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백] 연애의 온도
W. 리플 (Riffle)
01. 현재 우리는, 36.5℃
심장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온 몸에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할 때.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아서 가장 완전한 사람의 체온.
지금 우리 사랑의 온도는, 36.5℃
*
커피포트가 끓었다. 아침햇살처럼 나른하고 온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잘 내려진 커피의 향이 온 집안을 휘감았다.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람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고 간혹가다 지저귀는 새소리만 그윽한 아침이었다.
백현은 한참동안 무언가를 적어내려가다가 제 무릎에 슬며시 잡지를 내려놓았다.
노란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것은 얼마나 손때를 탔는지 모서리가 뭉툭하게 뭉그러져있었다.
코팅이 잘 된 잡지의 표면 위로 빛이 반사되어 검은색 글씨가 반짝였다. '주부 매거진, 오늘의 요리'
된장찌개는 다 끓여놨고 마지막으로 넣을 두부도 꺼내놨고. 계란말이도 다 됐으니까. 아, 이따가 양파도 좀 사다놓고…
어제 봐두었던 장바구니를 머릿속으로 헤집으며 백현이 파묻혀있던 쇼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콧등에 얹혀있는 까만 안경이 아슬아슬했다.
으음, 졸려. 백현은 코를 찡긋거리며 쭈욱 기지개를 켜다가 식탁에 올려두었던 노란색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들고 안방으로 향했다.
아직도 꿈나라에 가있을, 사랑하는 나의 연인을 깨워야할 시간이었다.
"똑똑똑- 찬열아, 아침이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커피 향기와 뒤섞여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얀 방문을 조심스레 열며 백현이 침대 옆으로 다가섰다.
이글루처럼 둥그런고 하얀 이불 속에서 찬열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베개에 눌러붙은 검은색 머리카락만 저에게 보여준 채 이불만 돌돌 말고 깊이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며 백현이 작게 하품했다. 나도 졸린데에…
따뜻한 공기가 백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백현은 조심스레 탁자에 컵을 내려놓고 하얀 이불 속에 파묻힌 찬열을 톡톡 건드렸다. 찬아, 찬열아. 얼른…
어깨를 잡아 이리저리 흔들어봐도 찬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많이 피곤한가.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백현은 입을 꾹 다물고 찬열의 다리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몸 때문에 어느새 잠은 저멀리 달아났는지 잔뜩 잠긴 찬열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으, 이것 좀 놔줘"
"찬아. 밥 먹고 회사가야지"
찬열은 자꾸만 달라붙는 백현의 팔이 성가셨는지 다리를 잘게 흔들었다. 저를 떼어내고서 다시 잠을 자려 고개를 이불 속으로 숨기는 찬열을 백현이 밉지 않게 노려보았다.
그리곤 침대 위로 올라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찬열의 목덜미에 콕콕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오늘, 오늘 회사 안 가도 되는데…. 목소리는 엉망으로 갈라진 채 잠꼬대를 중얼거리며 찬열이 팔을 허우적 거렸다. 쪽,쪽. 백현은 찬열의 팔을 낚아채 곧게 뻗은 손가락에 잘게 입을 맞췄다. 이래도 안 일어날꺼야?
"으아, 나 조금만 더. 피곤해, 응…"
"출근시간 다 됬다니까요"
덩치만 크지, 애가 따로 없네. 백현의 입가에 나른한 웃음이 걸렸다. 손가락을 앙 물던 백현이 찬열의 손바닥을 펴 볼을 부비작거렸다. 흐응, 찬이 손 크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손가락만 움찔거리다가 별안간 찬열이 몸을 홱 돌려 백현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아파, 아파! 허리에서부터 꽉 죄어오는 느낌에 백현이 작게 인상을 쓰며 찬열의 등짝을 내려쳤다.
"이거 놓고, 응? 빨리!"
"몇시야"
"7시. 시간 다 됐다니까"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찬열이 푸스스 웃으며 백현의 뒷통수를 꽉 누르며 입을 가만히 맞댔다. 눈을 감은 채 백현이 했던 것 처럼 쪽,쪽 입을 맞주는 느낌이 묘했다.
방 안의 공기는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무작정 찬열의 등을 때리던 백현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새 찬열의 흰 티를 꼭 말아쥐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앙 물며 가슴을 부딪혀오는 무게가 꽤나 묵직했다. 포근한 방안,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구름모양 솜사탕 속에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젓는 듯 코를 부벼오는 행동에 자꾸만 웃음이 튀어나왔다. 찬열이 뒷통수를 감싼 손을 움직여 백현의 말랑말랑한 볼을 쥐었다.
하얗고, 작고, 자꾸 만지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나의 연인.
"찬아, 잘 잤어?"
"빨리도 물어본다"
*
"나 갔다올게"
"지금 나가려고?"
백현은 입고있던 앞치마에 손의 물기를 닦으며 식탁에 올려두었던 도시락 가방을 챙겼다. 그리곤 헐레벌떡 신발장 앞으로 뛰어와 찬열의 손에 가방을 넘겨주었다.
며칠 전 장을 보러나갔다가 찬열과 함께 골랐던 분홍색 앞치마가 백현의 목에 대롱대롱 걸린 채였다.
"두번째 칸이 반찬이야, 알았지? 저번처럼 또 헷갈리지 말고. 마지막 칸에 과일도 있으니까 꼭 다 먹어야 해"
"알았어"
"피곤하면 커피 마시지 말고 보온병에 율무차 있으니까 그거 마셔. 알겠지?"
"응. 칠칠맞게 코에는 또 뭐 묻힌거야"
이리와봐. 찬열은 넥타이를 고쳐매곤 백현을 향해 돌아서서 손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아, 뭐가 묻었다고 그래. 백현은 멋쩍게 콧등을 문질거리다가 찬열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쑥 내밀었다. 빨리 닦아줘. 자신의 앞에 멀뚱하니 서있는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찬열은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귀여워 죽겠네, 진짜.
말똥말똥 눈을 뜨고 제 얼굴만 쳐다보는 백현을 짐짓 무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딱밤을 놓듯 손가락으로 코를 딱 튕겼다. 아야야…
"자세히 보니까 뭐 안 묻었네"
"아프잖아!"
"됐고"
빨리 와서 안겨. 고개는 저편으로 돌린 채 찬열이 백현에게 팔을 벌렸다. 백현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총총 뛰다가 찬열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몸을 흔들거리던 백현이 팔을 풀려던 찬열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작게 웅얼거렸다. 지금 못보면 저녁에서야 보니까, 많이 봐둘꺼야.
"야. 나 회사 늦으면 너 책임이다"
"에? 그런 게 어딨어!"
찬열은 귀찮은 얼굴을 하다가 백현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두었다. 처음 봤을 때랑 변한 것 하나없고, 참 작고 따뜻하고.
"오늘 밖에 나갈 일 있어?"
"응. 밑반찬이 없어서 좀 사다놓게"
"따뜻하게 입고가. 오늘 쌀쌀하대"
…감기걸리면 너 수발드는 거 귀찮으니까. 툭툭 내뱉듯 백현에게 말을 걸어오면서도 뒷통수를 쓰담거리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괜히 나 걱정되면서 무심한 척은. 백현은 불퉁하게 입을 내민 채 찬열을 밀어냈다. 이제 회사 가, 많이 봤으니까.
"집 잘 지키고 있어"
문을 열고 나서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백현이 이내 주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목에 걸린 앞치마를 벗으며 티셔츠를 툭툭 털었다. 하얗게 거품이 묻은 그릇들을 깨끗하게 헹궈야 할 차례였다. 별안간 닫히려던 문에 하얀 손이 쑥 들어왔다. 찬열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와 백현의 허리를 낚아채 뒷목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바람을 온 몸에 묻히고 들어온 채였다. 낯선 공기의 흐름에 몸을 부르르 떨던 백현이 발버둥을 쳤다. 놀랐잖아!
"깜빡 잊은 게 있어서"
"뭐 놓고 나갔어?"
백현은 금세 차갑게 식은 찬열의 볼에 손을 올렸다. 뭘 놔두고 나갔길래… 밖에 너무 춥다. 감기걸리면 어떡해. 백현은 울상이 된 얼굴로 찬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뭘 잊고 나갔냐면… 찬열이 슬쩍 웃으며 백현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그리곤 급하게 백현의 입술을 찾아들었다.
"이걸 깜빡했어"
꽃샘추위가 밀려와도 항상 변함이 없는 건.
너가 차려주는 밥상, 나를 배웅하는 너의 손, 나를 기다릴 너의 얼굴.
지금 우리 사랑의 온도는, 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