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잖아, 친구라고.
내가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 들을거야?
결국 언성이 높아졌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내뱉은, 아니지 내던진 말에 동혁이 조금 움츠러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이동혁의 그 두 발은 절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고 굳게 자리를 지켰다. 꼭, 절대 변하지 않을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아파트 바닥은 차가웠다. 김여주는 이제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손을 내저었다. 제발 돌아가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동혁의 눈을 한 번 마주보지 않았다. 동혁은 그게, 더 아팠다.
"네가 보고 싶다던 영화야."
"필요없대도."
"이미 예매도 해놨어."
한 달 쯤 전인가. 예고 트레일러가 나왔을 때부터 보고 싶다면서 1분 가량 되는 영상을 반복해서 보던 여주를 기억해서는, 이렇게 찾아왔다. 혹시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영화관 안에서는 내 얼굴 마주보고 있는 게 아니라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못이기는 척 보러가주지 않을까 바라며 찾아왔다.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면서 제멋대로 표까지 끊어놨다는 말에 여주는 신물이 난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동혁이 한참을 핸드폰으로 끙끙거리며 예매했을 그 표 두 장이 어떻게 되든 아깝지도 않은 일이었다. 야.
"너 그거 나랑 친구로서 보러가는 거 아니잖아."
"..."
"난 너한테 여지도 주고 싶지 않거든? 그만하자."
그냥, 나만 데이트라고 생각할게. 너는 그냥, 진짜 그냥 친구랑 영화본다고 생각하고 나오면 되잖아. 동혁은 굽히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지도 않고, 오히려 저를 외면하고 있는 여주의 눈을 마주치려고 시선을 그녀의 두 눈두덩이 근처에 단단히 매어두었다. 불도저도 아니고, 제 마음을 밀어붙이는 동혁에 여주는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기분에 왼쪽 어깨 너머를 한 번 멀리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불도저는 운전대라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맨몸으로 막아서면 좀, 멈춰야 하는 거 아닌가.
"헛 짓 하지 말고 돌아가라."
"여주야."
"우리 친구라고. 친구. 몰라? 그거까지 하기 싫으면 계속 이러던지."
쾅. 대화 내내 반쯤, 딱 여주의 몸 그 크기만큼만 열려있던 현관문이 결국 거센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제서야 동혁의 머리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고백을 한 그 날 이후 여주는 이렇게 계속 강조했다. 동혁과 여주 그 둘의 사이는 딱 친구라고. 지겹게도 들었다. 그런데 나 지금 친구,그거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돌아서는 걸음이 익숙했다. 거절도 반복되니까 조금 덜 아픈가 싶었다.
***
열 살 때 부터 친구였어. 흙먼지 묻은 실내화가방을 빙글빙글 돌면서 학교를 왔다갔다 할 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런 말을 하며 고백을 해? 여주는 목소리를 발발 떨며 말했다. 동혁은 일주일간 마음을 다잡고 또 잡고, 심호흡을 수백번은 더 하고도 뱉은 좋아해 그 세글자에 돌아온 대답이 참, 가열찼다. 애써 꼭 쥔 두 손이 땀에 자꾸 미끄러지는 것 같아 더 꼭 쥐었다.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무것도 놓치고 싶지 않아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남도록 그렇게 세게 쥐었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좋아했어."
"... 그럼 너는 나랑 딱 3년만 친구였네?"
제 진심을 전하려고 덧붙인 말이 오히려 여주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조심스럽게 꺼낸 오래된 마음을 제대로 보이기도 전에 내팽겨쳐진 이동혁보다도 9년지기 친구를 잃은 김여주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래. 방울진 눈물을 흘려내는 게 아니었다. 가는 줄기로 계속 흐르는 눈물이 여주의 볼을 타고 내려가 볼 아래에서 뚝뚝 떨어졌다. 바라만 보고 있기가 너무 가슴 찢기는 기분이라 동혁은 한 발 다가서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두 발을 물러섰다. 고개를 저으며.
"싫어."
"아.."
"너 나랑 친구잖아."
아니지, 나만 너랑 친구구나. 그렇지? 아프게 울면서 참 당차게도 말했다. 이런 순간까지 똑부러지기 있냐. 너무 많아 다 닦이지도 않는 눈물을 어설프게 찍어내는 작은 손등을 바라보고만 있어야했다. 눈이 다 헐텐데, 눈밑이 다 빨개질텐데. 그 순간에도 그게 걱정되어서 자꾸만 눈을 비비는 그 팔을 잡아 내리고 제 소매를 늘여닦아 주고 싶었다. 한 시간만 더 전이었어도 가능했을 그 행동이 이제는 여주가 저 멀리 골짜기 너머에 있는 것처럼 멀어서 할 수가 없었다.
동혁은 집으로 돌아와 그 순간을 되새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좋아한다고만 말했는데 그렇게 멀리 도망가버리냐. 단숨에 받아들일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힘든 반응을 보이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침대에 걸터 앉았던 몸이 뒤로 풀썩 쓰러졌다. 고백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었으면 제가 조금 덜 나쁜 놈이었을까. 우습게도 동혁은, 후련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친구를 잃어서 그렇게 과민 반응 하냐고? 여주는 아주, 복잡해 미칠 지경이었다. 배신감. 분노. 배신감. 상실감. 뭐 그런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서는 더럽게 짙은 색을 띄며 머리 한 가운데를 꾹 누르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 엉키고 설킨 감정의 실타래 속에 친구 사이의 우정, 애정, 그 이상의 감정은 한 오라기도 없었다. 그래서 더 풀리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불 꺼진 방 안은 눈을 뜨고 있어도 검고, 눈을 감아도 검었는데, 그 까만 걸 들여다보고만 있으면 자꾸 장난스럽게 웃는 이동혁이 떠올라 며칠 간은 불을 켜고 자기도 했다. 하얀 형광등은 잔상이 남을 지언정 이동혁을 조금은 내쫓아주었다.
'야 남녀 사이에 친구 없대.'
급식실에서 친구가 은근슬쩍 팔꿈치로 저를 쿡쿡찌르고 동혁을 향해 턱짓을 하며 비밀이야기를 하듯 속삭일 때, 그 때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나는 쟤랑 평생 친구할거야. 내가 이동혁 쟤 결혼식 가서 신부 손 꼭 붙잡고 우리 말썽쟁이 잘 부탁드린다고 당부도 할거고, 쟤도 내 결혼식 와서 내 신랑이랑 어설프게 악수하면서 저 말괄량이가 결혼도 하네요 하다가 나한테 투박도 받을거야. 그러니까, 남녀 사이에 친구없다는 그 근거 없는 말 좀 저리 치워봐. 턱 밑까지 잔뜩 차오른 단어들을 애써 반찬과 함께 삼켰더랬다. 근데 왜,
"좋아해."
네가 나한테 고백을 해. 내가 너를 알고 지낸 그 긴 시간동안 몇 번 본 적도 없는 긴장한 표정을 짓고는. 땀이 날 정도야? 바지에 손바닥을 다 문질러 닦고. 차라리 내 눈을 피하기라도 해봐. 왜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거야. 순간에도 이동혁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 눈에는 그의 옷과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좋은 날 입을 거라면서 네 앞에서 입을 일 없을테니 보여준다며 자랑했던 셔츠에, 작년 생일 부모님께 받았다면서 좋아하던 저 신발. 기어이 차려입고 나오기까지 했구나. 저 이마 아래로는 긴장해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을까. 여느 때의 네 버릇처럼 입 안으로는 살을 씹고 있을까. 모든게 뻔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웃으면서 장난이냐고 넘길 수도 없게 그렇게, 진심을 그득 담아서 나한테 내밀지 마. 나는 그거 받기 싫으니까 네가 도로 가져가. 열 번을 내밀면, 미리 열 한 번 거절할게. 확실하게 말해줄까? 나한테서 이동혁을 앗아가지 마, 이동혁.
우리, 친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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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로 첨부한 노래를 듣고 정말 너무너무 쓰고 싶어서 조금 짙게 써보았습니다. 매번 이렇게 늦은 시간에 글을 가져와서 죄송하네요.
지난 글에 댓글로 주신 소재들도 조만간 들고 나타나도록 하겠습니다. 앗 그리고 제가 동혁이 글만 쓰는 건 아니에요!
암호닉 : 루니 릴리
(이렇게 정리하는 거 맞겠죠..? 흑흑 아는 게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