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충분한 날이 있다. 창가를 통해 하늘을 보며 그 아래에서 나는 소음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그러다 문득 측은해진다. 무엇이? 쉽게 정할 수 없다. 발 디딛고 살아온 이 세상은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 지금까지 같은 것인데 왜 나는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있는 걸까. 어린 날의 나는 내 머리 주변을 감싸는 분홍빛 오로라라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내가 원하던 세상을 지킬 수 있었던걸까. 아무것도 몰랐기에 행복하고 즐거웠던 날들. 아무 생각없이도 충분했던 날들. 조금도 망가지지 않았던 날들. 그때 앓았던 몇개의 고민마저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귀여울 뿐이다. 짧게 미소지은 후 이제 현실을 바라본다. 당장 고개를 내려 내 몸을 바라본다. 많은 게 변했다. 자라난 뼈마디와 커진 몸들이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있었던 것 처럼, 작았던 때가 없었던 것 처럼 그렇게 두 눈에 박힌다. 그러다 문득 키보드를 본다. 얼마전에 자른 손톱이 거슬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이 참 크다고 느낀다. 나는 자랐다. 하지만 다 자란 것인지 더 자랄 것인지는 모른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이 상태가 머무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완벽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과연 몇가지가 될까. 그러한 것들은 터무니 없게 적기 때문에 사람들은 논쟁하고 또 논쟁한다. 이를테면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야한다!' 같은 말에 수많은 의견이 엇갈리며 일치된다. 완벽하게 엇갈리는 의견도 완벽하게 일치된 의견도 없다. 모두 다 애매하게 걸쳐져 있을 뿐이다. 왜 획일화 된 하나의 정답은 없을까?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서서히 알아갈 때마다 나는 그냥 조금 슬퍼진다. 왜 어느 하나 완벽하게 옳다고 말할 수 없을까, 나는. 머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내 안의 원초적인 의문은 사라지고 쓸데없는 잔여물이 계속해서 휘돌아감을 느꼈다. 답이 없는 것들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한번 건드려나 보고 있다.
다시 나로 돌아간다. 모든 세상의 중심이 나였던, 그저 내가 최고였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면서 최고임이 당연했던 그 시절을. 이제는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완벽하게 1등이였던 때는 4만개의 정자들이 펼친 레이스 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은 누구일까?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완벽한 답을 할 수는 없다. 누가 똑똑한 것으로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될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렇게 늘 중간 그 쯤을 머물면서 도약하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는 평범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도움이 될 만한 바업이 하나 있다. 물론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임을 안다.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쯤은 읽어서 뇌리에 한번 떠올리는 것도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눈에 띄지 않게 살지도 말것이며 눈에 띄게 살지도 마라. 그러니까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튀어야 한다. 그렇다면 뭘 어쩌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개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나 또한 이 말에 동감하고 있다. 너무 평범해서도, 너무 눈에 띄어서도 안된다. 이것이 인생을 안정적으로 사는 방법 중 가장 보편적인 하나이다. 어쩌면 이걸 읽는 당신도 이미 이 답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단순히 한 문장을 만들어보지 않았을 뿐. 왜나면 이것이 평범한 우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그리고 그 예외를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할 것은 많아진다.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해 극단적으로 치우쳐야했을 때는 얻는 것 만큼이나 리스크도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극단적'이라는 단어 자체에 호감을 느끼지않는데, 이것은 이미 살아온 인생에서 그것이 좋지 않음을 자신도 모른 체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외적인 것을 택하지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어쩌면 나 혼자일지도 모르겠지만)의 대다수는 분명히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가장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한 것 뿐이다. 그러니까, 혹여라도 예외적인 삶을 가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 결국 세상을 바꾸도록 '이끄는' 것은 그 극단적인 사람들임을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어떤 선택이든 명확하다면 그렇게 해라. 사실, 명확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고 싶은 걸 해라. 하고 싶은 걸 하기가 겁나서 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하지 마라. 너 스스로를 잘못되었다 욕할 수 없다. 네 선택이 당당하든 아니면 다소 비겁하게 느껴지든 너의 선택이니 그냥 존중해라.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남과 다름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남과 같은 것을 일차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 안에서 내가 남과 다름을 아주 작게 어필하고 있다. 이러한 내 삶이 무척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만족이라는 말의 아주 작은 부분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 될 정도는 말이다.