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귓가에 꽂히는 나른한 음성이 듣기 싫었다.
「나 사랑해?」
「씨발, 그만하랬지.」
태형이 제 앞에 놓여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는 호석에게로 눈을 돌렸다. 멀쩡한 의자를 놔두고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몸을 기대고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호석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꿈결 같은 웃음만을 입가에 걸친 채로 호석이 도르륵,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까지 이럴래.」
분노와 안타까움이 그득 묻은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피폐해져 버린 정호석을 김태형은 증오했고 또한 미치도록 사랑했다. 호석의 갈 곳이 없는 듯 이리저리 굴러가던 눈동자가 태형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동글동글, 선하고 고운 얼굴에 배인 어딘지 모를 퇴폐에 태형은 숨이 막히는 듯 했다. 한참을 태형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던 호석이 이내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호석이 웃었다.
「자기야, 무슨 소리야.」
호석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웃음기는 어느새 울음기와 섞여 묘한 표정을 자아내고 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
정호석은 아름다웠다. 아이처럼 맑았으며 순수했고 얼굴 그득 선함이 묻어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호석은 빛이 났다. 나의 태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때묻지 않은 아름다움은 내가 정호석을 사랑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늘 내 자신이 경계를 만들었으며, 어느 누구와도 일정 거리 이상의 관계를 유지했다. 먼저 선을 그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넘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호석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안녕, 태형아. 라며 웃던 정호석의 싱그러운 아름다움에 나는 직감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물론 내가 선을 확실히 긋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정호석은 너무나도 자주 선을 넘었다. 그것은 위험했으나 또한 신선했다. 처음이었다. 내 일상생활 속에 하나하나 배어들어왔고, 어느새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이.
「좋아해.」
고백이라기에는 서툴렀다. 그저 내 마음을 한숨 쉬듯 내뱉은 것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하지만 정호석은 너무도 쉽게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기야.」
정호석은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늘 저렇게 나를 불렀다. 오글거린다고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 아무리 말을 해도 늘 자기야, 였다. 선천적으로 애교가 많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정호석은 항상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자기야, 자기야. 그 모습도 나는 마냥 예뻤다.
하지만 정호석에게는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게 무슨 단점이냐, 하겠냐만은,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기야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지만 모두에게 친절했고 다정했으며 섬세했다. 물론 그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였고 처음 본 나에게도 싱그러운 아름다움을 선사하였지만 연인이 되고 나서도 그것을 고치지 못한다는 건 분명히 단점이었다.
「그만 좀 해라, 몇 번을 말해?」
「알았어, 고칠게. 화났어? 이잉, 자기야 잘못했어-.」
몇 번을 타일렀으나 정호석은 늘상 이렇게 애교로 그 상황을 무마하고는 했다. 처음 한두 번이야 그래, 고치겠지 하고 넘어갔으나 점점 짜증은 쌓여가고 있었다. 정호석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아예 연인이 없는 사람마냥 행동하고는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나는, 더이상 참아주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만하자.」
「…태형아, 무슨.」
「니가 하는 짓들 질려. 고칠 생각 안 하는 것도 좆같고 씨발, 그냥 그만하자.」
「저번에 말했던 것 때문에 그래? 내가 잘못했어, 응? 고칠게, 태형아.」
정호석은 필사적이었다.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보는 축 처진 눈꼬리에 마음이 동했지만 이 짓을 누구에게나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마저도 보기 싫었다. 내 팔뚝에 매달려 있는 정호석을 매몰차게 쳐내자 휘청, 하고 정호석이 떨어져나갔다. 당황한 듯 쳐다보는 새카만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 순간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병신같았지만, 정호석은 예뻤다. 도저히 밀어낼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으며 또한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여렸다. 그러고 일 초만 더 있어도 다시 달려가 정호석을 안아버릴 것 같았기에 나는 등을 돌렸다.
*
딩동.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태형이 중얼거렸다. 나른한 주말 오후를 과자 한 봉지와 맥주 한 캔으로 때우고 있던 태형이 저벅저벅 걸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제 품으로 안기다시피 기대는 형체에 깜짝 놀란 태형이 얼결에 현관문이 닫기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참을 태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형체가 고개를 들었고, 굉장히 익숙한 그 얼굴에 태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호석, 니가 왜…」
호석의 눈꼬리가 매끄럽게 접혔다. 너무도 예전 같은 그 미소에 태형은 잠깐 동안 어제의 이별이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말을 끝맺지 못한 태형의 놀란 얼굴 코앞에서 호석이,
「자기야.」
하고 태형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마당쇠입니다 :)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저는 뷔홉을 들고왔습니다 흐읍 ㅠ^ㅠ
독방에 앞부분을 잠깐 올렸었는데 좋다고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뒤에 살을 더 붙였어요!
상 중 하로 갈리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