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물의 클리셰
02 , 관계의 이해
"어쩔거야."
"뭘?"
"난 너 가는 쪽으로 갈건데."
여주의 입에 물려진 담배를 빼내며 태형이 옆에 자리했다. 태형의 손에 들린 제 담배를 빤히 보더니 치사하다는 듯 입을 삐죽이고는 태형의 무릎을 베개삼아 옆으로 쓰러지듯 눕는 여주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태형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물 속으로 던진다.
"해로워."
"뭐? 너?"
"내가 왜 해로워. 완전 이롭지. 특히 김여주한테 만큼은."
"넌 이 일 하면서 배신하고 싶었던 적 없냐."
"니가 그랬던 적 있으면 나도 있고, 없으면 나도 없고."
빠지나 싶더니 금세 물 위로 떠오르는 하얀 조각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여주가 태형과 눈을 마주했다. 유달리 까만 그 눈동자는 속내를 한치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 눈동자에 홀려서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있나, 태형은 잠시 생각했다. 그 눈 속에 갇혀있었으니 여주가 보는 세상은 곧 태형이 보는 세상이 되었고, 여주의 세상은 태형의 세상이었고, 또한 여주가 태형의 세상이었음을.
"난, 살고 싶어."
"그래야지."
"어느 쪽도 선택 안해."
"…"
"그래야 이기는 편으로 빨리빨리 돌아설 수 있을거 아냐."
"… 그렇네. 우리 여주 너무 똑똑하다. 여주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데."
"오바하지마."
"떡이 생기는게 아니라 치는ㄱ…"
"적당히 해라 김태형."
짓궂은 농담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답지않게 붉어진 볼이 귀여운지 아프지않게 한 번 꼬집고는 바람이 차다는 핑계로 여주를 먼저 들여다보내는 태형이다. 이런 일을 하려면 몸이라도 좀 쎄보이던가, 날씬하다 못해 여린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여주의 것과 같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특유의 냄새가 좋아 따라 핀 담배가 여태 이 모양이다. 정작 여주의 그 향은 발끝도 못따라갔는데. 오래 머금고 있다 뿜은 담배 연기조차 주인을 아는지 여주가 있던 자리를 천천히 맴돌았다.
이런 일과는 너무 안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성격을 가진 그녀를, 태형은 사랑했다.
"거기서 뭐해? 좀 궁상맞다 보인다?"
"그냥. 예뻐서, 구경."
"김태형이?"
"내가 돌'았냐."
태형과 여주가 함께 있었던 자리가 훤히 보이는 창을 멍하니 보고있던 그에게 놀리듯 말을 툭 던지고는 '졸려, 씻을게' 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여주에 그는 그제야 소파에 몸을 맡긴다. 어느새 그의 볼은 짓궂은 농담이라도 들은 소녀처럼 붉어져있었다. 진짜 더럽게 예쁘네.
이런 일과는 너무 안어울리는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그녀를 그들은, 사랑했다.
-
"진짜 셋이서 하겠다고."
"네, 괜찮습니다. 저희의 생각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분들과만 같이 일하고싶어서요."
"너네의 생각?"
"네."
"김팀장, 난 돌려서 말하는 거랑은 좀 안맞아서 너무 서운하게는 안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씀하십시오."
"그래, 김남준. 그 너네의 생각이란게 뭔데. 그 새'끼들 믿어주는거? 이해해주는거? 아님, 잡아서 마음 돌리고 개과천선할 기회 주는거?"
"…"
"너네가 무슨 자선단체야? 까불지마. 너네 경찰이야. 그냥 일개 대한민국 형사 그게 다라고."
"경찰이니까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자선 단체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특수 범죄 수사팀 형사만이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걔네가 아직 우습게 보이나? 그냥 어린 놈의 새'끼들이 정신 못차리고 총놀이 하는 걸로 보여? 걔네가 경찰 아저씨한테 솔직하게 말하면 다 용서해줄게 하면 사실대로 술술 부는 애새'끼들도 아니고…. 정신 못차리는건 걔네가 아니라, 너네야. 똑바로 생각 못하면 너고 너네 애들이고 싹 다 뒤지는거라고."
화내는 석진의 눈빛은 분노가 아닌 걱정으로 가득함을 아는 남준이기에 그저 입 다물고 서있을 뿐이었다. 처음 경찰이 되어 아주 서툴렀던 시절부터 선배로써, 형으로써 잘 따르고 믿었던 사람이다. 실은 저도 그 애들이 죗값 그대로 끽 소리 없이 죽어야 마땅할 썩을 놈들이라고 냉철한 판단을 못내면서도 그로 인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제 후배들 걱정이 더 앞서는 사람인지라 부러 더 세게 말을 뱉는 석진을 남준이 모를 리 없었다.
"정경위는 왜 넣었어."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가장 잘 맞는 파트너 이기도 하니까요."
"넌 진심으로 호석이가 이 일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조사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이성이요? … 과장님이 그 일을 겪었어도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그러니까. 빼고 가, 정호석. 실력있는 다른 경위로 넣어줄테니까. 우경위도 있잖아."
"아뇨. 그래서 더 필요한겁니다. 미치게 잡고싶은 놈과, 미치게 놓아주고 싶은 놈. 그 두 사람이 아니면 해결될 수 없어요."
-
"응, 엄마. 그럼 잘 지내지 그 큰 회사에서 못 지낼까봐."
'요즘 상사가 성추행도 많이 하고 그러던데 너 그런거 당하고 말도 못하고 그러는거 아니야?'
"엄마,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마. 건장한 남자가 누구한테 성추행을 당한다고."
'건장한 남자건, 연약한 여자건, 그런 구분이 어딨어 요즘 세상에.'
"그런 일 없어 걱정하지마. 나 이제 점심 시간 끝나. 들어가봐야돼."
'그래 내 새'끼. 꾀 부리지말고 일 열심히하고, 밥 잘 챙겨먹고.'
"알았어, 사랑해요 엄마."
발자국 소리에 전화를 대충 끊고는 습관적으로 뒷주머니에 손을 갖다대던 정국이 윤기의 등장에 긴장이 풀린 미소를 짓는다.
뭐야, 이 시간까지 안자고 뭐해 형.
평범한 웃음을 걸치니 평범한 학생같았다. 무엇을 걸치냐가 인생을 판가름하는 세상이었다.
"웬 엄마?"
"아, 공사치는중. 이 아줌마 교통사고로 남편, 아들 다 잃고 미쳐서는 고맙게도 날 아들로 착각하잖아."
"뭐가 고마운데 그게."
"이게 많거든."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이던 정국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와인잔을 집어들어 윤기에게 건넨다.
자식 잃은 과부가 돈이 왜 필요해? 자식인줄 믿는 나한테 다 투자하는거지.
치얼스, 윤기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히고는 건방지게 웃는 폼이 제법 나쁜 놈 다 됐다. 평범하게 살 생각이 없나보다 이 놈. 아니, 어쩌면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하는 짓일지도 몰랐다. 죽으라는 명을 받은 충실한 조직원이 돈이 왜 필요하겠냐고.
"여주는, 자?"
"조용한거보니까 자네."
"이대로 둘거야?"
"이대로 안두면 뭐."
"김여주, 이대로 둘거냐고. 태형이 형도 따라갈거야 이건 형도 알겠지만 백프로."
"지 인생이야. 내가 책임 못져줘. 너도 마찬가지고."
"… 우린 좀 다르지 않았나."
"뭐가 달랐는데."
"내 인생이 곧 형 인생 아니었어?"
정국의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 있다가 이내 윤기가 웃었다.
"난 과부 가짜 아들 인생에는 흥미 없는데."
#
댓글 남겨주신거 정말 너무 힘이 되더라구요
진짜 작가는 댓글로 영감얻고 힘얻고 그런거 같아요 ㅠㅠ 감사합니다 ㅠㅠ
아무래도 제목도 그렇고 경찰팀쪽 이야기보다는 조직쪽 이야기가 더 분량이 많을 수 밖에는 없어요
하지만 내용상 필요한 얘기는 다 풀어드릴거니까 석진이 남준이 호석이 지민이 안나온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ㅎㅎ
재밌게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