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나는 지금 취했나, 그래서 널 부른건가.
아닌데 이런 생각까지 하는거 보면 아직 버틸만 한것 같은데.
나는 항상 핑계 대기를 잘했다. 어려서부터 선생님께 혼날 상황에도, 우리 엄마가 날 꾸중할 때에도, 내가 조금 더 커서 가기 싫은 술자리를 몰래 빠질 때에도.
버릇인가보다 난 아직도 핑계 대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도 술을 방패 삼아 널 부른걸 보면.
우리에겐 오래된 여느 연인처럼 권태기가 찾아왔다. 고등학생부터 시작해 대졸을 앞둔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들을, 또 순서들을 차례차례 밟아가고 있었다. 처음의 그 풋풋했던 감정은 온데간데 없고 그저 오래된 친구처럼 우리 사이의 의리를 또는 시간을 그게 아니라면 추억을. 대충 그런것들을 지키고 간직한다는 마음에서 우린 지금의 인연을 끊지 못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세훈아, 나는 지금 조금 불안해. 누가 나에게 널 사랑한다 묻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그 마음이 처음의 그 마음과 같냐고 묻는다면 난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어.
어린시절의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지금 우리는 서로를 덜 사랑하고 있는건지.
그렇다면 혹 지금 우리가 하는짓이 시간낭비이면 어쩌지, 이제 그만 서로를 놓아주고 처음의 우리와 같았던 사랑을 새로 시작하는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면.
다시 한번 드는 생각이지만, 난 지지리도 핑계를 잘 댄다.
"가자"
아, 세훈이. 잊고 있었다 난 너에게 전화를 했었고 넌 나를 데리러 온다 했었고. '나 업어줘.' 칭얼거리자 답지않게 어린짓을 한다며 짜증아닌 짜증을 부리면서도 결국 등을 내주는 너에 난 한껏 웃으며 올라탔다.
"좋다"
"뭐가"
"이렇게 업어주는거"
"..."
"오랜만이다 그치"
그 후론 우리 둘 다 말이 없었던것 같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네 어깨에 고개를 박았다.
세훈아, 세훈아.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해? 혹시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니. 사랑하면 닮는다던데, 너도 나처럼 속으로 온갖 핑계를 대며 무서운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술 마시면 겁이 없어진다는데, 그거 다 거짓말 인것같애. 난 지금 너무 무서워. 겁이 나. 이제 곧 정리 될 우리 관계가.
정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걸까. 그 7년간의 인연이, 추억이, 정이, 사랑이 그 많은 벅차던 감정들 까지도. 단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는게 정말 말도 안된다.
"훈아"
"왜"
"많이 힘들지"
"알면 좀 잘해"
"내가 많이 미안해."
"ㅇㅇㅇ"
" 나 내려줘."
너는 생각보다 군말없이 날 내려주었다. 네 두 눈을 마주보고 선 순간, 난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항상 고마웠고"
"너 진짜 그러지마."
"사랑했어."
"ㅇㅇ아"
"우리 헤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