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마음대로에 번외편(?)... 으로 딸려 있는 부분입니다
본편을 안보셔도 내용 이해에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쩐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습니다.
1인칭 관찰자로 쓰는 걸 제가 좋아하거든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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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마음대로 + a
01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고, 또 자기 뜻대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감정 하나 컨트롤하기 힘든데 나를 둘러싼 세계, 대인관계는 하물며 말할 필요도 없지. 그래, 그러니까 내가 우지호와 친구가 된 건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란 소리다. 실제로 지호와 나는 도무지 어울릴만한 교집합이 없었다. 같은 동네도 아닐뿐더러 초등학교도 달랐다. 다만 우리에게는 아주 사소한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흑흑, 딸꾹, 흐아아아앙!”
왜 울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여하튼 나는 그때 울고 있었다. 부모님한테 혼나서 그랬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려서 그랬나? 억울하게 누명을 당해서 그랬나? 원인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서글프고 당황스러웠던 감정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 속에 각인 돼 있다. 10살. 어린 나이에 슬픔의 홍수에 휩싸여서 이대로 콱 죽어버릴까- 누가 들으면 엄한 생각까지 했었던 거 같다. 지금에야 정말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당시는 나의 작은 세계가 휘청거릴 만큼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지나가던 사람들은 웬 어린아이가 저렇게 서럽게 우나 싶어 힐끗힐끗 처다 보았지만 아무도 섣불리 다가 오려하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관심을 갖고 어깨를 토닥여주기에는 다들 너무 바빴던 건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손에 쓸려 눈가가 벌게지도록,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억지로 마음을 쥐어짜며 울고 있을 때였다.
“야.”
소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누구야, 넌 누군데. 내게 관심을 준 게 기뻤지만 겉으로는 너 따위 필요 없어, 가버려 란 표정으로 소년을 사납게 노려봤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소리치는 고집불통의 악동처럼.
“닭꼬치 먹을래?”
울음이 멎었다. 나는 멍하니 소년의 손에 들린 노릇한 닭꼬치로 시선을 옮겼다. 머스타드 소스에 빨간 양념이 군침이 나올 만큼 맛있어 보였다. 엉엉 우느라 기력을 다 소진해서 유난히 배가 고팠다. 모르는 사람에게 염치없이 바로 달라고 하기도 그래서, 배만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보는데 소년이 닭꼬치를 내밀었다.
“먹어도 좋아.”
선심을 쓴다는 듯한 말투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지만 유혹에 약한 어린이답게 나는 굴욕적이든 말든 일단 한입 베어 물었다.
“……!”
닭꼬치는 맛있었다. 정말, 정말 맛있었다. 고기는 신선했고 육즙도 괜찮았고 적당히 달달했다. 다만 청양고추를 백개는 썰어놓은 듯 무지막지하게 매웠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매, 매워!”
진짜 맵다. 토하고 싶은데 이미 씹어서 꿀꺽 목으로 넘긴 후였다. 입안 천장이 다 까지는 느낌. 속은 뒤집어지고 양념이 묻은 목구멍은 불이 활활 솟았다. 혀가 따끔따끔하다 못해 아려서 눈물이 찔끔 났다.
“매운 거 잘 못 먹는구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닭꼬치를 베어서 오물오물 씹어 먹는 소년을 보며, 나는 아마 그때부터 공포를 느꼈던 거 같다. 세상에, 저 매운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먹다니! 놀라움을 넘어서서 경이까지 들었다.
“이름이 뭐야?”
덕분에 우울한 기분은 완전히 가셨다. 사실 내가 왜 울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나는 어떻게라도 얼얼한 감각을 없애려고 후후 입을 불다가 조그맣게 종알거렸다.
“박경…….”
“박경이라고? 성이 박씨야?”
“응.”
“그렇구나. 이름이 한 글자라니 신기하네.”
아무렇지도 않게 닭꼬치를 먹는 네가 훨씬 더 신기하다만은. 나는 가느다란 소년의 검은 모발을 보며 왠지 내 친구들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얼굴이 험악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팔다리도 가늘고 얇았는데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넌 이름이 뭔데……?”
내 옆자리에 앉아 앞을 보고 닭꼬치를 먹던 소년이 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검은 도화지에 검은 크레용을 박박 문지르면 저런 새카만 색이 나올까. 아주 까만 소년의 눈동자에 완전히 압도당해있는데 소년이 씩 웃었다.
“우지호.”
그리고 나는 그때 앞으로 이 녀석과 얽히겠구나, 하는 육감 아닌 육감을 감지했다.
02
“삼각김밥 좀 사와. 치즈불닭으로.”
바쁘다고, 싫다고 하니까 사정없이 등짝이 발로 차였다. 이 누님이 시험기간인데 밖에 나돌아 다녀야겠니? 응? 귓바퀴가 울리도록 계속 징징거려서 하는 수 없이 (사실은 무서워서) 누나의 심부름을 다녀와야 했다. 이제 나도 중학생이란 말이야! 무시하지마! 라고 항변해도 누나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코앞에 다니는 게 귀찮으면 안 먹으면 될 거 아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가장 짧은 것만 골라 담았다. 심부름 값으로 (물론 누나는 허락하지 않을 테지만) 멋대로 아이스크림도 사서 입에 물었다. 후우우. 이러니까 한결 기분이 낫네.
애꿎은 땅을 퍽퍽 차며 걷는데 이제는 아련해진(?) 초등학교 운동장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기 있을 녀석이 아닌데 싶어서 후다닥 달려가니까 진짜 그 녀석이었다. 우지호.
“여기서 뭐해?”
“박경 하이.”
뭘 보는지 지호는 계단에 앉아서 운동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늦으면 누나가 지랄지랄거릴 게 불 보듯 뻔했지만 골탕 먹으라는 속셈으로 지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조금 늦는다고 무슨 일 있겠어, 설마.
“아참, 너 오늘 이사한다고 했지? 그게 우리 동네야?”
“어.”
“그러면 같은 중학교 다니겠다…….”
“아마.”
여전히 이쪽으로는 눈길도 안주는 채였다. 뭘 그렇게 지호가 유심이 보나 싶어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운동장에서 시끌벅적하게 놀고 있는 초딩들이 보였다. 그래, 초딩. 나는 초딩에서 졸업한 중딩이므로 원 없이 초딩초딩 할 수 있는 지위였다! 물론 나이 먹는 게 좋았던 건 딱 그 때 뿐이었지만.
“야, 쟤 귀엽지.”
누구? 라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무리 중에서 한 아이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 축구 중이었는지 골을 넣고 친구들에게 헹가래 받는 아이. 쩔쩔 땀에 절어서 온통 몸에는 땟국물이 흘렀지만 뭐랄까,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람이 전구도 아니고 무슨 빛이 나겠냐만은 아이는 주변을 생기 있게 만드는,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눈으로 보고도 의심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긍정의 파워랄까. 보조개가 움푹 파일만큼 활짝 웃는 아이를 보면 악마라도 그 앞에서는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석 같은 애네.”
특별히 잘생긴 아이는 아니었지만 정말, 딱, 보석 같은 애였다. 나보다 어린 사내놈에게 이런 수식을 붙이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지만 진짜로 보석 같았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반짝 빛나는.
“응. 가질 거야.”
어, 뭐라고?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서 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지호는 소리 없이 타오르는 눈동자로 줄곧 아이의 신형을 좇으며 확인 사살을 날렸다.
“내 꺼라고.”
그 아이의 이름이 표지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훗날의 일이었다.
03
우지호는 독종이었다.
지호는 본인의 입으로 한 말이면 무엇이든 끝내 지켜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라도 지호가 말하면 정말로 이룰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하건 못하건, 좋아하건 싫어하건 지호는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다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목숨을 걸고 덤볐다. 도대체 어떻게 크면 저리도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지호 옆집에 사는 표지훈이라는 꼬마가 (실제로 나이는 한 살밖에 어리지 않았지만 어릴 때일수록 나이에 민감하다는 걸 알아두자) 동네 양아치 형들에게 삥 뜯겨서 얻어맞고 온 것이다. 어떻게 맞았는지 호빵처럼 얼굴이 퉁퉁 불어서 이곳저곳 멍 자국이 없는 데가 없었는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측은해졌다.
“누구야.”
“…….”
“누구냐고. 너 이렇게 만든 사람이.”
칠판에 쇠꼬챙이로 끼이익 긋는 듯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이럴까. 우지호는 화가 날수록 냉정해지는 타입이었는데 지금의 지호는 얼굴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서 눈도 유리알처럼 투명해져있는 상태였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감도 안 잡힐 정도였다.
“그, 그러니까…….”
입을 꾹 닫고 안 말하려는 지훈을 지호가 달달 볶아 토해낸 몇 가지 단서로 추정해 보면 그 양아치들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거다. 못해도 고등학생에 적어도 세 명 이상. 이제 중학교 1학년인 풋내 나는 우리가 어찌해볼 레벨이 아니었다. 이러다 너도 다친다고 지호를 말려봤지만 막무가내였다. 누군지 안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지호는 집요하게 지훈을 괴롭힌 무리를 찾아다녔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고 어린애인 우리는 빠지자고 말해도 요지부둥이였다.
그렇게 일주일 후ㅡ.
거짓말처럼 지훈을 괴롭힌 양아치 무리들을 지호가 싹다 잡아왔다. 어디서 얻어 터졌는지 코에 휴지를 집어넣은 꼬락서니로 지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아치들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족히 백 칠십은 넘은 사내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광경이란 직접 보면 아무도 믿지 못할 거다.
“미, 미안해……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어, 제, 제발 용서해줘……! 허억!”
지호가 아는 무서운 형들이라도 있는 걸까?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의 일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어떻게 한거냐고 꼬치꼬치 물어봤지만 끝내 지호는 답해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호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던 고등학생 형들. 그 때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었다.
세상이 멸망해도 절대 우지호는 적으로 돌리지 말자고.
04
“아아아아아~ 배고파아아아아아아~”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대고 뒹굴뒹굴 거리자 지호가 한심하단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렴 어때. 심심하고 배고픈 건 정말 참을 수가 없어! 으아!
시간은 흘러 바야흐로 중2 여름. 내가 서서히 우지호를 진짜 ‘친구’로 의식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국수 먹을래?”
“아싸, 신난다. 나 국수 짱 좋아하는데!”
벌떡 일어나서 발을 동동 구르니까 지호가 읽던 책을 접고 부엌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낸다. 그 모양새가 꼭 직접 국수를 만들려는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랐다.
“시켜 먹는 게 아니라 네가 하려고?”
“어. 부모님이 맞벌이라 혼자서 자주 밥해먹거든. 금방 해.”
충격이었다. 나는 요리라고는 인스턴트 라면밖에 못했기에 혼자서도 척척 잘하는 우지호는 굉장히 선구적으로 보였다. 정말 여러모로 사람을 절망시키는 재주를 가진 놈이다.
“아, 지훈이 불러올까? 다 같이 먹음 좋잖냐.”
문득 생각나서 말하자 소쿠리에 삶은 면을 담던 지호의 손이 뚝 멈췄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학원가서 없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정말 지훈은 10분 후에 집에 왔다. 다행히 지훈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쫄쫄 굶은 상태라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나, 지호, 지훈은 지호가 만든 특제 잔치국수를 나란히 상에 놓고 후르르짭짭 들이켰다. 요리는 당연히 여자가 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남자인 지호가 이토록 환상적인 국수를 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대단한 놈.
“우와. 지호 형! 너무 맛있어요. 헤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겠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는지 하얀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볼이 터지도록 국수를 삼켰다.
“어…….”
지훈의 칭찬에 지호는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빛에 가려져 그림자가 진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지호는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제대로 웃지도 못하고 국수 면만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거 같다. 수줍게 올라간 지호의 입 꼬리에, 나는 두근두근 기분 좋은 울림으로 뛰는 지호의 심장박동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지호의 귀여운 면모만을 발견했을 뿐, 후에 지훈이 역정을 낼 정도로 요리를 해서 갖다 바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로.
05
“표지훈은 무슨 인기가 그렇게 많은 거야?”
종이처럼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기에 뭐가 그리 못마땅한가 싶었는데 대뜸 내뱉는 소리가 저거였다. 평소에 우지호가 표지훈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도 저렇게 노골적인지 몰라서 나는 그만 사례가 걸렸다.
“뭐, 좋은 거 아냐?”
“아니!”
지호는 엄청나게 단호히 말했다.
“표지훈은 내 거란 말이야. 다른 놈들이 눈독 들이는 거 용서할 수 없어.”
아, 네. 그러세요? 잔뜩 빈정거리고 싶었지만 지호의 얼굴이 하도 진지해서 장난 칠 수가 없었다. 흠, 그러니까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란 건가? 하긴.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처럼 지훈을 챙겨준 지호니까 그런 심정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럼 지훈이 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되지 않아?”
정말 별뜻 없이 던진 말이라서 나중에 지호가 그런 미친 짓을 할지는 정말 몰랐다. 만약 지훈이 알게 된다면 날 반쯤 죽여 놓을지도…….
“어떻게?”
“으음. 모두가 싫어해도 나만은 널 감싸 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도록 하는 거지.”
내 말에 우지호는 한참이나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별안간 눈을 반짝이고 손뼉을 짝 쳤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고맙다, 박경- 가방을 메고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지호를 창문으로 보면서 처음으로 나는 지호에게 도움이 됬다는 것에 의기양양 했었다. 그때는 저 미친놈이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일지는 정말 몰랐지.
표지훈을 돼지로 만드는 작전을 짤 줄이야…….
06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진물 날 정도로 우지호랑 붙어 다녔던 유년기의 추억을 뒤로 하고 막상 대학교로 올라오자 서로 학교가 달라서였는지는 몰라도 지호와 나는 자주 만나지 않게 됐다. 아주 연락을 끊은 건 아니었지만 전만큼 친하게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 각자 묵묵히 미래로 나아갔다. 남들은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을 간다던데 참 이상한 일이지.
그랬기에, 표지훈을 빼고는 남에게 잘해주는 일 없이 무뚝뚝한 우지호이기에, 아무런 연락 없이 지호가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경…… 오, 랜만이다?”
더구나 술에 잔뜩 취해있는 인사불성의 우지호라면.
술을 즐기는 나도 코를 후벼 파듯이 독한 술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 결혼기념으로 제주도에 3박 4일 여행 가셨고, 누나는 친구네서 잔다고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는 휘청이는 지호의 어깨를 부축하며 일단 내 방으로 옮겼다.
뚱뚱하지는 않았어도 덩치가 있어서 제법 무게가 나갔기에 거의 우지호를 집어던지다시피 침대에 눕힌 나는 본격적으로 심문했다.
“왜? 무슨 일인데?”
추궁어린 내 물음에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천장을 올려다보던 지호가 불현듯 쿡쿡 웃었다.
“표지훈, 표지훈… 지훈아……….”
가슴이 시큰 아릴 정도로 간절한 부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지호의 입술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지호는, 뭐랄까, 친구였으되 친구가 아니었다. 또래와 달리 지호는 늘 어른스럽고 냉정하고 사리 분별이 뚜렷했다.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일을 그르치고 후회할 타입이 아니었기에 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나란히 걷고 있어도 언제나 지호는 내 앞에 한발자국은 먼저 내딛고 있다고. 저런 냉혈한은 한 번도 상처 받지 않고 세상을 헤쳐 나갈 거라고.
그러나 내 침대 위에서 형편없이 울음을 삼키는 지호를 보며 그런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 우지호도 사람이구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고. 지금 돌이켜보면 우지호는 정말 대인관계에 서툴렀던 것 같다. 호의를 갖고 접근하는 사람에게도 차갑게 자기 할 말만 내뱉을 정도로 말 주변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관심이 있어도 멀리서 우지호를 지켜보며 뱅뱅 겉돌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지호는 사람들과 멀어져 외톨이가 되었고 그런 녀석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의지할 타인이라고는 나와 표지훈, 둘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나와 멀어지더니 이제는 표지훈과도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우지호에게는, 놈에게는 나와 지훈이 전부였는데.
“미안…….”
달빛에 뼈마디가 녹아드는 지호의 손을 맞잡았다. 표지훈과 우지호를 어떻게든 다시 이어 줘야할 이유모를 사명감을 되새기며 나는 오랜만에 친구의 손으로 따듯한 온기를 건넸다.
[그 인간이랑은 다시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아요.]
우지호를 위해 표지훈과 어떻게 연락이 닿았을 때는 생각 이상으로 냉정한 대답에 기운이 쏙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에는 형아, 형아 하면서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시간이 무섭다고 어쩜 사람이 이렇게 변하냐. 뜻하지 않은 전개에 말문이 막혀서 몇 초간 입만 뻐끔거리다가 간신히 아무렇게나 단어를 뭉쳤다.
[그, 그러면 쓰나. 우지호가 널 얼마나 챙겨 줬는데. 응?]
[챙겨 줬다고요? 능욕한거겠죠. 하하, 생각만 해도 기가 차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뒤에 표지훈이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너무 작아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능욕이라니. 나는 우지호가 표지훈 만큼 진심을 담아 행동한 사람을 맹세컨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어…… 뭔가 오해한 게 아닌가 싶어.]
[오해요? 내가 좋다고 찾아오는 여자들 마다 족족 작업을 걸고서는 오해요?]
격양된 듯 올라가는 지훈의 목소리에 슬슬 사건의 전말이 그려지는 듯 했다. 하아. 이 우지호 단순하기가 단세포와 박빙을 이루는 놈아.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거야, 지호가 네가 좋으니깐 질투가 나서…….]
[…….]
어떻게든 지호를 변호했지만 그 뒤로 지훈은 한참동안 묵묵부답이었다. 끊은 건가? 내가 의아해서 전화기를 가만 내려다보는데 구슬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살… 뺄 거예요. 꼭 살 빼서…… 보란 듯이 우지호보다 잘 살 거예요.]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07
그 뒤로는 우지호와 표지훈, 둘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마음 같으면 지호가 지훈을 잘 길들여서 주인님 노릇 톡톡히 하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만은 또 한편으로는 영영 헤어져 얼굴도 안보고 살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표지훈도 우지호도 이사를 가버렸고 전화번호도 바뀌어서 도무지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나중에 우지호가 다니던 대학교로 찾아가 봤을 때는 이미 자퇴한지 오래라고. 동창생들의 말로 계산해보면 지호는 우리 집에 불쑥 찾아와서 질질 짠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자진 입대한 거 같았다.
시간은 손으로 잡을 수도 없이 쏜살같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1년… 3년…… 5년 ………. 좁은 지구에 바글바글한 사람 수 만큼이나 스트레스 받는 사건도 넘쳐났고 나는 내 앞에 주어진 미션을 클리어하기도 바빠서 주변을 제대로 살펴볼 여유도 없이 시간에 덜미를 잡힌 채 질질 끌려 다녔다. 시간과 일에 짓눌리고 짓눌려서, 약간은 피폐해진 삼십대를 둔 마지막 날에, 나는 불현듯 우지호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 우지호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많은 영향을 준 친구.
“잘 지내고는 있으려나, 그 녀석.”
나는 현재 자동차 판매원으로 빠듯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로 고객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뛰는 직업이라 이곳저곳 안 다니는 곳이 없었다. 지금은 충청북도 단양군의 한 커피숍. 회사에서는 중요한 고객이라고 이미 귀에 땜질을 박아 놓은 터라 1시간 일찍 와서 파일을 훑어보며 할말을 미리 연습하고 있었다.
봄이라 그런지, 창문 너머로 꽃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감성이 센티멘탈해져서 남은 시간동안 멍하니 창밖을 보며 찬찬히 과거 여행이나 떠나있을 때였다.
‘어?’
눈에 비친, 팔짱을 끼고 길을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던 것이다. 판판한 등짝과 가는 검은색 모발의 남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친근했고 그 옆에 붙어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상하리만큼 번쩍번쩍 광채가 났다. 앞모습이 아닌지라 단번에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았어도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한없이 친숙하고, 아련하고, 그리웠다. 이상하게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한참을 창문에 붙어있는데 두 남자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지면서 가려졌던 눈과 콧대가 나타났다.
‘!!!!!’
그 순간 벼락처럼 찾아오는 깨달음. 턱을 덜덜 떤 채 망부석처럼 굳어있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커피숍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니, 나오려고 했을 참이었다.
“박 경군?”
낯선 사람의 부름에 스프링처럼 금방이라도 튕겨나갈 다리가 퉁 주저앉았다. 누구……? 올백으로 넘긴 머리에 반듯한 인상의 사내가 내가 목에 걸어둔 사원증을 가리켰다.
“제가 듣기로는 박 경이란 사원이 안내를 해주신다고……. 설마 제가 너무 늦게 와서 화가난 나머지 뛰쳐나가던 중이었나요?”
“서, 설마요. 절대로 아닙니다. 미리 자리 잡아뒀으니 따라오세요.”
최소 10억이야! 절대로 책 잡혀선 안 돼! 하고 소리치던 상사의 목소리가 뇌 속에서 웅웅 울렸다. 무거운 현실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후우. 그래,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이런 거대 고객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거다.
그래도, 가슴이 쿵쿵 두근거렸다. 꽃바람을 타고 온 두 사내의 뒷모습이 잊혀 지지 않아…….
“저기요?”
“아, 아 죄송합니다. 이 사장님… 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내가 너무 넋을 놓고 있었나보다. 상대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핀다. 나는 최대한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아니요. 하하, 나이도 동갑인데 이민혁, 편하게 민혁이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꽃향기가 커피숍까지 가득 들이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