 주잖아. 그러고보니 그걸 생각을 못했네. 학연이 제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수표를 안 찢길 잘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제 대답을 기다리는 원식을 뒤로 한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학연이 아무 것도 없는 방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얼마 안 가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수표 두 장을 주워들고선 수표에 적힌 액수를 확인했다. 100만원짜리 두 장. 이백만원이나 줬네. 그래도 마지막으로 재환이 선심을 썼구나-하고 생각하며 학연은 원식에게 덜렁덜렁, 수표 두 장을 내밀어보였다. 뭐야. 이 돈 어디서 났어? 원식은 놀라 물었고, 학연은 대답했다.


“이재환이 마지막으로 주고 갔어.”


“너 그럼 지금 이거 빼곤 돈 없는 거야?”


“어.”


그럼 이 돈 다 쓰면 어떻게 살아? 글쎄…. 몸이라도 팔아야지. 야! 농담이야 농담. 학연이 짧게 웃으며 원식의 머리를 헤집었다. 원식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이런 류의 농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따금씩 재환을 만나기 위해 치장을 하며 농담 어린 말로 ‘나 몸 팔러 간다-’하고 말하면 노발대발 화를 내며 얼굴을 붉히던 원식을 봐왔으니까.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학연을 바라보던 원식이 별안간 진지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더니, 제 특유의 낮게 깔린 목소리로 학연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내뱉았다. 몸 파는 건 절대 안 돼. 절대. 그러니 학연은 웃으며 ‘그럼 너한테 빌붙어 살까?’하고 말했고, 원식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래. 차라리 그렇게 살아라.”


했다. 물러 빠졌다. 킬킬거리며 원식의 머리를 쓰다듬은 학연이 됐네요. 하며 딱딱한 바닥에 제 몸을 다시 뉘였다. 아무튼 나 잘거야. 이제 가. 인사 아닌 인사가 원식을 밀어냈다.


“아무튼 너 진짜 몸 파는 건 안된다. 알았지?”


“알았으니까 가. 나 잘거라고.”


연신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학연을 내려다보다, 결국에는 한숨을 내쉬며 원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걱정되는데. 현관을 나가면서도 당장에 학연이 어디라도 사라질 것 처럼 걱정스러운 눈길로 가만히 쳐다보다가, 원식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너 진짜 그런 짓 안할거지? 아 안한다고! 결국에는 큰소리가 오간다. 아 왜 화를 내고 그러냐! 걱정돼서 그러잖아! 아 내가 안한다는데 니가 왜 지랄이야! 그런 식으로 수차례 육두문자와 큰소리가 오가다가, 결국 원식이 나가고 나서야 그 상황은 종료되었다.  귀찮은 새끼. 학연은 소리내어 중얼이며 조용히 눈을 떴다. 돈, 쓰기 싫은데. 제 손 끝으로 하얀 수표 두 장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떡해야 하지. 눈을 깜빡이며 학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 날부터, 학연은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



짙은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학연의 발걸음이 위태하게 비틀거렸다. 나 왔어 재환아-텅 빈 방안으로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교태를 부렸으나, 목소리에 대답은 없었다. 헤죽헤죽, 연신 즐거운 미소를 얼굴에 띠우며 콧노래를 흥얼이던 학연이 이내 하나하나 옷가지들을 벗어 던지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속옷과 하얀 티셔츠 하나만을 입은 채 흥이 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이름표를 붙여 내에 가슴에-구슬픈 노래가락이 좁은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벌컥,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들어와 학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학연! 마악 누우려고 이불을 깔고있던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멀뚱멀뚱, 제 앞의 사내를 바라보다가, 그제사 알아챘는지 학연이 히죽이 웃으며 대답했다. 김원시익-말꼬리를 늘리는 모양새에 한껏 취기가 어려있었다.


“차학연, 너 내가 그런 짓 하지 말랬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가 꽤나 화가 났음을 알렸다. 짙게 그려진 아이라인과 선명히 붉어진 입술을 원식은 빤히 바라보았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개년아. 처음으로, 원식은 진심을 다해 학연에게 욕지기를 내뱉았다.


“뭐어? 개녀언?”


“넌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듣지? 이 씨발년아.”


화가 났다. 화장품이 덧대어 발려있어 평소보다 갑절은 화사해보이는 그 얼굴을 한 대 주먹으로 강하게 후려갈기고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으나, 원식은 그저 이를 으득 갈며 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파르르 떨리고 있는 제 주먹을 차마 휘두르지 못하고서 그렇게 서있었다. 히죽, 학연은 해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개년 아닌데에. 주욱 늘어나는 말꼬리가 분노로 일렁이는 원식의 가슴께를 쿵쿵,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로 건드려왔다.


“너 내가 뭐라 그랬어. 몸 팔고 그러는 짓 하지 말랬지?”


“나 몸 안팔았어. 그냥-그냥 술만 마신건데.”


그 말이 거짓말임을 누구보다도 원식이 제일 잘 안다. 누군가와 관계없이 술을 마실 학연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까. 이제는 학연의 양어깨를 잡고 부들거리는 원식을 보며 학연은 여전히도 웃었다. 화사하게 웃었다.


“차학연. 너 지금 그게 얼마나 더러운 짓인 줄 알고 하는 거야? 어?”


“안 더러운데. 학연이 안 더러운데.”


“안더럽다면서 씨발,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고!”


부들부들 떨며 저에게 화를 내는 원식의 모습이 낯설었다. 취기에 잔뜩 흥이 올랐음에도 원식이 무언가 저에게 화가 났다는 걸 알아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학연이 원식을 바라보았다. 


“왜그래에. 화났어?”


헤죽헤죽. 실없는 웃음이 어느 매춘부의 집으로 낭창히 울려퍼졌다.



“에. 화내지 마라아. 니가 화내면 난 어떡하냐?”


“…몰라 씨발. 너 다신 안 찾아 올 거야. 개같은 년.”


목소리가 울먹이는 듯 했다. 그렇게 한참을 학연을 보며 개같은 년, 개같은 년. 하고 욕을 읊조리다가, 원식은 제 화를 참지 못하고서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냐아? 등 뒤로 학연의 목소리가 꽂혀왔다.


“그래. 다 가버려라. 이재환도 가고-너도 가고-.”


다 가버려 아주 그냥. 밖을 나서는 원식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한창 욕지기를 내뱉던 학연이 채 화장도 지우지 않고서 풀썩, 이불에 누워버렸다. 피부가 답답한 느낌이 들어 화장을 지우고 싶은 충동이 간절했으나, 그만큼 몸이 부지런하질 못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해야될텐데. 한 번 그런 생각이 들자, 마치 발을 족쇄로 묶은 마냥 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내일 일어나서 지우지 뭐. 결국 학연은 화장을 지우지 않았다. 여전히 피부가 무겁고, 답답하고, 찝찝했다. 아리라앙 아리라앙 아라리요-매춘부 하나의 목소리가, 낭창히 천장을 두들겼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재환이 떠올랐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원식도 떠올랐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침대에 누워 학연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덜렁거리는 백열등. 거뭇거뭇해진 천장. 재환의 눈에 비친 저가 꼭 저랬을까. 노랫가락을 더 읊으려 입을 달싹거리다가, 학연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 어느 곳에도 제 노랫가락 들어주는 이 하나 없을 걸 알기에.


***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붙잡고서 일어나 학연은 급하게 제 옷을 챙겨입었다. 옷이라 해봐야 누렇게 빛이 바랜 하얀 와이셔츠 한 장과 오래 전에 재환이 사주었던 검은 바지를 몸에 꿰어입는 게 다였으나, 어찌됐건 시간이 얼마 남질 않았기에 그 짧은 순간마저도 행동 하나하나가 날쎄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옷 다입었고. 전신 거울을 보며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은 학연이 슬몃, 제 구레나룻을 단정한 옷차림에 맞추어 정리를 하고서는, 앞머리를 조심히 옆으로 밀어 핀으로 고정시키고선 화장품을 꺼내었다. 일전에 재환을 따라 집을 나오면서 이유도 없이 제 누나의 화장대를 뒤져 훔쳐 온 것들이었다. 그땐 이걸 언제 쓰나 했었는데. 제 눈에 짙게 그려진 아이라인을 보며 학연은 조소를 지어보였다. 이제서야 쓰는 구나. 자조적인 말씨로, 학연은 잘됐네. 하고 말했다.



화장을 다 끝내고서 마지막으로 문을 단단히 잠근 학연이 붕 떠오르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발걸음을 뗐다. 제법 쌀쌀한 가을 공기가 피부로 닿아왔다. 춥다. 희미하게 입김이 일렁이는 것도 같았다. 자박자박 계단을 내려가며 학연은 살살, 제 앙상한 두 팔을 쓸어내렸다.



"차학연!"



계단을 내려가는 찰나, 학연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뭐야. 안 올 거라더니. 흘리듯 중얼거리며 피식 웃는데, 원식은 그런 학연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저보다 검지 손가락 하나만큼 작을 학연을 내려다 보더니, 학연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다그쳤다. 너 진짜 내가 하지 말랬지.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학연이 예의 그 살가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김원식 너 무슨 내 애인 같다 야."



"차학연, 너 언제 정신 차릴래?"



결국 그러는 거, 너만 망치는 거라고 차학연! 알고 있다.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떡해. 나는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걸. 여전히 웃음을 띄우고 있는 얼굴로, 학연은 원식에게 말했다. 나는 괜찮은데.



"차학연."



낮게 깔린 목소리. 이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을까. 아니. 없다.



"차라리, 나를 뜯어 먹고 살아 그냥. 제발."



…늦었다. 나 가볼게. 제 어깨를 잡고 있는 원식의 팔을 밀어내며, 학연은 말했다. 쌀쌀한 공기가 연달아 이동하며 학연의 머리를 헤집었다. 참 맞아. 학연은 원식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집에 안 올 지도 몰라."



"뭐?"



"홍빈이네 집에서 자기로 해서."



"차학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학연은 무참히 즈려밟고서 대문을 빠져나왔다.



* * *




누군가는 지나가면서 한 번쯤, 학연을 욕했을 것이다. 게이 같은 놈. 더러운 놈. 걸레 같은 놈. 그러나 학연은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우리 아빠도 나한테 죽일 놈이라면서 욕 하셨는데 뭘. 5년 전, 저를 향해 퍼부어지던 그 수많은 욕설들과, 무자비했던 폭력을 기억하는 감각신경은 철저하게 면역 체계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오늘 또한 그랬다. 저를 보며 한껏 서로의 귀와 입을 맞대고서 수근거리는 시선 몇 쌍이 느껴졌으나, 그것은 제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학연은 그저 무심히 담배를 입에 물고서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예쁘다. 씨익. 짙은 립스틱이 발린 색정적인 입술이 짙게 호선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제 차림새를 다듬고서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익숙한 시선 하나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원식이라기엔 둥글고, 홍빈이라기엔 뾰족한. 그런 시선 하나. 학연은 쿵, 하고 제 폐부 깊숙한 어딘가가 막혀옴을 느꼈다. 다름 아닌 재환이었다. 저를 향해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제 등 어딘가로 쑤시게 다가왔다. 이재환. 그렇게 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자꾸만 막혀와 차마 부르지 못하고서 멍하니 재환을 쳐다보는 수 밖에는 없었다. 재환아. 이재환. 화장에 가리워진 두터운 눈이 간절히 재환을 쫓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잡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재환이 등을 돌려 도망치듯 학연의 곁을 떠날 때쯤이었다. 안 되는데. 일렁이는 눈빛으로 위태롭게 재환을 쳐다보던 학연이 제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잊은 채 위태로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재환과 최소한 이야기라도 나누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어 제가 홍빈을 기다리고 있던 것도 잊은 채 학연은 빠른 걸음으로 재환을 뒤따랐다. 재환아! 이재환! 절박하게 재환을 부르는 목소리가 공허히 울렸다.



“이재환!”



종국에는 재환이 멈춰섰다. 울먹이듯 숨을 내쉬며 저를 바라보는 학연를 내려다 보는 재환의 얼굴로 옅은 혐오감이 피어 올랐다.  고르지 못한 숨을 애써 가라앉히며 축축이 젖은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다, 학연은 제 두 손으로 재환의 양 어깨를 잡았다. 재환아. 하고 불렀다.



“재환아. 이재환.”



“놔 이거.”



험악한 목소리가 학연의 손을 밀어냈다. 그런 눈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왜그래 재환아. 떨리는 목소리로 재환을 부르며 손을 거둔 학연이 멍하니 재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매춘부의 목소리가, 그다지도 애잔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재환은 제 팔을 잡아오는 손을 혐오감 어린 눈빛으로 밀어낼 뿐,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학연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려왔다.



“내가 잘못했어. 응? 내가 다 잘못했어.”



“뭐야. 이 사람 누구야 재환아?”



여린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어 둘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부드러운 목소리. 학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 언젠가의 과거에 학연이 서 있었을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가만히 서 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흘끗 옆을 바라본 재환이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학연을 바라보며,



“모르는 사람인데.”



학연은 뒷통수를 강하게 맞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저를 모른다고? 저와 5년을 사귄 애인을? 저에게 몸을, 마음을, 인생을 바쳤던 사람을? 힘이 풀리려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서 간신히 균형을 잡은 채 학연은 텅 빈 눈으로 재환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거 아니잖아. 재환아. 너, 나 알잖아. 하는 말이 목구멍으로 자꾸만 치솟았으나, 그러한 모습마저도 학연의 마음에 담긴 재환이라서, 차마 그러한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뭐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옆으로 들려왔으나, 불과 며칠만에 저를 잊었다 말하는 제 과거의 연인을 바라보는 매춘부에게 그러한 낯선 이의 말이 들릴 리기 없었다. 가자. 학연의 손을 뿌리치듯, 재환은 말했고, 학연을 스쳐 지나갔다. 일렁이는 시야로 멀어지는 재환의 뒷모습과, 재환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띠운 낯선 여자의 모습이 담겨왔다. 어디선가 차디찬 가을 바람이 다가와 두터운 화장에 가리워진 학연의 얼굴을 날카롭게 스쳤다.



***



집으로 돌아온 학연이 뱉은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이재환을 봤어. 그 말에 담긴 의미나, 그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었어도, 세상을 모두 잃은 듯한 학연의 얼굴과 짙게 번져있는 아이라인만 보아도 그 속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 원식은 그저 학연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액체 덩어리 하나가 학연의 목으로 미끄럽게 타고 흘렀다. 알싸한 느낌. 학연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야, 차학연.”



원식은 나직이 학연을 불렀다. 흘끗, 원식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재환 그 새끼 너무 마음 담아 두지 마. 니가 뭐가 못나서 그런 새끼에 죽고 못사는 건데.”



그런 새끼. 그래. 정말로 ‘그런’ 새끼지.  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새끼가 한때 저의 연인이었다는 것도, ‘그런’새끼를 잊지 못하는 제 자신도, 너무나 우스웠다. 매춘의 희극. 아릿하게 가슴이 저려왔다. 마지믹으로 남은 소주를 병째 들이키고서 학연은 제 립스틱 묻은 입술을 닦아내었다. 손 끝으로 희미하게 빨간 색덩어리가 묻어나왔다. 그런 학연의 모습을 보며 입을 달싹거리다, 원식은 한숨 섞인 말씨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것까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 새끼, 사실 결혼 할 여자 있어.”



“뭐?”


학연은 원식을 바라보았다. 꽤나 껄끄러운 이야기라도 입에 담은 듯, 원식의 얼굴이 어두웠다. 결혼 할 여자가 있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별안간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학연이 묻더니, 이내 원식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학연의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저작년쯤이었나. 알잖아. 나 그때까진 그새끼네 근처에서 살았던 거. 우연찮게 들었는데, 그때 이미 혼담 오가고 있었어. 니가 몰랐어서 그렇지.”



“너한테 말해주려다가 이재환이 말하기 전까진 그냥 쉬쉬하고 있을랬는데, 이렇게 끝까지 말을 안할줄ㅇ…야! 차학연!”



원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학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쎄하게 속에서 분노가 차올랐다. 유래없이 사나운 눈길로 저를 흘기는 눈엔 원식에 대한 분노라기보단 재환에 대한 분노가 여실히 담겨있어서, 붙잡았던 학연의 손을 원식은 놓치고 말았다. 짙게 아이라인을 그린 눈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쿵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대문을 바리보다, 원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것 같아서 안 알려주려 했는데. 제 어리석음을 책망하며 원식은 제 이마를 부여잡았다.



***



“이재환! 이재환!”



아까와는 다른 거친 목소리로 학연은 재환을 부르며 학연은 사납게 문을 두드렸다. 제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 당장에라도 이 문을 부셔서라도 재환의 얼굴을 봐야했다. 이재환 문 안열어? 취기와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유래없이 거칠게 재환을 불러냈다.



저를 몇 년동안 가지고 놀았다. 이미 저는 다른 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만을 바라보는 학연을 보며 사랑한다, 좋아한다 거짓을 속삭였다. 그 달콤한 말로 저를 속이면서 재환은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때는 제가 그렇게나 목을 멨던 그 목소리가, 저를 유일하게 따스히 바라봐주던 그 시선이, 아니, 그의 존재 자체가, 모두 거짓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글픔이나 억울함 보다는, 분노가 원통함이 치밀어 올랐다. 제가 여태껏 들어 왔고, 받아 왔던 그 무수한 시선들과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학연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 같은 놈. 개 같은 새끼. 얼마 전에 원식이 저에게 내뱉던 말들을, 이젠 학연이 중얼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별안간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학연이 다시금 문을 두드리려 주먹쥔 손을 들어올릴 때쯤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저를 쏘아붙이는 재환을 보기가 무섭게 학연은 다짜고짜 멱살을 잡으며,



“이 개새끼야!”



하고 외쳤다. 난데없이 돌변한 학연의 태도를 보며 재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짙은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얼굴이 저를 쏘아보고 있었다. ‘개같은 새끼’ 하고 씩씩거리며 저를 욕하고 있었다. 이.년이 진짜. 재환은 따라서 거칠게 대답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이 개새끼야,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정말로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을까. 치가 떨려왔다. 이제는 재환의 멱살을 그러쥐며 말하는 학연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다, 재환은 학연의 손을 떼어내며 손찌검을 휘둘렀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학연의 고개가 돌아갔고, 재환은 연신 씩씩대는 숨소리를 내뱉으며 ‘이 씨발년아’ 하고 소리쳤다. 파운데이션으로 가려진 두 볼 위로 주룩, 처량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고싶어? 너 내가 5년동안 만나줬다고 니가 나한테 막 기어 올라도 되는 그런 존재라고 착각을 하나 본데, 꿈 깨. 이 씨발년아.”



“…이재환,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뭐? 이 미친 년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든? 너, 5년동안 나 참 잘도 속였더라?”



“…….”



“왜, 내가 뒤대주니까 그렇게 좋았어? 천박하고 더러운 년이 좋다고 신음이나 뱉고 있으니까 뒷맛이 아주 죽여주던?”



쓰레기 새끼. 쏘아붙이는 학연의 말을 가만히 듣다, 학연의 마지막 말을 듣고선 재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차학연 뒷맛이 좋긴 했지. 여전히 저를 보며 부들부들 경풍을 일으키는 매춘부에게, 재환은 나직이, 그리고 아주 또렷하게 말했다.



“차학연.”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건 일종의 사업 전략 같은 거였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그런 말 한 적 없어 ”



“좋았냐고? 좋았지. 차학연 뒷맛 아주 죽여줬지.”



“근데 그러면 뭐하나. 맛 좋은 쓰레기였는데.”



“너 내가 그랬지. 일도 안 하고, 글도 안 쓰고,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고.”



“차학연, 니가 그러고 사니까 내가 널 버린 거야.”



“돈은 돈대로 축내, 앵기긴 또 더럽게 앵겨대.”



“쓰레기 같은 년.”



학연은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재환은, 이 모든 일이, 학연의 그 더러운 ‘나태’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 간다. 여전히 저를 허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학연을 보며 재환은 말했다. 쿵. 문이 닫겼고, 학연은, 홀로, 남겨졌다.



그날 저녁에, 학연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원식은 제 얇은 점퍼를 여몄다. 으으. 씨발. 존나 추워. 작게 중얼거리는 원식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인지 제 털을 부비작대며 담 위를 걸어가는 검은 털빛의 고양이 한 마리를 바라보다가, 원식은 한참이 지나서야 학연이 고양이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훠이’ 하고 소리치며 고양이를 내쫓았다. 보통 학연의 집에 고양이가 들어서는 일은 드문데. 집주인의 철저한 관리 탓에 담벼락에도 고양이가 출몰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붙어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겨있지 않은 대문을 열고서 학연의 집으로 들어선 원식이 이따금씩 흙이 묻어나 바작이는 소리를 내는 계단을 걸으며 큰 소리로 학연을 불렀다. 차학연! 오늘따라 유난히 대답이 없다.



“차학연, 자?”



쿵쿵, 문을 두들기며 말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학연의 대답이 들려오질 않아, 다시 한 번 미심쩍음을 느낀 원식이 ‘차학연!’ 하고 큰 소리로 학연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내 또다시 대답이 없어 들어 간다는 통보 조차 없이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너무나 쉽게 열리는 문에 쯧, 하고 혀를 찬 원식이 방 안으로 들어서다, 제 피부로 닿아오는 싸늘한 공기에 멈칫, 발걸음을 굳히고서 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아무도 없다. 마치 그 어느 누구도 살지 않는 집처럼, 집 안은 황량한 공허함만을 내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차학연, 차학연? 불러보았으나 어떠한 대답도 없다.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 본 원식이 직감적으로 그것이 학연의 단순한 부재가 아님을 알고서는, 불안한 목소리로 학연의 이름을 되뇌이며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차학연, 차학연! 이제는 물음이 아닌, 간절한 바람이 학연을 부르고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어 젖혀보고 밖으로 뛰쳐나와 옆에 작게 딸려있는 창고에도 들어가 보았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학연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직감이 엄습해왔다. 원식은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제기랄! 원식은 인상을 찌푸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학연이 사라졌다. 인식하기가 무섭게 자꾸만 이상한 직감이 원식의 뇌리를 스쳐, 원식의 불안감을 자꾸만 증폭시켰다. 다시 한 번 전화하려 원식이 핸드폰을 집어드는데, 핸드폰의 검은 상단바로 아까까지만해도 보지 못했던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표시 하나가 덜렁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혹 학연일까 메시지를 확인을 했더니, 정말로 학연이었다. 발신 시간이 새벽쯤으로 적혀있는 그 문자를 보고서 원식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내 서랍장 두번째 칸 열어서 거기 있는 물건들 전부 이재환한테 전해 줘.



이상하게도 학연의 입에서 재환의 이름이 나오는 날이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원식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 장농 옆에 조심히 놓여있던, 그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던 서랍장의 두번째 칸을 열었다. 그곳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는 순간, 원식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곳에, 원고가 있었다. ‘화장한 남자’에 대한 희곡이 담긴.  원고가 있었다.


* * *


원래 7대악 웹진에 나태를 주제로 올렸던 글이었으나,
웹진이 엎어진 관계로 이렇게 글잡에 올려봅니다.
어차피 무료로 공개될 글이었으니 무료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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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진짜..헐밖에안나온다..
10년 전
독자1
아 너무 안타깝다........
10년 전
독자2
헐..........
10년 전
독자3
아 진짜 학연이...학연아...ㅠㅜㅠㅠ 그 원고가 있었다는 건 마지막에 원고를 다 써놨단건가요? 하..처음이자 마지막 글이 참..너무 아련하네요..그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그 희곡에 나오는 학연이는 과연 어떨지..원식이도 참 안타깝네요 옆에서 애만 탔을테니..결국 끝까지 원식이는 혼자였네요ㅠㅠㅠㅠ
10년 전
독자4
아... 학연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써놓은 원고가 있었네요 ㅠㅠ 안타깝습니다
10년 전
독자5
헐 ㅠㅠㅠㅠㅠㅠ학연이 불쌍해서 어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으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셋 다 불쌍하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6
헐... 원고가 있었네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안타깝다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ㅠㅠㅠㅠㅠㅠㅠ 잘 읽고 갑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독자7
헐.....원고가있었구나ㅜㅜㅜㅜㅠ학연아ㅜㅜㅜㅠㅜㅜㅜㅜ원식인또혼자네ㅜㅜㅜㅜ식이도어찌보면불쌍하다..재환이나빠...속이는건나쁜거야ㅜㅜㅜㅜ에휴어뜩해ㅜㅜㅜㅜㅜㅜ불쌍하다진짜ㅜㅜㅜㅜㅜㅜ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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