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예성 - 먹지
"야. 바쁘냐?"
"아니."
내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레 웃어 보이는 너는 누구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럼 나 과제 좀 도와줘."
이맘때쯤이면 항상 기말고사 대체 과제를 두고 머리를 싸매다 결국 나에게 오는 너를.
머리 좋은 친구는 나뿐이라며, 머리 나쁜 자기를 친구 삼은 걸 운명으로 생각하라던 너를.
중학교 때부터 조금만 머리 쓰다 힘들면 바로 나를 찾아와버리던 너를.
"그럴 줄 알았지. 대신 돈까스 사줘."
"오케이! 내가 치즈 돈까스 산다!"
나는 몇 년째 좋아하고 있었다.
-
"아니, 멍청아. 네 눈에는 이게 결론으로 보이냐?"
"멍청이한테 멍청하다고 하지 마라!"
김태형의 집. 내 노트북. 매 학기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멍청이, 바보라는 단어에 서로 반응하며 티격태격 대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다.
우리는 같은 부분을 벌써 20분째 들여다보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이는 곧 내 한숨으로 마무리되었다.
"나와봐. 그냥 내가 쓸게."
"아, 싫어. 내가 쓸 거야."
"나 집에 좀 가자!"
벌써 8시가 넘은 시간, 학교 끝난 지가 5시간이 넘었는데 남의 과제나 도와주고 있는 내가 한심해졌다.
이렇게 열심히 해주면 뭐 해.
내 마음도 모르는 잘생긴 남정네 하나, 이 남정네가 키우는 고양이 심바. 이게 내 주변에 있는 전부인데.
"성이름."
"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타자를 두드리던 김태형의 손이 멈추고,
내가 돌아본 자리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만 바라보는 김태형이 있었다.
"너... 나 좋아해?"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거지.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해버렸나. 아니면 나 모르게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 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열어 내뱉은 말의 끝엔,
'그래서 김태형한테 좋아한단 말은 했음? - 박지민'
김태형의 친구이자 내 친구인 박지민이 눈치 없이 보낸 카톡 창이 열려있었다.
"아, 이게 무슨..."
허겁지겁 창을 끄고 천천히 김태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겠지,라는 불안감이 가득 맴도는 그의 표정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옮겼다.
"그 바... 방탄소년단 김태형 있잖아. 너랑 이름 똑같은 애. 걔 얘기... 하는 거야."
그제야 그는 안심이라는 듯 숨을 한껏 내뱉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뭐야- 놀랐잖아! 아무튼 박지민 얘는 딱 사람을 오해하기 좋게 말해. 안 그래?"
"그... 그러게. 그래도 애는 착하잖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행여 내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까 전전긍긍하던 그의 모습도,
비참하게 아닌 척 변명하기에 급급한 내모습도,
그리고 아니라는 내 대답에 만족해하는 저 웃음도.
밀려오는 회의감에 눈을 감은 내 앞으로 김태형의 목소리가 밀려왔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 좋아하지 마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뜬 내 앞에는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김태형의 뒤통수만 자리 잡고 있었다.
"알잖아. 나 좋아하는 애 있는 거."
다시 한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공대 여신'이랬다. 김태형이 좋아하는 애는. 공대의 수지라나 뭐라나.
그래서 박지민이 그랬다. 저 정도 외모는 돼야 김태형 눈에 들 수 있는 거라고. 김태형이 무식하게 눈이 높은 거 알지 않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비참하고 절망적인 일이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걔는 이런 과제쯤은 껌으로 여겼겠지? 중간고사도 끝장나게 잘 봤다던데."
공부도 잘 한댔다. 교수님도, 학생들도 다 인정하는 자타공인 완벽한 여자랬다.
그런데도 남자친구가 없는 건 연애할 생각이 없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는 너무 무서웠다. 걔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김태형이 눈에 들어올까 봐.
혹여나 김태형이 그 잘생긴 얼굴로 다가가면 속절없이 그 예쁜 얼굴로 웃어 보일까 봐.
만약에 김태형이 그 큰 손으로 머리라도 쓸어주면 덧없이 그 가녀린 손으로 마주 잡아 버릴까 봐.
"야... 야? 성이름. 괜찮냐? 어디 아파?"
누가 전기라도 연결한 것처럼 번뜩 돌아온 정신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나 괜찮아. 다 썼어?"
"어. 나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 그냥 이대로 제출할래."
못하겠다며 고개를 흔들며 기지개를 쭉 켠 김태형은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심바- 심바야 이리 와-"
고양이를 부르는 김태형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정했고 뻗은 손은 섬세했으며 고양이를 쓰다듬는 그의 손짓은 조심스러웠다.
다음 생엔 그의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며 고양이에게조차 질투하고 있던 찰나.
"성이름."
낮은 목소리의 김태형이 내 이름을 불렀다.
"왜 불러."
심바를 소중하게 바라보던 그의 눈이 시선을 옮겨 나를 향했다.
"계속 신경 쓰여서 다시 얘기하는 건데."
아. 설마.
"진짜 나 좋아하지 마."
그래. 그는 꽤나 잔인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