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 오늘 기가 막히게 꾸몄네.” 아 좀 그러지 마세요. 언덕 윗집에 사는 아저씨에게 고모가 타박을 줬다. 누구 하나 오늘 청혼 하겄어. 열 일곱에 무슨. 다른 사람의 말에 고모가 또 성화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음악이 시작되고 청년들과 아이들은 동그랗게 모여 스텝을 밟았다. 그러면 바야흐로 축제의 시작이다. 남국의 백성이라면 이런 깡촌이라도 춤을 추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겠다. “오우.” 한창 정신이 팔려 있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민형이 바로 앞에 와 있었다. 아침에도 꾸민 건 봤으면서 열심히 놀란 척을 해 준다. 이제 파트너와 마주봐야 할 타이밍이라서 나름대로 새침하게 두 손을 맞잡았더니 코를 찡긋대며 웃는다. 그 표정은 뭐야. 나도 같이 웃음이 터졌다. 이윽고 진지하게 눈을 마주치려 하니까 온갖 긴장이 몰려왔다. 이민형은 막 얼굴을 구기면서 웃다가도 잘도 표정을 굳혔다. 어른들은 이런 걸 도대체 어떻게 버티지?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와중에 내려앉는 이성의 시선을 어떻게. 이 분위기를 어떻게. 꼭 무슨 일이라도 벌어 질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오롯이 스텝을 완주 할 수 있을지.... “무슨 생각해.” “그냥 모르겠어.” 하하 실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춤은 이어졌고 내가 말을 이었다. “이따 술이나 마실까 하고.” “고모한테 혼나려고?” 민형이 물었다. 둘러보니까 어른들은 이미 술판이 한창이다. 고모도 그 속에 섞여 있었고 얼굴은 홍빛이 돌았다. 오늘 만큼은 다들 코가 삐뚤어져라 마실 테지. 그렇게 취해도 다들 염소 밥은 주는 사람들이라 괜찮다. “몰래 한잔은 괜찮아.” 속삭이는 듯한 내 말에 민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한 쪽 손을 들어 내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말했다. “먼저 춤추자고 해서 고마워.” “아냐. 승낙해줘서 고맙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또 심장이 간질간질. 마음은 호수에 퐁당 빠진 것처럼 넘실거리고 어지럽다. 민형이 푸스스 웃으며 물었다. “너한테 신청한 사람 없었어?” “그런거 없었는데?” “흠 진짜?” “왜 그래, 정말 없어.” 그래도 민형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때였다. “리듬 바뀌었다.” 내 말에 민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중간에 리듬이 바뀌면 여자들은 한바퀴 돌면서 우측으로 이동, 남자들은 기다린다. 즉 잠깐동안의 파트너 체인지가 있는 것인데 나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수 밖에 없었다. “이따 봐.” 민형의 속삭임을 제대로 들을 여유도 없이 나는 바로 뒤돌아 이동해야만 했다. 하지만 턴이 끝나고 마주친 상대 때문에 나는 찬 물에 빠지기라도 한 듯이 몸이 굳었다. “....참 나.” 이동혁이 내 허리를 감싸고 조용히 끌어당긴다. 끔찍한 분위기 속에서 춤이 시작되었다. 이 무거운 공기에 대한 책임의 탓은 오롯이 서로에게 떠밀고서. 저번에 그렇게 화를 내 놓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자기도 자존심은 있어서...그 날 이후로 서로 입도 벙긋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듬은 다시 바뀌지 않았고 토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는 남국의 춤. 겉으로 보면 어린 남녀가 나름대로 진중한 자세로 춤춘다고 할 것이었다. “싫은 티 되게 나네.” 이동혁이 잠시 중얼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하. 콧방귀를 뀌고 싶었다. 무시로 일관하려다가, 결국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에 입을 열었다. “너도거든.” “...” “네 행동을 봐. 당연히 싫지.” “내가 어쨌는데.” 이동혁이 물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도 유치하고 우습게 들려서 한번 깔깔 웃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 몰라서 물어? 말끝마다 틱틱대고 무시하지, 저번엔 밥 먹다가 포크도 집어던지는데 무서워서 같이 살겠니?”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목소리가 또랑또랑 흘러나왔다. 이동혁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 이동혁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어딘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호수 가장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있는 기분.... 그리고 꼭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이동혁의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그만 손을 밀치듯 놓아 버렸다. “답답해.”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자 마자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나는 그만 뒤돌았다. 왜... 왜 그런 슬픈 눈을 하고.... 하지만 화가 앞서 물어 볼 수 없었다. * 수박은 씨가 많아서 싫다. 나는 수많은 과일 속에서 용케 블루베리만 집어서 먹었다. 민형은 먼 곳에 있던 천막이 허물어져서 도와주러 갔단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떠드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어우러지고 이제는 밤이라 모든 것이 그림 같았다. “뭐 해?”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저번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소녀가 눈 앞에 있었다. 피부는 하얗고 머리칼은 노랗고....이동혁과 짝이라던 그 소녀. 고개를 끄덕였다. “메그 맞지.” “응. 반가워. 너는?” “난 여주 라고 불러. 너 짝은 어디에 두고.” “모르겠어, 하하.” 그렇게 웃는 그녀를 자세히 보니까 술에 좀 취한 것 같았다. 볼부터 귀 끝까지 붉게 물들어 있다. “좀 마셨나 본데 어른들한테 안 혼나?” “뭘 이런거 가지고 혼이 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발음이 정상적이지 않아서 나는 좀 웃었다. 그 때였다. “귀엽긴 하더라.” “누구?” “나랑 춤추던 애 못 봤어?” 이동혁 말 하는 건가? 나는 일단 잠자코 있었다. 메그의 표정에 어딘가 조소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서 둘 다 치마자락을 붙잡아야만 했다.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바람이 차고 먼 하늘에 구름이 꼈다. 쌀쌀하고 이상해. 하지만 메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동양인은 좀 구려.” 그녀의 입꼬리 한 쪽이 귀에 걸렸다. “잡종들은 공감 못하려나.....” 술에 취한 목소리가 늘어진다. 얘 이러려고 왔구나. 날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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