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점점 오고 있다는 생각에 미쳐버린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는데.
재현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가을이 오면 쌀쌀할 거고, 쌀쌀하면 쓸쓸하고 기대고 싶은 그대는 없고. 물론 연애가 인생에서 크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난 지금 술에 약간 취해있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하는 마음이 자꾸만 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미친 게 분명하다고 스스로 세뇌 아닌 세뇌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선배 진짜 재미는 없네요?"
"야, 너 젓가락 그대로 내려놓고 나가."
지금 도영과 의미 없는 걸로 실랑이를 하는 저 모습이 계속해서 보고 싶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오늘 처음 본 사이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황여주 황여주 황여주. 이름마저도 무시하기 어렵다. 왜 황씨야, 왜 이름이 여주야... 멍한 정신으로 마냥 떠들고 있는 옆모습만 바라봤다.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너무, 너무네요."
아 귀여워.
그래. 미친게 틀림 없다. 그러니 큰일이었다. 그냥 앉아서 떠드는 게 이젠 귀여워보인다니. 취했나, 취했겠지, 취했네. 정신승리 중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평소 주량의 반도 안 마셨다는 걸 재현 스스로도 알아서.
그리고 재현은 그 날 처음으로 취한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 줘봤다.
도영이 하겠다고 하는 걸 굳이 제가 하겠다고 나서면서도 혹시 눈치 빠른 도영이 알아챌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도영의 눈치가 알코올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아니, 저 집에 가야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디 사는지 알려줘야지."
"저 집에 가야 되는데 왜 자꾸 물어보고 그르세여..."
아까부터 여주와 편의점 앞에 앉아 이러고 있다는 것. 누군가 지나가다 보았다면 꽤 우스웠을 것이다. 고개도 못 들고 앉아 생수병만 손에 쥐고는 집에 가야 돼요... 만 반복하는 사람과 그걸 웃으며 지켜보는 사람의 조합이라니. 어쩌면 조금 수상해보였을 수도 있고.
선선했던 늦여름 밤. 재현이 여주를 20분 거리의 집까지 데려다 주는데는 약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얼른 들어가서 자."
"아, 그래야지. 선배 안녕-"
손을 열두 번이나 흔들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 들어간 여주를 보며 재현은 그제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번호를 못 물어봤네."
정선배의 사연
"어제 여주 잘 데려다줬어?"
"응."
"그래? 집 주소 말 안 해주려고 했을텐데. 저 집에 가야 돼요~ 이 소리만 하고."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나야 몇 번 데려다 준 적 있, 뭐 왜그렇게 쳐다 봐."
도영은 해장하라고 밥까지 사줬더니 저를 쎄한 눈으로 노려보는 재현이 배은망덕 했다. 내가 무슨 얘기 했다고 저렇게 과민반응이야... 아.
"야, 어제는 내 생일이었지 소개팅 아니었거든."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황여주한테 심장 맞고 나한테 화풀이 하지 말라고."
도영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재현은 종종 그 사실을 잊어 이렇게 무덤을 파곤 했다.
"보나마나 뻔하지. 번호도 못 받고 그냥 보냈지?"
"취한 애한테 번호 받는 것도 웃기잖아."
"그럼 취하기 전에 물어봤어야지."
혀를 차는 도영에 재현은 숟가락으로 애꿎은 해장국만 휘저었다. 울렁울렁 거리는 게 꼭 제 마음같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재현은
"어, 이것 때문에 너희랑 점심시간도 안 맞고. 그냥 드롭할까 봐."
재수강을 욕하며 들어간 강의실에서 심각한 얼굴로 통화하고 있는 여주를 보곤 심장이 발목까지 떨어졌다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쟤가 왜 여기있지? 아니 그것보다
드롭?
일단 그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재현은 평생 손에 꼽을 정도로 해본 거짓말을 좀 해보기로 했다.
"이거 드롭하려고?"
"네?"
여주가 저를 아예 모르는 사람보는 눈빛으로 본 건 퍽 서운한 일이었으나, 지금의 재현에겐 그게 중요하진 않았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아까 친구랑 통화한 거 들어서."
이건 진실.
"안 하면 안 돼?"
이건 진심이고.
"나 이거 재수강이라 꼭 들어야 되는데 너 빠지면 폐강이라서."
이건 진실이나, 진심은 아니었다. 지금와서 '네가 빠지면 이거 진짜 듣기 싫을 것 같아.' 따위의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장난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성격이 절대 못 돼서. 일종의 하얀 거짓말 같은.
어쩐지 반응이 덤덤한 여주에 괜히 피가 마른 재현이 과제나 시험을 도와주겠다며 먼저 한 발 나선 것도 딱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 핑계로 저번에 못 받았던 번호를 얻었으니까.
"뭐야, 넌 수요일 점심마다 왜이래?"
"이 주 째 여주한테 말도 못 걸어봤대."
"번호 받았다며, 카톡이라도 해."
"말도 못 거는 사람이 카톡이라고 하겠어."
도영은 태용의 입에서 나온 부연설명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쟤가 누굴 먼저 좋아해봤어야 알지. 아마 그 날 술자리에 안 나와서 여주를 만나지 못 했다면 평생 짝사랑은 커녕 제가 더 좋아하는 연애도 못 해보고 죽을 사람이 재현이었다.
"재현아."
"...왜."
"지금까지 네가 넌씨눈이라 눈길 한 번 안 줬던 사랑들이 너한테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해."
"미안한데 전혀 위로 안 돼."
"당연하지. 위로 아니고 비난이었으니까."
테이블에 왼쪽 볼이 다 눌리도록 엎드린 재현에 도영은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왜 저래 진짜. 도영은 재현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라이브로 아주 생생하게 경험했던 재현의 구 연애사를 곱씹었다. 그렇게 좋은 연애가 아니긴 했지.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타고 나기를 제 사람은 어떻게든 챙기는 성격으로 태어난 도영은 끝내 재현을 무시하지 못했다.
"밥 사준다고 해. 걔 너 때문에 그거 드롭도 안 했다며. 이유도 딱 좋네."
"그게 먹혀? 너무 옛날 방식이잖아."
"클래식이 왜 클래식이겠어."
그리하여 그 다음 주 수요일 강의가 끝난 후 재현은 곧장 여주 앞으로 가 섰다. 계획이 없으면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지만 뭔가 확신이 서면 쉽게 해버리는 사람, 그게 정재현이었으니까. 게다가 조언 상태가 어떻든 도영은 재현이 아는 사람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고.
"점심 약속 있어?"
"...아니요."
"나랑 먹자, 내가 살게."
예상과는 다르게 재현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없었던 여주 덕분에 재현은 생각보다 쉽게 여주와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대화의 시작을 틀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지금까지 테이블에 볼만 눌러가며 고민했는지.
"저기 저번부터 궁금했는데."
"어?"
"그, 왜... 반말하세요?"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여주는 재현의 눈치를 봤다. 아. 진짜 쟤를 어쩌지. 허, 하고 웃음을 터트린 재현이 아하하 하고 웃었다. 아주 가끔 나오는 재현의 진짜 웃음 같은 거였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기억 못 하고 있었네.
"너 나 기억 안 나?"
그래서 재현은 의도치 않게 도영 생일 날의 기억을 다시 꺼내 풀어놓아야했다. 처음에는 그냥 내가 너 집까지 데려다줬어- 로 끝내려 했는데 이야기를 듣는 여주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것에 흥미가 돋아서 20분 걸리는 집을 왜 1시간 반 걸려서 데려다 주었는지까지 자세히 털어놓는 꼴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우리가 아는 사이인 줄 알았지."
"아... 죄송해요. 제가 그런 기억력이 안 좋아서."
그 대화를 기점으로 재현에게 홀로 세웠던 벽을 깔끔히 치워버린 여주는
"선배, 혹시 수요일에 점심시간 비면 저랑 수요일메이트 하실래요? 제가 친구랑 시간표가 안 맞아가지고..."
재현의 예상보다 더 붙임성이 좋고, 살가운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라 재현으로 하여금 간질거리다가도 묘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니까 재현의 시간이 야금야금 여주와의 연락으로 채워져 가는 게 기쁘다가도
"아, 자기야 같이 가."
"너 진짜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자기장이 사라질 때까지 맞을 줄 알아."
이따금씩 보이는 여주와 동혁을 지나쳐 볼 때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알았어도 피할 방법은 없었겠지만 이건 뭐 하루에 백 번은 더 하늘로 솟았다 땅으로 꺼졌다 하는 기분이었다.
"야, 너 진짜 조울증 검사 받아 봐."
"나 황여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 보여."
"억울하다."
"어쩔 수 없어,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그동안 너한테 계속 질 수밖에 없었던 수 많은 사람을 생각하거라~
도영의 말이 재현의 뼈를 때렸다.
정선배의 사연
딸칵. 후. 딸칵. 흠. 딸칵. 아.
"내가 보기엔 조울증이 아니라."
도영은 아까부터 숟가락 한 번 건들지 않고 핸드폰 홀드 키만 반복해서 누르고 한숨쉬고 하는 재현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아 제 뒤로 두었다. 정신 사납게 진짜.
"신경불안 검사부터 좀 받아 봐. 밥 먹으러 와서 이러지 말고."
"답이 없는데 어떡해."
"알아서 하겠지. 걔가 애냐."
"고백 이후로 답이 없는 건 뭐야?"
"뭘 뭐야, 걔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며."
"형 연락에는 답장 와?"
"안 올 이유가 없잖아."
시큰둥한 도영의 반응에 재현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인생이 다방면으로 망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재수강이고 나발이고 드롭은 내가 했어야 됐네.
-글 시간 배열이 무슨 퍼즐 수준이네요?
-전편도 분명히 제가 썼는데 앞 뒤가 안 맞을까봐 걱정 돼요. 왜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
-결말을 이미 다 보여주고 시작한 글인데 결말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까지 멀 수가...
-도영이 생일 겨울에서 늦여름으로 밀어버려 송구... 핑계가 그것 뿐...
그거 아세요? 이게 제가 쓴 50번째 글입니다 (tmi) 저는 아날로그한 사람이라 글을 노트에 썼다가 노트북에 옮겨 적는데 그 노트도 벌써 세 권을 채웠고요 (tmi) 쓴 글은 지금 다시 보면 한방 삭제 하고 싶을 정도지만 괜히 뿌듯한 마음은 좀 생겨요?
사실 제가 끈기 있는 편은 아니라서 아마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두 편 정도 쓰고 말았을텐데 아무튼 다 선생님들 때문이니 책임, 아 아니 덕분이니 제가 책임을... 어쨌든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